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월 대통령 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교회의 바람직한 정치 참여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이만열 교수(숙명여대 명예교수, 전 국사편찬위원장)을 만나 그 얘기를 들어 보았다. ⓒ복음과상황 신철민

한국교회가 사회와 역사 앞에서 가야 할 길은 어떤 것인가. 12월 대통령 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교회의 바람직한 정치 참여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노무현 대통령이 육로로 분단의 경계를 넘어간 날, 이만열 교수(숙명여대 명예교수, 전 국사편찬위원장)를 만나서 '한국교회의 현실과 정치적 참여의 길'에 관해서 들었다. 대담은 김형원 목사(복음과상황 편집위원장, 하.나.의.교회)가 진행했다.

남북정상회담 첫 날이다. 이에 대해 먼저 말씀해 주시면 좋겠다.

대통령께서 군사분계선을 넘으면서 “제가 다녀오면 더 많은 사람들이 다녀오게 될 것이다”라고 한 말씀이 인상적이었다. 중국 등을 통하지 않고 이 길로 가는 것. 이게 통일의 지름길이 아니겠는가. 육로로 간 것은 통일문제에 바람직하게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언론에서는 ‘그 길이 해방 후 많은 사람들이 내려왔던 길이고 김구 선생이 남북협상을 위해 올라간 길이며 6·25때는 남침한 길이고 또 북진한 길이다. 대통령이 평화 문제로 그 길로 간 것은 획기적인 의미를 부여할 만하다’고 했다.

이번 진행과정을 보며 남북관계에서 우리 사회가 많이 투명해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예전 같으면 교섭의 전 과정이 투명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는데 이번에 보여준 투명성이라는 것은 남북관계에서 개재할 수도 있는 장애물을 한 단계 넘어서는 이정표를 마련했다고 본다. 

2000년 6·15 공동선언은 지금에서 보면 그야말로 큰 틀의 선언이었지, 남북관계를 진전시키는 실질적이고 미시적인 내용은 아니었다. 남북 정상이 처음 만나 그런 구체적인 내용을 담을 만한 분위기도 아니었을 것으로 본다. 그때 아쉬웠던 내용을 이번에는 출발부터 정리하고 격상시켜 가며 진행했고 앞으로 남북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관한 실질적 목표까지 제시하려고 하는걸 보니 (그대로 될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히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보고 있다. 과거에는 정상회담이어서 그런지 총론적인 접근을 했는데, 이번엔 정상회담에서도 각론적인 접근을 하려는 시도가 있지 않나 하는 느낌도 받았다.

▲ 대담을 진행한 김형원 목사(본지 편집위원장, 하.나.의.교회)가 장로 대통령 얘기를 꺼냈다. 이만열 교수는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그를 지지하거나 그의 과거 행적이나 능력을 고려하지 않고 어느 교회, 어느 교파 교인이기 때문에 지지한다는 것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고 말했다. ⓒ복음과상황 신철민
지난 1988년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쪽에서 통일운동에 많이 기여했고 선구적 역할을 했다. 한국 기독교가 다시 그런 역할을 다시 할 수 있을까.

88년 당시 기독교의 통일운동 참여는 접근방식에서 획기적 변화를 일으켰다. 이전까지는 모든 통일 문제나 남북문제는 남북 모두 정부 당국의 배타적 전유물이라고 여겼다. 민간이 이 문제에 접근할 수 있는 통로를 차단시켰다. 80년대에 들어서서 본격화된 기독교의 통일운동은 그 전까지의 남북 당국만이 배타적으로 가지고 있던 통일 문제를 민간 차원에서 논의하는 것도 가능케 했다. 이 점은 통일운동 사상 획기적인 변화다. 이 점을 우선 들 수 있다.

