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오래 전부터 SBS 아침 드라마 "이별 없는 아침"에 대한 많은 비판과 우려의 목소리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 이 드라마는 마치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보인다. 애초에 주인공을 제 정신이 아닌 것으로 그려낼 생각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이제 확실히 미쳐 가는 주인공을 보며 시청자들은 아침마다 열이 받는다.

시청률 획득 전쟁 때문에 망가지는 드라마들

시청률이 광고 단가에 반영이 된 작년부터, 방송사들의 시청률 획득 전쟁은 가히 엽기적이다. 드라마가 이 전쟁의 기동 타격대이고, 그래서 조금만 시청률이 떨어진다 싶으면 시청자들의 눈을 끌려고 기괴한 갈등과 사건들이 펑펑 터진다는 사실은 이제 거의 공식화되고 말았다.

하지만 드라마는 기획안 단계부터 등장 인물간의 관계나 갈등에 소위 '건수'가 있지 않으면 아예 제작조차 되지 않는 게 현실이다. 다시 말해 이미 시작부터 별난(혹은, 정상이 아닌) 이야기들만 드라마로 제작된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청률이 안나온다고 한 두 번 무리수를 두다보면, 드라마는 현실에서 괴리되기 마련이고 급기야 형편없이 망가지고 마는 것이다.

SBS의 "이별 없는 아침"은 삼각관계에 놓여있는 여주인공 현수가 정인을 향해 차를 몰고 돌진하기에까지 이르렀다. 마치 공포영화 미저리를 보는 듯한 기분이다.
  
"이별 없는 아침"은 주인공 정인과 남동생 정우, 여동생 정서 등 세 남매의 사랑 얘기가 얽혀 진행되는 드라마이다. 그런데 이 세 남매의 사랑이 몽땅 기구하기 짝이 없다. 남편과 사별한 정인은 죽은 남편의 주치의와 사랑하는 바람에 그의 약혼녀로부터 가히 정신병적인 보복을 당하고 있는 중이다.

사법고시를 패스한 남동생 정우는 장인 될 사람이 가난한 집엔 딸을 못 준다고 결사 반대를 해서 그 딸이 가출까지 감행했다. 하지만 결혼도 하고 고시도 패스했으니 셋 중 제일 낫다. 지금은 그렇게 반대하던 장인이 사위 자랑을 하고 다닌다. 그 이유는 자기 사위는 열쇠 몇 개 따지는 그런 사위가 아니란 이유에서다. 다시 말해 돈 한 푼 안들이고 판검사 사위 얻은 게 좋은 것이란 말이다.

여동생인 정서는 우연하게도 원수 집 아들을 사랑하게 되어 헤어짐과 만남을 거듭하다가, 아버지한테 반항한답시고 술과 여자로 자신을 학대하는 남자의 꼴을 보며 과감히 동거를 감행했다. 시아버지의 정신병적 박해는 극에선 등장도 안 하는 시아주버님들의 패가망신에 힘입어 호의로 돌아선 상태다. 이것도 역시 자기가 골라준 며느리들은 죄다 패가망신했다고 이혼하는데 정서는 돈 한 푼 없는 지 아들을 변치 않고 사랑해 줘서 그렇단다.

돈, 돈, 그놈의 돈이 사람 가치를 판단하는 유일한 기준이 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능력이란 것도 '환전 가능성'이란 측면에서 판단된다.
  
사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특히나 한국과 같은 천민적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한 집 자식들은 거의 다 속 편한 사랑을 하기 힘들다. 바로 저녁 나절 MBC "그 여자의 집"만 해도 돈 없고 빽 없는 남자가 여자네 부모로부터 구박을 당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 남자는 난데없이 갑부 할아버지가 나타나서 상황이 역전되었지만, 어쨌든 온갖 구박을 당하고 여자랑 헤어진 상태이다. 그만큼 가난한 집 자식이 사랑은 기구할 수밖에 없다는 '신화'는 한국에선 일반적(아니, 엄밀하게 말하면 주부 계층에게는 일반적으로 인식되는)이다.

하지만, 이렇게 다양한 사례가 모조리 겹칠 수 있다니. '로미오와 줄리엣' 서사를 이상하게 재해석한 전근대적 이야기와, 고시생과 부잣집 순정녀의 신파적 사랑 이야기, 과부와 총각의 사랑에 영화 '미저리'와 비견될 병적인 집착이 덧붙여진 이야기가 한 집안에서 일어난다.

