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숨빛찬양예배’는 은명교회가 지향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인 ‘숨빛의 삶’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간절한 바람의 결과이기도 하다.  ⓒ뉴스앤조이 김승범

아주 작은 박새가 비둘기에게 물었습니다.

“눈송이의 무게를 알고 있니?”

비둘기가 대답했습니다.

“눈송이의 무게라고? 눈송이에 무슨 무게가 있겠어. 허공처럼 전혀 무게가 없겠지.”

그렇다면 내 이야기를 들어보라며 박새가 말했습니다.

“언젠가 나는 눈 내리는 전나무 가지 위에 앉아 있었어. 할 일도 없고 해서 나는 막 내리기 시작하는 눈송이 숫자를 세기 시작했지. 가지 위에 쌓이는 눈송이 숫자를 말이야. 눈송이는 정확히 3,741,952개가 내렸어. 그런데 말이야...”

박새의 잔잔한 목소리가 이어졌습니다.

“그 다음 눈송이 하나가 3,741,953번째 눈송이 하나가 가지 위에 내려앉자, 가지는 그만 뚝 부러지고 말았지. 무게가 전혀 없는 허공과 같은 눈송이 하나가 앉았을 때!”

박새의 이야기를 듣고 한참 생각에 잠겼던 비둘기가 나지막이 한마디 했습니다.

“그래 맞아, 단 한 사람의 목소리가 부족한 건지도 몰라, 세상에 평화가 내리는 데는...”

평화의 마을에 내리는 눈송이처럼 마음을 평화롭게 하는 이야기다. 눈송이 하나에 무슨 무게가 있겠는가만, 어느 순간 눈송이 하나가 더 얹히는 순간 가지는 부러진다. 어쩌면 세상의 평화는 우리의 따뜻한 말 한마디, 보이지 않는 손길을 필요로 하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말에 무슨 힘이 있겠느냐고 할지 몰라도, 허공과 같은 눈송이 하나에 가지가 부러지듯 우리의 따뜻한 말 한마디, 자그마한 정성에 비로소 세상에 평화가 임할 수 있음을 믿는 이들이 있다.


숨쉬며, 자라며, 비추며, 밝히며

▲ⓒ뉴스앤조이 김승범
겨울의 걸음이 성큼 바빠진 탓일까. 겨울의 정탐꾼인 듯 알 듯 모를 듯 품속으로 파고드는 찬바람을 안고 들어선 이에게 교회의 앞자락은 따뜻한 글귀로 맞아준다.  

‘은명교회는 숨쉬는 교회입니다, 숨쉰 만큼 자라는 교회입니다, 자란 만큼 비추는 교회입니다, 비춘 만큼 밝히는 교회입니다.’

서울 도봉구 창동, 상가 건물 7층에 자리잡은 은명교회(이민재 목사)가 지향하는 바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숨빛인’이다. 숨빛인이란 숨쉬는 사람이요 비추는 사람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빛을 발하며 살아갑니다. 안색은 얼굴에서 나오는 빛이고, 음색은 목소리에서 나오는 빛입니다. 신색이 몸의 태도나 자세, 자태를 통해 나오는 빛이라면 행색은 행동거지를 통해 나타나는 빛이죠. 그러기에 안색은 밝고 명랑해야 하며, 음색은 부드럽고, 신색에서는 곱고 바른 태가 나고 행색에서는 측은지심이 우러나야 합니다. 저는 이 측은지심을 사랑과 자비, 긍휼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싶고, 숨빛인을 비추는 사람이라고 할 때, 숨빛인이란 사랑의 빛을 사람과의 관계에서 비추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은명교회는 이렇듯 ‘숨은 기도이며 빛은 행동이고, 숨은 예배이며 빛은 삶이고, 숨은 영성이며 빛은 실천이고, 숨은 하나님 사랑이며 빛은 이웃 사랑’임을 작지만 낮게 눈 한 송이처럼 소리 없이 내려앉았다.

그저 함께 살고 싶고, 희미하게나마 당신을 통해 깨달은 참 삶의 길을 알리면서 당신이 만나게 하시는 사람들을 벗삼아 그들에게 잔잔하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을 삶의 감동을 서로 조금씩 나누면서 길을 걸어온 것이다.