당시까지의 당국의 통일 논의는 정권강화를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었던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가령 1972년 7·4공동성명만 하더라도 상당히 오래된 얘기이지만 비밀리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남북이 정권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지 않겠느냐는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해 남에서는 ‘10월 유신’을 단행했고 북은 이듬해 73년 1월 초 사회주의 헌법을 발표했다. 김일성 주석을 초국가적 존재, 전제군주 이상으로 만든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80년까지 한국교회는 통일문제에 신경을 많이 안 썼다. 주로 인권과 민주화 문제에 애를 썼다. 그런데 인권과 민주화 문제에 애를 쓰면 쓸수록 군사정권은 안보 논리로써 이를 억압했다. 아무리 인권, 민주주의가 중요해도 북쪽의 공산주의자들이 호시탐탐노리고 있는 상황에서 완전한 인권, 민주화는 불가능하다고 눌렀다. 결국 한국교회가 깨닫기 시작한 것은 인권과 민주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안보 논리와 그 틀을 깨야 하는 것이었고 안보논리의 배경이 되고 있는 분단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분단을 극복한다는 것이 곧 통일이다. 여기서 인권과 민주화를 위해서도 분단극복 곧 통일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현실성을 가지고 실천될 수 있었던 것이다.

먼저 KNCC에서는 독일기독교교회협의회(EKD)와 미국 NCC의 도움도 받아서 KNCC 내 통일위원회를 만들기로 했다. 그런데 이 조차도 안기부에서 몇 번 무산시켰다. 그거 만드는데 3~4년 이상 걸려 결국 80년대 중반에 정부 당국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통일위원회’를 두게 되었다. 남북 정부 당국의 배타적 전유물이라고 여겼던 남북문제를 기독교가 민간의 선으로 끌어내린 것이다. 기독교계에서 통일운동 기구를 만들고 통일의 문제를 우리 모근 국민의 문제로 확산시키는 것을 계기로 민간에서도 통일 관련 NGO들이 생겨났다. 특히 87년 민주화운동 이후에는 민주화의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통일운동을 위한 NGO가 생겨났다.

한국교회가 통일 문제에 특별하게 기여한 게 없다고 하지만 정부만 할 수 있다는 것을 민간 차원으로 끌어내리고 확산시킨 것, 나는 그게 가장 큰 공헌이라고 생각한다. 88년 2월 KNCC는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88통일선언)’을 한다. 통일과 관련하여 남북의 정권차원에서 많은 문건을 발표했지만, 내가 살핀 문건 중에서는 KNCC통일선언만큼 차원 높은 것은 없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도 그것 때문에 7․7선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KNCC통일선언은 그 뒤 90년대 초 남북고위급 회담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가령 한반도의 비핵화와 군비축소 등이 회담에서 논의된 것은 KNCC 통일선언의 주장을 수용한 것이다.  

▲ 이만열 교수는 우리사회 반기독교정서가 축적된 원인은 이원론적인 신앙 행태와 잘못된 복 개념 때문이라고 했다. "이원론적인 신앙 행태는 성과 속,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나누고 성실도와 긴장도를 달리하는 이중적 삶의 구조다. 또한, 잘못된 복 개념이 한국교회를 망쳐놓고 있다." ⓒ복음과상황 신철민
최근 남북정상회담에 대해 목회자 70인이 반대한다는 선언을 했다. 기독교 안에 통일을 반대하는 목소리는 항상 있었지만 지금은 더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 기독교사를 보면, 기독교가 반평화적, 반통일적인 색깔을 낸 적이 적지 않다. 예를 들어 6·25 이후 51년부터 휴전 얘기가 나왔는데 이에 가장 반대한 집단 중 하나가 기독교였다. 서울, 부산 공설운동장에 모이고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33대)과 아이젠하워 대통령(34대), 유엔 사무총장 등에게 휴전을 반대한다는 선언서를 보냈다. 그런 행동에 대해서 이해는 한다. 북한에서 핍박을 가장 심하게 받은 것이 기독교인들이고, 전쟁 후에도 가장 큰 피해를 받은 기관이 기독교이기 때문이다. 휴전 반대를 긍정적 측면에서는 통일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를 뒤집어 보면 결국 계속 싸우자는 것이고 북진통일의 논리로 통하는 것이었다. 그 정서가 한국교회의 보수적 입장과 연결되면서 지금까지 왔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후 2003,4년 때 그 실체가 조금씩 드러나면서 김대중 정권을 좌파 정권이라고 비판하기 시작했다. 광화문에서 촛불 집회 등으로 때로는 미국에 대한 저항으로 효순, 미선에 대한 책임을 묻는 집회가 열리자, 서울 시청 앞에서는 반핵 반김 집회가 열렸는데, 여기에는 보수적인 한국의 대형교회가 앞장서서 주도적 역할을 했다.