게다가 정인을 사랑하는 찬영은 부모의 반대를 뚫고 결혼한 아버지의 비극적 죽음과 어머니의 배신에 의해 어릴 적 큰 상처를 받아 사랑을 믿지 못하는 남자였는데 알고 보니 그의 엄마는 정서의 남자친구처럼 자신이 상대를 사랑하는 한 자기 부모(혹은 시부모)에 의해 사랑하는 상대가 괴로움을 당할 것이라는 전제 아래 자신을 학대하는 여자였다. 이 모든 기구한 얘기가 한 집안에서 일어날 확률은?  아무리 확률이 진리가 아니라고 해도 이건 좀 심하지 않은가.

정신병적 캐릭터와 그의 지지자들

특히 이 드라마에서 문제인 것은 주인공 정인을 학대하는 현수라는 여성 캐릭터다. 마치 완벽한 팥쥐를 연상케 하는 그녀는, 있는 집 자식이고, 충분한 교육을 받은 진취적인 현대 여성이다. 외모도 뛰어나서 남자들이 줄줄 따르는 자타가 공인하는 세칭 퀸카이다. 그런데 그녀가 찬영에게 보이는 집착은 그야말로 병적이다. 사랑을 구걸하다 못해 어른들 사이의 친분과 구시대적 정혼 모티브까지 등에 업고, 그녀는 온갖 사랑을 얻기 위해 온갖 폭력을 자행한다.

그녀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서 정인을 공금횡령자로, 소매치기로 몰아 부치고, 사람을 사주해서 갖가지 학대를 일삼는다. 심지어 범죄자를 매수, 한 아이의 어머니인 정인에게 간통죄까지 뒤집어 씌워서 유치장에 집어넣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그 모든 일이 누명이었음이 밝혀진 상황에서도 자기가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다며 오히려 자신을 이렇게 만든 정인과 찬영이 문제라면서 악을 쓴다.

자기가 죽기 전에는 결코 찬영을 포기할 수 없다며 오늘도 정인에게 전의를 불태우고 있는 현수란 캐릭터의 행동 양상은 편집증까지는 아니라 해도 최소한 편집증적 인격 장애 정도의 진단은 가능할 것이다.
  
"이별 없는 아침"의 현수같이 편집성 인격장애가 의심스러운 사람들은 극도로 날카롭고 격렬하며, 타인을 정직하지 못하고 속임수로 가득 차 있어 늘 자신을 파멸시키려 하는 존재라고 규정한다. 남들이 자신을 괴롭히거나 자기로부터 무엇인가 빼앗으려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정당한 이유 없이 사람을 의심하는 경우가 다반사이고 질투도 심하다.

항상 긴장돼 있고 냉담하거나 무정한 면도 있고, 자만심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고 유머 감각이 결여되어 있다. 피해망상 증상마저 보일 때가 있을 만큼 극도의 의심과 경계심, 불신감, 조심스러움, 적대감 같은 정서적 반응을 보인다. 찰스 디킨슨의 유명한 소설 '크리스마스 캐롤'에 나오는 스크루지 영감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드라마엔 더 웃기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현수의 아버지를 빼놓고 모든 현수 주변의 어른들이 그녀의 편을 든다는 사실이다. 현수는 편집성 인격 장애라고 규정하더라도 이런 사람들의 모습은 무엇으로 설명해야 하나. 찬영의 조부는 심지어 자기 손자에게 물려 줄 유산을 피 한 방울 안 섞인 현수와 공동 명의로 설정하기까지 하면서 범법자인 그녀를 밀어준다. 아무리 아들(찬영의 부친)이 고집한 결혼과 그 결과에 대해 피해의식을 갖고 있다 해도 그가 보이는 행동은 합리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을 쉽게 납득시키기 힘들다.

더군다나 현수의 어머니를 보라. 자기 딸이 차로 사람을 들이받고 뺑소니를 쳤는데도 시간이 지나면 모두들 잊을 거라고 조용히 기다리라고 한다. 이런 파렴치한 인간들이 있나? 그럼 현수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모두 인격장애자들인가? 물론 현대인의 10~20%가 한 가지 이상의 인격 장애 진단기준에 맞는다는 추정 보고가 있다고 해도, 한 드라마에 너무 많은 인격장애자들이 등장하는 것은 아닌가?  

게다가 현수가 아무리 학대를 해도 그저 견뎌내는 정인은 정상적이라고 보는가?  무고하게 유치장 신세까지 졌는데 뺨 한 대 때리고는 그만이다. 최소한 '착한 여자'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환자는 아닌가? 극에서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혹시 원수를 사랑하는 기독교인이어서 그런 것은 아닌가?

