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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라이팅
성별화된 세뇌(1)
  • 조은채 (newsnjoy@newsnjoy.or.kr)
  • 승인 2017.08.20 13:49

잉그리드 버그만 주연의 영화 '가스등'(Gaslight)(1944)은 <가스등 이펙트>의 저자 로빈 스턴(Robin Stern)에 의해 '가스라이팅'(Gaslighting)이라고 명명된 정서적 학대의 양상을 면면이 보여 준다. 스턴에 따르면, 가스라이팅은 "상대방을 조종하려는 가해자"(gaslighter)와 "상대방이 자신의 현실감을 좌우하도록 허용하는 피해자"(gaslightee) 사이에서 발생한다. 가해자의 반복된 상황 조작과 거짓말에 노출된 피해자는 자기 자신의 현실감각, 판단력, 기억력에 의심을 품게 된다. 피해자가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약해질수록 가해자의 영향력은 강화되며, 종국에 피해자는 가해자에게 자기 자신에 대한 지배권까지 내어 주게 된다. '가스등'의 주인공인 폴라(잉그리드 버그만)가 남편에게 결혼 생활 내내 당하는 것이 바로 이 가스라이팅이다.

유명한 오페라 가수였던 이모가 살해된 후 모든 유산을 상속받은 폴라(잉그리드 버그만)에게 어느 날 그레고리라는 남자가 접근한다. 그레고리를 잘 모르면서도 깊이 사랑하게 된 폴라는 그의 청혼을 받아들이고, 물려받은 런던의 이모 집에서 결혼 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나 그들의 결혼 생활은 시작부터 삐걱거린다. 그레고리가 폴라를 정신병자로 몰아가기 때문이다. 그레고리는 폴라가 자신의 말과 행동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며, 존재하지 않는 것을 보고 듣는다고 주장한다. 폴라가 병에 걸려 건강하지 못한 데다가 거의 매번 소지품을 잃어버린다는 이유로 외출을 금지하기도 한다. 폴라가 만날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남편인 그레고리와 그가 고용한 하녀 두 명뿐인데, 그 두 명 역시 폴라에게는 적절한 대화 상대가 될 수 없다. 한 명은 귀가 잘 들리지 않아서 일상적인 대화조차 어렵고, 다른 한 명은 폴라에게 정신병이 있다는 그레고리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그녀를 환자 취급하기 때문이다. 폴라는 그레고리가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는, 다른 사람과의 소통이 원천적으로 차단된 환경 속에서 그의 걱정을 빙자한 교묘한 거짓말과 속임수에 무방비하게 노출된다.

"당신은 잘 잃어버리잖아."

"제가요. 몰랐는데요."

"건망증에 의심까지 생겨?"

"그럴 리가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정말로?"

"모르겠어요."

"당신이 아프거나 환각을 보면 슬퍼."

"……"

폴라는 그레고리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 어렵지만, 마땅한 증거도 증인도 없다. 처음에는 그의 말에 반문하기도 하고 부정하기도 하지만 점차 폴라는 자신의 판단력을 믿지 못하게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리고 그레고리의 가스라이팅이 점점 그 강도와 빈도가 높아질수록, 폴라는 "갑자기 내 기억력이 의심스러워져요", "나도 모르겠어요"라고 대답하거나 혹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게 된다. 그레고리가 의도했던 것처럼 자신의 판단력과 기억력을 믿을 수 없게 된 폴라는 완전히 무기력한 상태가 된다.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자신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조차 두려워하게 된다. 점차 폴라는 그레고리 없이는 살 수 없는, 그레고리의 기준과 명령이 있어야만 안심하고 행동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그레고리의 "정서적 학대", 즉 가스라이팅이 성공한 것이다.