한국교회 일부에서는 이 정권이 좌파라고 규정하고 그들이 하는 모든 걸 반대한다거나, 김대중 정권 때 북한에 상당히 많이 퍼주었기 때문에 김정일 정권이 회생해 이를 밑천으로 핵무기까지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번 정상회담도 같은 논리로 해석될 여지가 있지 않겠나. 그러니 정상회담 자체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기독교가 이룩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용서와 평화다. 평화를 위해 어떻게 하는 게 좋은가를 얘기해야 한다. 그들의 이야기가 모두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지엽적 문제를 가지고 얘기해서는 안 된다. 거시적 관점에서 우리 민족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 어떤 것인지, 그것을 담론으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 그런 거시적인 방향성의 문제를 민족에게 제시할 수 있어야 앞으로 교회가 한국사회 속에서 존립할 수 있는 근거를 튼튼히 마련해 갈 것이다.

북한을 도와준 게 핵을 만들고 정권 유지에 사용되지 않았다고 보는 것도 나이브한 생각일 것이다. 그러나 민간단체에서 도와준 여러 가지 지원은 굶고 있는 북측 동포에게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이제 그들이 남쪽에서 많이 도와준다는 걸 알게 되었다는 것은 마음 문을 열게 했고, 이것은 용서와 화해 및 평화를 논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갔다고 본다. 

반미, 친북 등의 용어가 통일운동에 대한 반감으로 나온 것 같다. 국사편찬위원장 하시면서 참여 정부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는데 지금 정부를 반미, 친북, 좌파 정권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에 대해 어떻게 보시는가. 

국사편찬위원회 업무는 역사 자료를 수집하고 편찬하는 업무다. 국무회의에라도 참석하여 기록이라도 남기면 모를까, 정부의 핵심적인 방향에 관여할 정도의 기관은 아니다. 단지 역사 공부하는 학도의 입장에서 얘길한다면 참여정부는 많은 비판과 비난에도 불구하고 이룩해 놓은 업적 또한 적지 않다고 본다. 그런데 전혀 평가를 못 받고 있다. 평가를 못 받는 이유 중 하나는 언론과 각을 세운 것도 지적할 수 있다.

참여정부가 이룩한 업적 가운데 하나는 민주주의 발전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권위‘주의’를 없앴다는 것이다. 지위가 높다고 해서 거들먹거리며 권위주의를 내세웠던 시대는 지났다. 대통령은 또한 예전 같으면 수족처럼 권한을 행사하던 국정원, 검찰권, 경찰권, 조세권 등을 통한 권한 행사도 억제하고 이런 기관을 정권으로부터 독립시켰다. 비판자들은 이 정권이 권위주의를 없앤다면서 권위도 없애버렸다고 말한다. 일리가 있다. 그러나 이는 권위주의를 없애는 과정에서 생기는 어쩔 수 없는 일시적 현상이라고 본다. 