가족주의의 비극과 미국의 보복 전쟁

우리 사회의 비극은 이런 비합리적인 상황이 언제든 용인될 수 있는 사회심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데 있다. 쉽게 말해 현수와 같은 행동을 해도 많은 사람들이 '이해한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현수는 줄기차게 주장한다. 정인과의 결혼은 불행해 질 것이기 때문에 찬영을 위해서 자기가 그런 모진 짓을 하고 있다고. 왜 정인과 결혼을 하면 불행해 지는가? 정인이 애 딸린 과부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그 이유 하나가 씻을 수 없는 죄가 되는 것이다.애 딸린 과부와 전도 양양한 총각 의사가 결혼하면 누가 손해인가? 한국 사회의 성인 10중 8, 9는 아마도 이런 상황에 놓인 찬영에게 현실과 이상의 차이를 들먹이며, 결혼과 사랑의 불일치를 얘기하며, 충고하려 들 것이다.

아니, 현수나 찬영의 조부처럼, 과부가 순진한 총각 의사를 꼬셔냈다 생각하고, 순진한 총각 의사의 앞길을 위해서 둘의 결혼을 반대하고 정혼자인 현수와의 결혼을 강요할지도 모른다. 또, 현수의 어머니가 현수의 뺑소니를 숨겨주는 경우를 보자. 역시 한국 사회 성인 중 10중 8, 9는 자기 자식이 뺑소니 사고를 냈다고 한다면 그의 죄를 숨기거나 경감하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다할 것이다.

우린 이런 일에 정말 익숙하지 않은가? 자기 자식 사업에 헌금을 쏟아 부어 주고도 인지상정이라고 태연한 척 하는 사람이 한국에서 제일 큰 교회의 목사 아닌가?
  
이렇게 편집증적 인격 장애자의 주장에 슬그머니 손을 들어주고 정상적인 찬영과 정인의 사랑은 색안경을 쓰고 보게 하다가 심지어 갈라놓기까지 하는 이 이데올로기를 많은 사회학자들은 '가족주의', 혹은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라고 부른다. 한국의 아침 드라마, 아니 한국대중매체와 의식 체계 전반을 지배하는 절대 진리가 바로 이것이다.

'가족'은 무조건 선이며 모든 가치판단의 중심에 '가족'이 놓여있다. '가족'을 위해서 자신의 욕구를 희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때문에 '가족'에게 도움을 받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이러다 보면 우선 남의 가족과 내 가족 사이에 허물 수 없는 벽이 생기고, 그 벽을 뒷받침해 줄 갖가지 기준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 기준은 나와 남을 구분하는 동시에 남을 정죄하는 기준이 된다. 남은 그 기준에 동의한 적이 없다고 해도, 자기가 세운 기준은 그 다음 순간 진리(혹은 정의)가 된다. 비로소 혈연이 생기고, 지연이 생기고, 학연이 생긴다. 이런 연줄은 세습이라는 전근대적인 방식의 역사 만들기를 추구한다.

기업도 세습하고, 학교도 세습하고, 교회도 세습하고, 심지어 북한에서처럼 나라까지 세습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긴다. 세습이 온전하려면 씨가 보존되어야 한다. 가족 내에선 그래서 여자의 순결이 강조된다. 조직 내에선 그래서 의리와 상명하복이 강조된다.
  
이런 자타의 구분과 그에 따른 율법주의적 적용은 결국 무한경쟁과 수탈, 폭력과 전쟁을 낳게 된다. 유대인들이 가는 곳마다 대적 전선이 형성되고 피바람이 불어 온 이유는 다른 누구의 잘못 때문이 아니었다. 극단적으로 분리를 추구한 유대인 자신의 잘못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구약 성경의 부족신관을 양식사적 비평이나 고증적 접근 방식조차 없이 무식하게 축자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유대인들의 분리주의를 마치 영적 전쟁으로, 순결을 위한 노력으로 착각하고 있지만, 시오니즘의 근거가 되고 있는 모세 오경이나 에스라, 느헤미야 서를 착각과 오해를 걷어내고 꼼꼼히 뜯어보면, 오히려 동족끼리도 치고 박고 싸울 수밖에 없게끔 만드는 분리주의적 사고를 극복하기 위해서 선지자들이 얼마만큼이나 노력했는지, 스스로 얼마나 긍휼한 마음을 품고 인내하면서 화해를 추구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성경을 편협한 시각에서 읽고 있거나, 수박 겉핥기 식으로 공부했거나, 자신의 이익에 맞추려 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부족신관이나 율법주의적 신관에 머물러 타인과 타 민족과 타 종교인들을 정죄하고 있거나,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이 마치 다른 존재인 것처럼 떼어놓고서 각자의 입맛에 맞추려고 하지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법을 없애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고 하신 말씀의 뜻을 아는 사람들은 결코 이 같은 오류에 빠지지 않는다.