은명교회가 그 길의 동반자로 소박하고 단순하게 아름답게 사는 법을 나누는 것이 ‘목요숨빛 찬양예배’이다. ‘목요숨빛 찬양예배’는 은명교회가 지향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인 ‘숨빛의 삶’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간절한 바람의 결과이기도 하다.

▲ⓒ뉴스앤조이 김승범

“주일 공동예배나 주일 성찬예배를 통해서도 ‘숨빛의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늘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그 까닭은 우리 주위에는 즉각적으로 순발력 있게 도와야 할 어려운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에 비해, 교회의 재정 구조는 1년 예산의 범위 내에서 제한적으로만 사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려운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데 제한된 예산 때문에 ‘빛의 삶’을 외면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고민 속에 빛을 비춘 것이 존 웨슬리의 교회갱신운동에 많은 영향을 준 '신도회 운동'이었다.

“이 신도회 규칙 11조에 보면 '신도회 모임이 열릴 때마다 참석자들은 6페니를 헌금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이 헌금으로 신도회는 죄수들의 석방운동을 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집을 방문하여 구제활동을 하고, 일자리를 마련해주고, 그들을 위한 자선학교를 설립해주었습니다.”

이러한 신도회운동에서 ‘숨빛의 삶’의 형태를 본 것이고 예배와 실천, 영성과 삶, 기도와 행동을 일치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본 것이다.


'천원선교헌금' 통해 예배, 삶, 이웃사랑 연결

▲ⓒ뉴스앤조이 김승범

이렇게 목요숨빛찬양예배는 1998년 9월10일 첫 예배를 드렸다. 때때로 오며가며 사랑하기는 쉬워도 언제나 그러하게 사랑함은 어려운 일이건만 지금까지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숨빛찬양예배는 여일하게 찬양과 나눔과 사랑의 거울이 되고 있다. 찬양과 기도와 말씀과 절반의 이야기, 천원선교헌금으로 이어지는 예배는 따뜻하고 훈훈한 마음이 오가 즐겁다. 예배 시간에는 ‘천원선교헌금’이라는 작은 정성을 모아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들에게 위로와 나눔과 섬김의 실천으로 이어진다. 헌금하기 전, 그 주간에 도우려는 ‘이웃’의 이야기를 전하기에 예배에 참석한 이들은 자신들이 누구를 돕는지를 구체적으로 알게 된다.

“천원선교헌금은 시혜적 차원에서 기금을 조성한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배와 삶과 이웃 사랑을 하나로 묶는 일이지요. 강북지역 중에서 특히 도봉구는 장애인과 빈민 등 어렵게 사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동안 이웃들과 만나면서 그분들의 절절하고 때로는 가슴 저미는 사연들이 소개되어 잔잔한 감동을 나누기도 했습니다.”

소년소녀가장, 무의탁 독거노인, 심한 질병을 앓고 있는 이들, 무료급식소, 비전향 장기수 등 우리 사회의 주류에서 밀려난 사람들에게 남다른 애정을 가져왔다. 목요숨빛찬양예배가 알음알음 알려지던 초기, 나이지리아에서 온 한 노동자는 당시 한국 경제가 IMF에 빠져들면서 자신의 생계조차 추스를 수 없는 상황이 되자 고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이 노동자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여비를 요청해 왔고 그 주에 드린 헌금은 한 이방인에게 따뜻한 온기가 되어 전해지기도 했다.

특히 은명교회의 장애인들에 대한 관심은 지속적으로 이어져 왔으며 주나임선교회, 소망장애인교회, 한국장애인 문화예술선교회 등 세 곳은 은명교회와 꾸준히 교류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내가 여기서 복음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만큼 그분들과의 만남이 형성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더불어 살아갈 수 있고 거기서 신앙의 참된 의미와 기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단지 도움의 대상이 아닌 인간적으로 같이 살아가는 동반자가 될 만큼 격의 없이 동화되고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죠.”

처음에는 명분을 가지고 시작했던 일들이 지금은 사람 자체를 좋아하고 친밀할 정도로 가까워진 것이다.

“2년 전 ‘한국장애인 문화예술선교회’ 송년 모임에 초대받아 설교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단지 손님이란 생각이 들었는데 올해는 참 느낌이 달랐습니다. 모든 것이 즐거웠고 기뻤습니다. 장애로 인한 삶의 고통을 신앙으로 극복한 모습들이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사심 없이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그분들과 어린아이의 심정으로 어울리는 복된 경험을 한 것이죠.”