둘째, 투명성의 문제다. 투명성을 글로벌 스탠다드(세계적 기준)로 올려놓는 데에 기여했다. 부정과 부패를 제거하고 자신과 주변 세력도 (완벽하지는 않지만) 부패에 물들지 않았으며, 경제와 금융에서 글로벌 스탠다드를 획기적으로 끌어 올린 공헌이 크다고 본다. 이것은 선진국으로 갈 수 있는 굉장한 인프라를 구축한 것이다. 또한 경제는 물론 정치·사회·문화적인 측면에서도 세계와의 소통을 원활히 하고 한국의 국가위상을 업그레이드시키는 데에 결정적인 토대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셋째, 약자에 대한 배려를 많이 하고 있다. 이 방면에 대한 정책개발과 예산지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회적 약자, 특히 저소득층과 노인들, 특수한 질병에 걸려 고통당하는 자들을 배려하는 정책이 국민의정부 이래 이 정권에 와서 현저히 증가하고 있다. 

넷째, 국가의 자주성과 관련된 문제다. 자주의 문제는 결국 미국과의 문제로 불거졌다. 평시작전권을 회수한 김영삼 정권 때 전시작전권 회수를 위한 로드맵을 작성했는데 그 때는 말이 없다가 지금에 와서 전시작전권 환수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다. 국방 장관이나 장성 지낸 사람들이 시위하는 것을 보면서 ‘이 나라의 녹을 먹었던 저 사람들이 도대체 어느 나라 사람이며 어떻게 저렇게 행동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참여정부가 제대로 국민을 설득하지 못한 면도 있어서 때로는 포용, 설득해야 할 부분이 있지만 큰 틀에서 국가가 지향해야 할 점은 자주와 독립이다. 이런 목표 자체가 잘못됐다고 하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 예전 같으면 6자회담 같은 국제회의에서 미국의 그늘에서 아무 말도 못했을 텐데 지금은 일정한 역할을 하면서 미국과 북측에 대해 거중조정역을 수행하고 있다. 이것은 그 동안 참여정부가 국가의 위상을 높인 결과로 본다.  

다섯째, 시민사회의 성장이다. 이는 권위주의 청산과도 관련된다. 예전에는 정부가 결심하면 그대로 밀고 나갔지만 이제는 시민사회의 협조를 구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됐다. 그만큼 시민사회 역량을 키워놓은 것이다. 각종 위원회를 만들 때도 반드시 시민단체 대표가 들어가게 한다. 이런 것은 일본이나 동남아에서는 볼 수 없는 것으로,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시민사회의 성장과 발전은 독재체제의 출현을 방지하는 굳센 발판이다. 

이런 기여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가에 대해서는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문제니까…

차기 정부가 감당해야 할 역사적 과제나 책무가 있을 것이다. 대통령 선거가 역사적인 원대한 계획이나 정책, 비전 보다는 인물 중심으로 흐른다거나 눈앞의 이익에만 치중하는 감이 있다. 참여 정부 이후 정권이 누가 되든지 역사적 차원에서의 과제나 책무가 있다면 무엇일까.

가장 당면한 문제가 경제라고 말하지만 과연 10년 동안 우리 경제가 그렇게 위축되었는지 수치적으로 따져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IMF를 극복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2006년 수출액이 3000억이 넘는다. 2000억 에서 3000억으로 넘어간 기간이 불과 2년만 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욕구에 비해서 체감적인 경기가 안 좋고, IMF 이후 양극화 문제로 인해 중산층이 해체되고 있다. 재화는 일정한데 잘 사는 자들이 부를 많이 갖게 되면서 생기는 문제다. 

한미자유무역협정(한미 FTA)을 비판적으로 보고 있는데 그 비판에 일정하게 동의하면서 나는 한미 FTA과정을 다른 관점에서도 보려고 했다. 100여년의 대외관계사에서 볼 때, 한미 FTA는 우리가 강대국을 상대로 오랜 동안의 끈질긴 회담을 통해 이룩한 최초의 성과에 해당한다고 본다. 나는 협상 과정 자체를 매우 중요한 자산으로 본다. 그리고 한미 FTA를 통해서 앞으로 국제사회에 나아가는 데도 큰 발돋움이 될 것이다. 과거 우리가 경제적 시련을 극복한 경험을 통해서 볼 때 한미 FTA가 반드시 경제적으로 불리할 거라고 보진 않는다.