가족주의에서 출발한 분리주의의 거부, 이것이야말로 예수님께서 공생애 3년 동안 피 토하며 외치셨던 말씀의 핵심이고, 물과 피를 쏟으시며 죽음에 이르기까지 외치고 선언하셨던 내용의 알맹이다. 제자들 앞에서 사랑하는 어머니를 외면하면서까지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인가!"를 외치시던 그 분의 피눈물나는 선언을 왜 한국 기독교인들은 무시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라는 말씀은 바로 가족주의의 벽을 넘어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이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역설같이 여겨지는 극단적 선언의 다른 모습인 것이다.  
  
'가족주의'가 야기하는 가장 심각하고 커다란 문제는 온갖 사회악이 비정상 가족, 흔히들 말하는 결손 가정에서 기인하는 것처럼 몰아 부친다는 사실이다. 이 논리에 의하면 비정상 가족은 결핍되어 있는 요소 때문에 결단코 정상적 인간을 배출해 낼 수 없다. 또 그런 정상적이지 못한 인간은 사회에 적응하는 능력이 떨어지기 마련이므로 필히 사회악을 야기할 수밖에 없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속담은 이 형편없는 논리의 든든한 지지자이다. 만일 비정상 가족에게서도 정상적인 인간이 배출되었다면, 그것은 다음 세 가지 경우 중 하나다.

첫째 주위의 정상가족이나 그 출신자의 도움이 있었거나, 둘째 신앙의 경험이나 커다란 실패의 경험으로 거듭났거나, 셋째 기적이 일어났거나. 도대체 초등학생도 코웃음을 칠 이런 허점 투성이 논리가 마치 합리적인 것처럼 여겨지고 실제로 이 논리의 맹신자들이 그렇게도 많이 살아 숨쉬는 이유는 무엇일까?

당연히 세뇌 때문이다. 온갖 보수언론과 보수적 관점의 출판물들에 의해, 학교나 가정, 혹은 지역, 또래 공동체에서의 잘못된 교육에 의해, 특히 군대라고 하는 폭력적 남성주의자 양성기관에 의해 세뇌는 조직적이고 집요하며 때로는 폭력적으로 행해진다. 이런 이유로 고착된 잘못된 고정관념, 즉 비정상(결손) 가족의 원죄설이 바로 정인이를 쉽게 범죄자로 오인하게 하는 배경이다. 그녀는 애 딸린 과부, 결손 가정의 주 구성원이 아닌가?
  
그런데 웃기는 일은 한국에서 쉽게 인정되는 정상가족의 범위가 너무나 좁다는 것이다. (대개 문화적 뿌리가 없거나 심하게 훼손된 천박한 사회일수록 이 범위가 협소하다) '중산층 교양 있는 부부를 중심으로 구성된 한민족 3대'가 한국에서 규정하는 정상 가족이다. 편부나 편모도 안 되고 애가 없어도 안 된다. 미혼모는 생각할 수조차 없고. 너무 돈이 많거나 너무 가난해도, 너무 못 배웠거나 너무 많이 배웠어도 정상가족에 포함될 수 없다.

무시무시한 일이다. 누구나 적이 될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은가?  미국 역시 우리 못지 않은 천박한 사회이기 때문에 정상가족의 범위가 좁은 편이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보다 더 좁다. 미국의 정상가족 조건엔 '한민족' 대신 '백인 - 앵글로색슨'이 들어가고 덧붙여 '기독교'가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니 미국에서는 백인인 마크 맥과이어가 홈런 신기록을 세울 때에는 열광하다가 흑인인 배리 본즈가 신기록을 세울 가능성이 보이는 요즘엔 썰렁하다.

흑인일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있는 베이브 루스가 영원히 백인이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고, 행크 아론의 기록이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마틴 루터 킹이 말콤 엑스보다 더 주목받아온 이유가 단지 폭력과 비폭력의 노선 차이였을 뿐인가?

기독교인과 무슬림의 차이는 고려되지 않았던 것일까? 금번의 테러 사건과 뒤따른 미국의 보복 선언을 곰곰히 뜯어보자. 미국은 테러가 일어나자마자 곧바로 아프가니스탄에 은거하고 있는 빈 라덴을 용의자로 지목했다. 빈 라덴은 유색인종에 이슬람 신봉자이다. 아프가니스탄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정권이 들어서 있으니 과히 결손 가정의 집결지라 말할 수 있지 않은가?

