"기독교 역사를 통해 나타난 가장 아름다운 '영성'의 기반은 '자발적 가난'으로부터 시작되는 듯합니다. 자발적 가난은 또 자신의 소유를 포기함으로써 시작되지요. 곧 공동체로의 삶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공동체는 나눔을 전제로 하며, 나눔은 곧 소유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가능한 생활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런 자발적 가난은 의외로 풍요로움을 가져다 준다는 게 수많은 수도사들의 고백이지요. 하여 그들은 비로소 가난한 이들의 아픔에 눈뜨게 된다 합니다. 이런 신선한 가치를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기독교적 삶을 가능하게 하는 영성인 셈이지요. 그러니 기독교의 영성은 공동체의 영성과 길을 달리 할 수 없습니다"(오세택 목사).

대학에서 선교단체 회원으로 있을 때 어느 TV방송국에서 마련한 성탄절 특집 프로그램을 방청한 적이 있었다. 토론 프로였다. 매우 존경하던 목사 한 분이 패널로 참여하고 있었는데 토론 방향이 이상하게도 그 목사에게 타깃을 맞추는 양상으로 진행됐다. 목사들의 생활이 다른 종교의 성직자들에 비해 훨씬 사치스럽다는 게 초점이었다. 패널 가운데 목사는 혼자였으므로 당연히 화살을 받을 수밖에 없는 분위기였다. 그는 토론 시간 내내 끙끙대는 표정이 역력했다. 내가 알기로도 그는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출고되는 승용차로는 최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녔으며, 그의 집 역시 서울에서 가장 부유층들이 몰려 사는 마을에 위치해 있었다. 지금 생각기에 그는 "허리가 좋지 않아서" 큰 차를 탄다는 말만 반복했다. 이것이 방송으로 나왔을 때 이런 부분은 많이 생략된 상태였다. 아마 성탄절의 분위기를 고려했으리라 여겨진다.

거의 15년 전 이야기다. 그 후로도 목사들의 사치스런 생활을 반증하는 많은 이야기들이 꾸준히 오르내렸다. 여대생들이 가장 선호하는 신랑감이 한 때는 목사였다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 이유는 불을 보듯 뻔하다. 목사가 가난하게 산다면 결코 '판사 검사 의사'와 함께 목사의 '사(師)'자를 함께 생각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 물론 많은 사람들은 알고 있다. 여대생들이 선호할만한 목사는 전체 목사들 가운데 10%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란 사실을. 그러나 그 10%도 안 되는 목사들이 한국교회의 목사들을 대표하는 양 비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각 교단의 본부 사무실이 있는 빌딩 앞을 가보면 이런 현실을 쉽게 볼 수 있다. 거기에선 교단에서 내로라는 목사들이 자주 회의를 갖는다. 그들이 건물 주위로 주차해 둔 차들은 대형 고급승용차들로 즐비하다. 마치 대기업 사주들의 모임을 방불케 할 정도다. 오세택 목사의 '자발적 가난'이 가져 온 영성을 대입한다면 이들은 도대체 어떤 영성을 소유한 것일까? 그들의 그 '부요한 영성'으로 무소유를 말하고 버리고 떠나고자 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설득시킬 수 있을까? 가난과 풍부에 거하는 비결을 깨달았던 사도 바울의 고백은 아마 가난과 풍부의 상황을 살면서도 하나님의 변함 없는 도, 그 '자발적 가난'의 도를 놓치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닐까?

"우리 교회도 도시에 위치해 있지만 도시가 줄 수 없는 것이 자꾸 보입니다. 식물을 가꾸거나, 땅을 밟거나, 녹색의 자연환경을 봄으로써 비로소 얻을 수 있는 무엇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도시 생활에서 이런 여유를 갖기란 쉽지 않지요. 물질만능주의를 포기하고 정신적인 건강에 관심을 가질 때 가능한 일입니다. 자발적 가난의 영성이 이런 정신적 사유의 공간을 확보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요즘 집에서 TV를 껐습니다. 아예 없애버렸습니다. 가정예배에 방해를 주는 아이의 학원수강도 줄였습니다. 그제서야 가족이 대화할 시간이 생겼어요. 중요한 많은 가치들이 도시의 속력에 매몰되고 있음이 보여요. 어쩌면 우리에게 주어진 로마서 5장의 구원론은 이런 삶으로부터 돌아서 하나님의 소중한 것에 착념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그 다음 장으로 넘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오세택 목사)

자발적 가난이 가져온 영성은 도시의 비인간적 조건들에 대해 저항하는 모습을 띤다. 곧 목사는 도시에 살되 도시의 온갖 해악들로부터 자유할 수 있는 영성을 지녀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많은 도시의 목사들 역시 그들이 살고 있는 도시에 함몰되어버리는 듯하다. '도시화'로 표현되는 일련의 생활 패턴을 비판 없이 수용하고 있는 듯하다. 노동문제, 사회범죄, 청소년문제, 교통문제, 주거문제, 환경문제, 인간성 상실의 문제, 교육문제…, 이런 다양한 문제에서 결코 목사가 대안이 될 수 없는 것이 도시에 잘 적응하고 있는 목사들을 대변한다. 그들이 있어야 할 자리를 놓치고 있는 셈이다. 노동분규의 현장에서 그들은 보수언론의 논조를 그대로 수용해 사회안정과 경제성장을 부르짖고, 범죄의 동기에 골몰하기보다 손쉬운 손가락질로 일관하며, 청소년의 심리 깊은 곳을 이해하려는 노력보다 기성세대의 편에서 단죄하기에 익숙하다. 결국 교회도 목사들과 함께 우리 사회의 대안이 되기는커녕 사회변혁을 가로막는 거대한 벽이 되고 말았다.
그러면서 그들은 '영성'을 부르짖는다. 책을 쓰고, 강의를 한다. 기독교의 영성을 축소시키는 것은 물론 왜곡시키는 것이다. 삶을 떼 내버린 영성이 성서 어디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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