또 남북문제와 관련해서도 어느 정권이 들어서도 지금 이 정권이 해 놓은 것보다 후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개성공단이나 금강산 관광을 없앨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금강산 관광 시작할 때 반대했다. 자본이 먼저 들어가면 안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지금까지 금강산 갈 기회가 많았지만 그 때 반대한 것 때문에 한 번도 가지 않았다. 말에 책임을 진다는 뜻이 있다. 하여튼 금강산이나 개성공단 등을 다음 정권이 철수할 수 있을까. ‘좌파 정권’이 이뤄놓은 정상회담의 약속을 다음 정권이 안 하겠다고 할 수 있을까. 정비는 하겠지만 후퇴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약자에 대한 배려도 지금보다 덜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회적 추세가 그럴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남북관계나 약자에 대한 배려가 현재의 소위 ‘친북좌파정권’보다 더 한다고 해서 그들을 좌파 정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게 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교육 문제. 이것이 사회 문제 중 가장 크다. 이 문제는 김대중 정권이나 참여 정부가 잘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수십만이 조기교육을 위해 해외에 나가는 교육 풍토가 바람직한 거라고 생각지 않는다. 이는 다음 정권의 큰 숙제이다. 새 정권이 바로잡아 주면 좋겠다. 나도 방안이 없다. 사교육 시장이 너무 넓어졌고 압력이 커졌다. 또 사교육 시장의 일터도 너무 많아졌다. 이 말은 공교육을 위해 사교육을 잡으려 할 때 부담이 굉장히 클 것이라는 것이다. 이를 순화시켜 가면서 정리한다는 게 앞으로의 정권이 힘써야 할 과제이다.

몇 가지 과제를 안고 새 정권이 출범할 텐데 결론적으로 남북관계나 약자에 대한 배려, 권위주의 청산과 투명성 등에서 참여정권이 밀고 나갔던 기저를 후퇴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교육문제를 비롯한 정치 경제 사회 문제 등에서 새로운 변화가 불가피하겠지만. 

올 초부터 장로 대통령 얘기가 나왔다. 지금은 여러 곳에서 견제하면서 수그러든 것 같지만 다수의 보수적 교회에는 아직 그 정서가 남아 있고 그런 식으로 정치에 참여하려고 하고 있다. 기독교가 어떤 방식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게 좋을까.

나는 과거에 정교 분리에 대해 비판을 많이 했다. 당시 보수 교회는 독재 정권으로부터 자기 몸을 보호하는 방편으로 정교 분리를 사용했다. 선지자적, 예언자적 얘길 해야 할 때에 용기 없는 사람이 자기 도피처를 여기에서 구한 것이다. 사실 그때 정교 분리를 주장하면서도 조찬 기도회에는 ‘나 안 불러주나’ 할 정도로 안달해 했다. 정교분리를 떳떳하게 주장하려면 조찬기도회도 안 가야지, 정부에 박수쳐야 할 때는 정교분리란 말을 하지 않고 박수를 치면서, 비판해야 할 때는 정교분리 운운하는 걸 보고 이중적이라고 비판한 것이다.

과거 구약 선지자들의 예를 보자. 예레미야나 미가는 오히려 자기 조국이나 왕실의 이익을 배반하는 듯한 예언도 한다. 예레미야처럼 ‘차라리 적국에 항복해야 한다’라는 이야기까지 할 수 있는 예언자적인 입장을 가져야 하는데 당시 보수 교회는 그걸 못했다. 

사회적 행위가 정치와 관련되지 않는 것이 거의 없다. 그걸 어떻게 하나님이 설정한 방법으로 하느냐가 중요하지 우리가 그걸 회피할 필요는 없다. 강단에서도 정권의 잘못에 대해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구체적인 건 말할 수 없어도 성경의 원리에 따라 얘기해야 교인도 기도 제목을 가질 수 있고 정치에 관여하는 사람도 제대로 일 할 수 있지 않겠나.