이번 테러의 주범이라고 미국이 마구 우기고 있는 빈 라덴이 유색인종에 무슬림이고, 아프가니스탄이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정권이라는 것은 무얼 의미하는가? 이 세상에서 가장 과학적이라는 국가에서 무슨 놈의 수사를 그렇게 주먹구구식의 추정 수사, 표적 수사에만 의존하는가?

헐리우드 영화에서는 퇴역 군인이나 CIA 측근 인사도 엄청난 테러를 저지르던데 그건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일뿐 실제로는 전혀 가능성이 없다는 얘기인가? 미국의 대통령 암살을 기도했던 테러리스트들은 전부 백인 아니었던가? 설사 빈 라덴이 이 사건의 배후 조종자이고, 아프가니스탄이 테러리스트의 훈련지이고 도피처라 치자.

그렇다고 명색이 예수를 좇는 청교도 정신을 건국 이념으로 하는 기독교 국가 미국이 수많은 민간인들을 죽여야 하는 전쟁을 꼭 벌여야 하는 것일까? 혹시 부시를 당선되게 했던, 미국 산업의 25%를 차지하고 있다는 군수업체는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일까? 걸프전 이후 낡아지고만 있는 무기들이 소진된다면 가장 이득을 보는 단체는 어디인가? 혹시 그들이 전쟁을 유발하기 위해 자기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켰을 가능성은 전혀 없는가?

솔직히 미국이란 나라가, 이미 아이젠하워가 경고한 군부와 산업의 블록, 즉 군산복합체(軍産複合體, 혹은 군산공동체)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보수적인 공화당 출신으로 세계 대전을 겪은 노병도 마지막 고별연설에서나마 이의 위험을 지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군산복합체가 속성상 휴머니즘을 외면하고 이기적인 산업 논리를 따를 것이기에, 결국엔 미국의 민주주의 뿐 아니라 전 세계의 안위를 위협할 엄청난 괴물이 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 여기 태생적으로 이기주의자인 군산복합체가 있다. 더구나 그 뒤를 밀어주는 것은 가족주의란 이름의 분리주의다. 여기에 무엇이 남을 수 있겠는가? 악마적인 교만과 폭력, 그리고 탈취뿐이다.

사라진 자아는 어디서 찾을 것인가?

이런 사고방식 속에서 자아(自我)는 사라진다. '나'는 가족의 한 부속일 뿐,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것은 중요하지도 않고, 아예 원하는 것을 알지도 못한다. 진정한 '나(自我)'는 가족 안의 '나'에 속고 산다. 이렇게 자아를 잃어버린 인간은, '이별없는 아침'의 현수처럼, 자신의 행동에 대한 주체적인 책임을 지지 않는다. 아니, 질 수 없다. 진정으로 자신이 원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남의 행동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책임을 강요하고 그것을 거부했을 때엔 사정없이 비난하고 정죄한다. 어쩔 수 없이 방기했을 때에도 마찬가지다. 자기에게는 주체적인 책임이 없고 남의 책임만 분명해 지는 상황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점점 자기 자신이 누구이고 어떤 행동을 하고 있으며, 그 행동의 결과가 어떻게 될 지를 못 찾게 방해한다. 그는 단지 막연히 '죄책감'을 느낄 뿐이다.

그 사회적 장치에 의해 그는 '구조'를 유지하기 위한 행동을 거듭한다. 헌금과 주일 성수로 면죄부를 사는 습관적 교회 생활자가 이와 다르다고 생각하는가? 왜 한국인의 노동시간이 세계 최고 수준인가?  왜 한국 남성의 사망률이 세계 최고인가? 왜 착한 여자 콤플렉스나 수퍼우먼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여성들이 그렇게 많은가? 왜 복지 수준이 세계 70위권임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복지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는 정부가 아직도 존속되고 있는가? 미국도 마찬가지이다. 할렘과 이 모든 현상들이 다 떨어져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가?
  
'가족'은 소중하다. 그러나 '가족주의'는 자아를 죽이고 사회를 병들게 한다. 정인의 콤플렉스나 현수의 편집증적 인격 장애는 모두 '가족주의'의 부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잠깐만!  그러고 보니 이 형편없이 망가진 드라마는 한국 사회의 단면을 잘 보여주는 드라마가 아닌가? 심지어 미국 테러 사건의 본질까지... 드라마를 빨리 막 내리라고 해야 하나 잘 만들었다고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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