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같이 시간을 보내는 친구가 있는데, 자꾸 이 영화를 보고 싶다고 하더니 결국 어디선가 시디를 구해가지고 왔다. 대학원 교환학생으로 시카고에 한 학기 다녀온지 한 두달 됐는데, 휴학해버리더니, 빨리 마치는 게 낫다고 채근하는 나에게 어쩌면 다시 안돌아 갈지도 모른다고 씁슬하게 웃던 녀석이었다. 같이 도서관에서 공부하면서, 확실히 목표가 없으니 솔직히 손에 잘 잡히지도 않는다면서, 주로 성경책을 읽거나 어떤 목사님의 설교집을 읽다가 졸기도 하고... 그랬다.

경영학을 전공하던 그 친구가 시카고에서 분명히 확인한 건 '아, 나에게 이건 아니구나'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나이 서른이 다 되어서 하게 되는 고민은 우리가 처음 만난 그 새내기 시절의 풋스럽지만 가벼운 그런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는 사람이나 지켜보는 사람이나.

왜, 자꾸 이 영화를 보고 싶어했을까. 오늘 먼저 영화를 본 녀석이 나에게도 시디를 빌려줬다. 영국영화 냄새가 물씬나는 건 그 투박한 발음들 뿐만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앗들의 생활이 거리껴질 정도로 진솔하게 배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더함지역의 탄광촌, 부재하는 어머니, 정신도 가끔 오락가락 하는 할머니, 파업 중인 - 런던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 아버지와 형, 일상의 아픔들이 주위를 감도는 그의 이웃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춤을 추고 싶어하는 엘리엇! 아마, 녀석은 그 춤에 대한 소문 때문에 이 영화를 보고 싶어했었던 듯 짐작된다. 어딘가에는 존재할 진 몰라도, 그 부근에서 발레하는 남자라곤 눈씻고 찾아볼 수 없는 곳에서, 엘리엇을 분출시키고 내몰았던 그 내면의 힘같을 것을 찾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엘리엇은 영화 속에서, 다름의 가능성 즉, 변화이고, 희망의 증거 즉, 미래로 등장한다. 그 봉우리는 아슬아슬함 속에서 움을 터가고, 그 과정을 지켜보는 나역시 가슴 뿌듯한 환호성을 터트리고, 그를 둘러싼 투박한 성원과 사랑들에 가슴 졸인다.

오늘 내 친구는 이제 같이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것도 오래지 않을 수 있다고 했다. 취직하려고 한다고. 우리는 나름대로 '취직한다'는 것의 의미를 알고 있다. 그것은 세계와 그 일상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기로 했다는 것이다. 미래에 대해서 꿈에 대해서도 이미 쉽사리 자신할 수 없다는 것은 아는 나이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그의 미래를 향한 꿈을 향한 새로운 발걸음, 그 선택임을 믿는다.

저녁, 어스름녘에 일찍 도서관을 빠져나와 함께 교회로 향했다. 그리고 기도제목도 나누고 각자 떨어져서 기도했다. 어둠이 짙게 내려앉아 있는 교회를 나오면서, 불확실한 변화의 시기를 함께 걸어갈 수 있고, 함께 기도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참 복되다고 느꼈다.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