종교개혁 맥락에서 보면 칼빈이 가장 좌파적 종교개혁을 했다면 루터는 어중간한 개혁을 했다. 그런 루터도 목회자가 강단에서 정치의 잘못을 지적하지 않는 건 직무 유기라는 식의 얘길 했다. 이는 그 당시의 목회자가 새겨들어야 할 거라고 말했었다.

언론의 자유, 비판의 자유가 주어지자 과잉 비판이 생겼다. 군사정권 때 정권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던 보수교회가 기승을 부렸다. 그때부터 나는 입을 닫았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말하는 사람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언론의 자유가 주어지니까 말하는 게 과연 예언자들이 할 일인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말하기 어려울 때에 외치는 게 예언자다. 누구나 말할 수 있을 때에 목회자가 강단에서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대는 게 그게 과연 좋은 방법일까. 이럴 때는 강단을 이용할 게 아니라 다른 매체를 이용하여 논리적으로 설득해야 할 것이다.  

대선 때마다 기독교인 가운데 장로 대통령이 나와야 한다든가 청와대에서 찬송 소리가 나올 수 있는 대통령을 원하는데 일단 그런 대통령이 유능하게 하나님의 질서를 창출해 낼 수  있다면 좋다고 본다. 처음부터 그걸 거부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반대로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그를 지지하거나 그의 과거 행적이나 능력을 고려하지 않고 어느 교회, 어느 교파 교인이기 때문에 지지한다는 것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정치가 함의하는 가치관이 있다. 무엇보다 정당한 힘이다. 기독교인 정치인이라도 먼저 정의의 힘을 끌어 모을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있는 사람인가 봐야 한다. 참여정부도 힘이 없어서 못한 게 있다. 오죽 답답했으면 대연정을 하겠다는 말까지 했겠나. 그러니 결국 선거에서 후보를 고를 때 ‘정당한 힘을 창출할 능력이 있는가’, ‘하나님이 이끄시는 정의의 힘의 능력이 있나’, ‘화평을 이룩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를 봐야 한다.

▲ "기독교가 이룩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용서와 평화다. 평화를 위해 어떻게 하는 게 좋은가를 얘기해야 한다." ⓒ복음과상황 신철민
한국교회가 과잉 정치화 현상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것 같다. 이는 한국교회가 알게 모르게 힘을 추구하는 것과 맞아 떨어지는 것이다. 이는 비기독교인 눈에도 보인다. 이미 기독교인은 기득권이라고 인식되고 있다. 

최근의 우리 사회에 반기독교 정서가 폭발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기독교계와 기독교인들의 힘 과시다. 아프간 사태는 한 특정교회가 잘못한 게 아니라 지금까지 축적되어 있으면서 발동되지 않은, 기독교에 대한 의혹과 불신, 반기독교적 정서가 이를 계기로 터뜨려진 것일 뿐이다. 기독교는 더 이상 약자나 소수가 아니다. 상암에서도(지난 7월 상암 월드컵경기장에서 '2007한국교회대부흥100주년기념사업위원회'가 100주년기념대회 한 것을 말하는 것임 - 편집자 주) 왜 그렇게 힘을 과시했는지 모르겠다. 한국교회 대부흥운동은 대각성 회개운동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것을 기념하는 대회는 교회의 힘 과시가 아니라 인간적 힘의 포기요 절제여야 했고 그것이 회개운동으로 나타나야 했다. 한국 기독교계에 회개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가. 오죽 했으면 현재 한국 기독교회의 부정과 부패를 두고 고려 말의 불교의 타락을 보는 것 같다는 말을 하게 되었을까. 