폴라의 두려움과 자기 자신에 대한 불신이 극대화되는 것은 매일 밤 일어나는, 그녀 혼자만 듣고 보는 어떤 사건 때문이다. 매일 밤 그레고리가 일하기 위해 집 밖으로 나가고 나면, 갑자기 천장에서 정체 모를 발소리가 들려온다. 방 안의 가스등도 돌연 희미해진다. 그러나 폴라 말고는 누구도 목격하지 못한다. 둘 뿐인 하녀 중 하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고, 다른 하나는 늘 외출하기 때문이다. 그레고리는 폴라의 목격담이 완전한 허구, 즉 폴라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상상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그레고리에 의해서 폴라의 경험은 그녀가 정신병을 앓고 있다는 징후이자 증거가 되어 버린다.

영화는 두 시간에 가까운 러닝타임 동안 그레고리가 얼마나 교묘하고 치밀하게 폴라를 조종하고자 하는지 면밀하게 보여 준다. 어렴풋하게 암시만 되었던 그레고리의 동기가 명확하게 밝혀지는 것은 이미 영화가 후반부에 접어들고나서이다. 그레고리가 폴라에게 접근한 것은 폴라의 이모가 생전에 소유했던 "외국 왕실의 보석" 때문이다. 폴라가 매일 밤 들었던 천장 위의 발소리와 희미해지던 가스등의 불빛은 폴라의 망상이 아니었다. 그레고리가 다락방의 불을 환히 밝힌 채로 폴라 이모의 유품을 하나 하나 샅샅이 뒤졌기 때문이다. 그는 속 편히 보석을 차지하기 위해서 방해가 될 뿐인 폴라를 정신병원으로 보낼 계획까지 세워 둔 상태였다. 그가 결혼 생활 동안 폴라에게 저질렀던 수많은 정신적 학대는 그녀를 정신병원에 보내기 위한 과정이었다. 전부터 그들 부부, 정확히 말하면 그레고리를 의심스럽게 보고 있던 런던 경시청 소속의 어떤 경위의 도움과 증언으로 폴라는 그레고리의 모든 비밀을 알게 된다. 경시청에 그레고리를 넘긴 폴라는 자신이 조금도 '미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의 가스라이팅으로부터 벗어난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가스라이팅은 현실에서도 비슷한 양상으로 자행된다. 그레고리가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행사해 스스로 불신하게 만드는 갖가지 방법을 영화 내내 직접 시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레고리에게 "외국 왕실의 보석"을 훔치겠다는 비교적 뚜렷한 목적이 있었던 것과는 달리, 스턴은 "어떠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면서도 가스라이팅을 하는 가해자들도 있다고 말한다. 특별한 이유나 의도 없이도 상대에게 가스라이팅을 하는 이들도 다수 존재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관계에서 이 가스라이팅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위계이다. 스턴이 예시로 드는 상사와 부하 사이의 혹은 부모와 어린 자식 사이의 가스라이팅은 이 위계를 비교적 뚜렷하게 보여 준다. 상사와 부하 사이에 존재하는 직급, 경험, 숙련도 등의 차이와 부모와 어린 자식 사이에 존재하는 연령, 경제력 등의 차이. 이 차이를 기준으로 권력의 위계 구조가 형성되고, 한쪽이 다른 쪽의 영향력 행사에 필연적으로 취약해진다.

스턴은 가스라이팅이 "성별에 관계없이 모든 관계", 즉 연인, 친구, 가족, 상사와 부하, 동료들과의 다양한 관계에서 발생한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미국에서 20년간 심리치료사로 활동한 그의 경험에 따르면 "가해자"는 남성인 경우가 많은 반면 "피해자"는 여성인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형태가 가장 빈번했기 때문인지, 스턴의 저서 <가스등 이펙트>는 "남녀 관계"에서 발생하는 가스라이팅 사례로 빼곡하다. 그리고 대부분의 예시는 여성에게는 피해자, 그리고 남성에게는 가해자라는 역할이 처음부터 성별에 따라 정해져 있었다는 증거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스턴은 왜 대부분의 가스라이팅이 남성에 의해 여성에게 가해지는 형태로 나타나는지에 대해 정면으로 맞부딪칠 생각은 없어 보인다.