특히 장애인에 대한 봉사 지속적으로 전개

▲ⓒ뉴스앤조이 김승범

그 복된 만남은 지난 12월27일 열린 목요숨빛찬양예배 송년 모임으로 이어졌다. 이 날 숨빛예배는 서로에게 ‘절반의 사람’들이었다. 휠체어에 앉았으나 그 누구보다 평화로운 모습으로 찬양하는 이들, 정상인처럼 자신을 표현하지 못하지만 누구보다 맑은 모습으로 행복하게 노래하는 사람들, 목발 짚고 눈물 훔치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찬양하는 이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다 받아서 기쁨을 누리는 이들, 훈훈한 정이 오고 따뜻한 마음이 가고 서로 아끼고 기대어서 함께 삶을 이루는 이들, 어느 때나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어주는 이들, 피아노와 기타와 갖은 도구로 정성을 다해서 한마음이 되는 자리였다.      

숨빛예배 때마다 부르는 ‘이 세계의 절반은 나’(이 지구상의 절반의 사람/ 내 이름은 바로 그것/ 커다란 창고 가득 찬 곡식 나와는 너무 머네/ 굶주려 우는 아이 위하여 먹을 것 찾아 애를 썼지만 아무도 나를 돌아 안 보네/ 이 세계의 절반은 나...)는 참 상징적이다. 노래를 통해 ‘절반의 사람’들과 보이지 않는 연대를 이루었다고나 할까.

개척한 지 만 5년이 된 은명교회는 나름으로 큰 포부를 갖고 있는데 이름하여 ‘새 언약의 일꾼’을 키우는 일이다. 그 일꾼은 ‘섬기는데 유능한’ 사람을 일컫는다. 남보다 앞서기 위한 유능함이나 다른 사람을 지배하기 위한 유능함이 아니라, 스스로 종이 되고 스스로 낮추는 사람이다.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성전 건물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성전 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건물로서의 교회보다, 보이지 않는 교회를 사람의 내면에 짓는 일이죠.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진정한 교회! 그런 교회를 마음속에 짓고, 새 언약의 일꾼으로 온전히 헌신할 각오와 준비가 된 사람을 많이 양성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키우는 교회가 되기를 바라는 이민재 목사는 온전히 주님께 헌신된 새 언약의 일꾼 한 사람을 양성하는 것이 교회 건물 열을 짓는 것보다 의미 있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이 시대의 문제는 교회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쓰레기를 치우기 위해 빗자루를 든 유능한 새 언약의 일꾼이 없기 때문이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 없이, 진정한 마음의 변화 없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 없이, 인간적 본성의 선함과 착함, 자기 의지의 강인함과 정신력으로 기독교 신앙을 점점 인간의 종교 또는 옛 언약의 종교로 축소시키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자유혼 가진 예수의 자발적 무릎꿇음 배워야
▲ⓒ뉴스앤조이 김승범

이러한 새 언약의 일꾼을 키우는 밑바탕에는 ‘신율적 신앙’이 깔려 있다. 그이는 신앙을 ‘타율적 신앙’ ‘자율적 신앙’ ‘신율적 신앙’으로 구분한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자율적인 분이셨지만 역시 철저하게 자신의 자율을 하나님께 복종시킨 분이셨습니다. ‘이 잔을 나에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여기서 예수님은 스스로 하나님 앞에 무릎꿇는 자율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그이는 예수님의 자율적 신앙은 오늘날 의식 있다고 하는 사람들의 자율적 신앙과 결정적인 차이를 보인다고 지적한다. “예수님의 무릎꿇음은 진정한 자유인, 자유혼을 가진 사람의 자발적인 무릎꿇음이었습니다. 두려움을 피하고, 안정을 얻는 대가로 억지로 복종하는 타율적 신앙의 무릎꿇음도, 권위주의에 길들여진 맹목적인 무릎꿇음도 아니었습니다.”

진정한 자유인이면서도 하나님 앞에 겸허하게 무릎꿇는 예수님의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다. 우리는 이것을 배워나가야 하리라. 대범한 자유인의 풍모와 겸비한 종의 모습을! 이 두 가지 모습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며, 숨빛인이 지향하는 모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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