둘째, 단군상 문제가 있다. 단군상의 목을 친 것은 접근을 잘못한 것이다. 단군상에는 왜 단군상을 세웠는지에 대한 조성기(造成記)가 있다. 거기에는 사학계에서 인정하지 않는 내용이 있다. 기독교계에서 단군상 문제에 제대로 접근하려면 이를 비판하는 방법으로 접근했어야 한다. 그런데 단군상의 목부터 치니까 지성인들 사이에 반기독교적 정서가 생긴 것이다. 단군문제는 일제하 식민주의사관과도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신중히 접근해야 한다.

그 밖에 기독교의 부정부패 문제와 관련된, 옷 로비 사건, 대형교회 세습 문제 등이 있고, 기독교만 관련된 것은 아니지만 사립학교법 문제와 세금 문제 등도 관련이 있다고 본다. 

우리사회에 반기독교적인 정서가 축적되게 된 데에는 한국교회의 책임이 크다. 근본적인 원인을 찾는다면

이렇게 문제가 축적된 것은 이원론적인 신앙 행태와 잘못된 복 개념 때문이라고 본다. 먼저 이원론적인 신앙 행태는 성과 속,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나누고 성실도와 긴장도를 달리하는 이중적 삶의 구조다. 이런 신앙 행태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한국교회에서 신학을 제대로 수립하고 그것을 평신도들에게도 제대로 가르쳐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둘째, 잘못된 복 개념이 한국교회를 망쳐놓고 있다. 1960년대 삼박자 구원은 요한삼서 2절(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원한다)에 근거해서 예수 믿는 복, 돈 잘 버는 복, 건강한 복을 삼위일체로 강조했다. 예수 믿으면 돈 잘 벌고 건강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 강조하다 보니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신 마태복음의 팔복이나 사도행전에 나오는 ‘주는 것이 받는 것이라는 복’ 얘기는 나오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이런 복들은 한국교회가 받을까봐 두려워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래서는 한국교회를 바로 세울 수가 없다. 예수 믿으면 돈 잘 벌고 건강하게 된다는 것은 유교의 오복(壽 富 康寧 攸好德 考終命)만도 못하다. 입시 때 100일 기도하고, 철야 기도회 하지 않나, 이런 멘탈리티를 가지고 어떻게 한국사회를 개혁시키겠나. 100일 기도가 불교적이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부자가 되는 방법으로 ‘정직해라. 신용 있는 사람이 되라, 부지런해라, 절약하라’고 했다. 그렇게 가르쳐야 하는데 가르치지 않는다. 가령 대학입시와 사법고시 등을 위해서는 먼저 달란트가 전제되어야 하고 그걸 위해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 법도를 주었는데 그걸 강조하지 않는다. 복 개념이 달라지면서 한국교회에 나타난 풍속도가 기독교를 기복종교로 만들어 버렸으니 사회를 개혁하는 힘이 없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10월 말에 종교 개혁 주일을 맞이하는데 한국교회에서 새로운 회개운동이 일어났으면 좋겠다. 1907년 대부흥운동 100주년을 맞으면서, 이를 90년대부터 성장이 둔화되고 있는 한국교회의 반전을 기한 이벤트성 프로그램으로 만드는 건 옳지 않다. 1907의 운동은 대각성회개운동이었는데, 그것을 부흥운동으로 이해하는 것도 문제지만 그 100주년 기념을 다시 부흥운동을 위한 이벤트성 행사로 몰고 가려는 것도 온당하지 않다고 본다. 아프간 사태를 계기로 한국교회를 향한 사회의 반기독교적 정서가 1907년의 100주년의 시기에 표출된 것은 하나님께서 한국교회에 적절한 경고를 주신 거라고 믿고 싶다. 이 경고를 겸손하게 받아들여 새로운 대각성회개운동을 통해 한국교회가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기 위해 노력하고, 용서와 화해, 나눔과 섬김, 예언자적 제사장적 사명을 다하게 되기를 기원해 본다. 


진행 김형원 목사 (본지 편집위원장, 하.나.의.교회) jshalom@naver.com
정리 이종연 기자 limpid@newsnjoy.or.kr
사진 신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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