대신에 스턴은 가스라이팅을 "신종 전염병"이라고 명명하는 장에서 부분적인 해명을 시도한다. 사회의 변화에 따른 결과인 세 가지 요인이 이 새로운 질병을 창궐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는 "성 역할의 근본적인 변화와 그에 대한 반발", "개인주의 만연과 개인의 고립", "사회의 압력과 세뇌"을 그 원인으로 제시한다. 스턴에 따르면, 1940년대부터 시작된 "성 역할의 변화"는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일종의 "위협"이었다. 이 위협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특정 남성"들은 "강하고 똑똑한 여성"을 "통제"하려고 했고, "특정 여성"들은 "자신의 정체성"까지 남성들에게 "의지"함으로써 "자발적으로" 그들의 통제에 "동조"했다. 스턴은 남성에 의해 여성에게 가해지는 가스라이팅이 사회의 변화에 역행하는 "특정"한 남성과 여성 사이의 합작인 것처럼 진단한다. 이 특정한 남성과 여성을 "새로운 세대"라고 명명하기도 한다. 하지만 "새로운 세대" 내의 "신종 전염병"이라는 말은 가스라이팅을 "특정"한 남성과 "특정"한 여성, 즉 "특정" 집단 내의 문제로 축소해 버린다. 아득히 오래전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여성과 남성 사이의 권력 차이, 그리고 그 차이에서 비롯된 착취와 폭력은 담론의 장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스턴은 여성에게 가해져 왔던 폭력과 착취를 가스라이팅과 연결 짓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그는 젠더의 위계에서 오는 차이가 가스라이팅을 성별화했다는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는 셈이다. 성 역할에 있어서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은 시점에서도 가스라이팅이 드물지 않게 자행되었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있기도 하다. 실제로 '가스등'의 폴라 역시 전통적인 성 역할을 벗어나기 위한 어떠한 행위도 하지 않았으며, 그레고리의 가부장적 남성성에 조금의 위협을 끼치지 않았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고 있던 젠더의 위계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지배 혹은 영향력에 더 취약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그레고리가 폴라에게 거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은 두 사람이 지닌 권력 차이 때문이고, 그 권력의 차이는 결국 그들의 성별에서 기인한다.

가스라이팅이 애초에 성별화-즉 남성에게는 가해로, 그러나 여성에게는 피해로-되었던 것은 유구하게 존재해왔던 여성 혐오(misogyny) 덕분일 것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남성과 여성 사이의 존재해왔던 위계는 한 성별(주로 남성)이 다른 성별(주로 여성)을 멸시하고, 혐오하며, 성애화하고, 이 혐오를 다양한 방식으로 재생산하는 것까지를 가능하게 했다. 여성을 그저 사유재산의 일부로 여기거나, 마녀로 몰아가 불에 태웠던 시대가 존재했던 것처럼, 이 혐오는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는 대단히 자연스러운 현상이기까지 했다. 멸시하고 업신여기는 대상을 내 뜻대로 조종하기 위해 상황을 조작하거나 거짓말을 반복하는 것은 어쩌면 아주 쉬운 일이다. 성별화된 가스라이팅은 '신종' 전염병이 아니다. 한쪽 성별이 다른 성별을 아주 용이하게 통제할 수 있는 무기로써, 젠더의 위계에 의해 생겨난 아주 오래된 발명품이다. 동시에 수많은 형태와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는 여성 혐오의 양상 중 하나이기도 하다. 만약에 이 성별화된 가스라이팅이 전염병이라면, 마을을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가는 것으로는 끝이 나지 않을 것이다. 전염병의 원인이 되는 바이러스는 아직도 철폐되지 않은 젠더의 위계, 그 간격 속에서 아주 오래전부터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혐오라는 이름으로 배양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은 웹진 <제3시대>에도 실렸습니다.
웹진 <제3시대> 바로 가기: http://minjungtheology.tistory.com/

조은채 / 학부에서 예술학을 전공하면서, 조형예술을 기반으로 다양한 문화예술 현상을 감상하고 분석하는 법을 배웠다. 동일 전공으로 석사에 진학하여 공부를 이어가고 있다. 관심 분야는 페미니즘, 그리고 미디어아트를 비롯한 현대미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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