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님의 비유> / 케네스 E. 베일리 지음 / 오광만 옮김 / 이레서원 펴냄 / 400쪽 / 2만 4,000원

성경 읽기는 언어와 문화와 역사적 사회적 상황이 오늘과는 전혀 다른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시각과 언어와 문화는 오늘을 살고 있다. 더구나 서구 신학의 영향으로 신학의 개념화와 교리화된 지식을 가지고 성경을 보게 되면 당시의 화자가 말한 의도와 청중들이 들었던 의미를 놓치게 될 여지가 있다. 개혁주의라는 것도 성경을 보는 하나의 관점일 뿐이지 유일한 관점은 아니기에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반드시 그때의 자리에서 해석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그때의 문맥에서 성경을 보여 주는 안내자가 필요하다. 성경이 오늘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사명을 주고 사회와 개인을 위한 말씀을 충분히 제공하지만 원래의 의미와 다르게 적용된다면 신뢰가 없어진다. 그래서 2,000년이 넘는 시간을 뛰어넘어 우리에게 유효 적절한 말씀이 되려면 '그때, 거기서'의 일차적인 의미를 알아야한다. 본서의 저자인 베일리는 바로 그 안내자로서 우리를 현장으로 초대하고 특별히 본서는 누가복음에 나오는 비유를 통해 예수님의 말씀을 풍성하게 보여 준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복음서들은 저자의 관점과 목적에 따라 강조하는 특징이 다르다. 그중에 누가복음은 가난한 자와 여인(당시 인간 이하로 취급 받음)과 병든 자와 소외된 자들에게 관심을 갖고 예수님의 치유와 회복이 그들에게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보여 준다. 특별히 누가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십자가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여행하는 장면에서 이 길 위에 주께서 만나는 자들과의 대화와 예수님의 비유를 포착하고 있다.

이 책의 저자인 베일리는 바로 그 모래바람 날리는 땅 위에서 만나는 예수님의 비유를 우리에게 그 땅의 언어와 문화와 문학과 역사로 보여 준다. 이런 안내자가 없다면 아마 우리는 이미 서구화된 해석과 우리의 선입견으로 그 비밀을 풀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실제 저자는 이집트, 레바논, 팔레스타인 등의 중동 지역에서 40년 이상 살고, 학교에서 배우고 가르친 경험을 바탕으로 독자를 생생한 현장으로 인도한다.

책은 총 2부로 구성이 되었는데, 1부는 알레고리의 위험과 폐단을 지적한 후 20세기를 중심으로 그동안에 있었던 비유에 대한 해석과 그것의 장점과 단점을 설명한다. 여기에는 예수님이 살았던 상황에 초점을 맞춘 도드와 예레미야스의 역사적-실존적 해석, 비유를 예술 작품으로 접근하는 존스의 문화적 해석(심미적 해석), 비유를 철학적 신학적 전제를 가지고 풀어 가는 린네만과 비아의 실존주의적 해석이 다루어진다.

그러나 저자는 이런 방법들이 비유의 참뜻과 예수님의 의도를 드러내지 못한다고 한다. 문학적인 주제와 구조를 강조하면 비유는 역사성이 결여되어 바람 부는 대로 떠돌아다니는 풍선이 되고 단지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무시간적 진술이 된다. 반면 신학적인 주제를 강조하면 해석자의 신학이 가미되어 당시의 배경이 무시되고 예수님이 강조하신 중요한 가치들도 왜곡되어 이 또한 역사적 정황을 놓친 해석이 된다.

그래서 저자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비유를 새롭고 정확하게 볼 수 있는 새로운 해석을 제공하는데 책의 원제목처럼 '농부로서의 예수님과 시인으로서의 예수님'으로 묘사한다. 전자는 예수님이 1세기 농부들의 상황 속에서 그들의 언어와 문화를 가지고 비유로 하늘의 뜻을 드러냈다는 것이고, 후자는 예수님이 1세기의 구전과 문학 구조를 가지고 비유를 통해 신학적인 메시지와 인생의 교훈과 가치를 가장 설득력 있고 오래 기억되게 효과적으로 전했다는 것이다.

즉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동양식 주해"라는 방법을 사용해 비유에 있어서 획기적인 업적을 남긴다. 그래서 우리는 책을 읽으며 중동의 농경문화와 팔레스타인 땅에 사는 사람들의 숨결과 눈물과 애환을 더 직접적으로 알 수 있다. 또한 저자는 비유를 해석하며 우리가 익숙하게 접했던 서구 교회의 번역과 역본들을 사용하지 않고 우리와 담을 쌓고 있었던 중동의 사본과 역본과 번역과 신학자들의 주장과 자료들을 사용한다.

그리고 저자는 문어보다 구어가 활용되는 시절에 예수님의 말과 비유는 분명히 효과적인 어법과 구조가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구약과 시편을 보아도 운문과 대구법과 교차법이 강조되는 특징을 볼 때 예수께서도 문학 기법을 활용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비유에 나오는 다양한 대구법을 소개하고 예수께서 이 방법으로 효과적으로 말씀하셨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책에 나오는 비유는 총 6개이다. '불의한 청지기 비유'(눅 16장 1-8절)와 그 뒤에 나오는 '재물과 하나님을 섬기는 문제에 대한 시적 말씀'(16장 9-13절) 그리고 '밤에 찾아 온 친구 비유'(11장 5-8절)와 뒤에 이어지는 '기도에 대한 시적 말씀'(11장 9-13절) 그리고 여러 사람이 복음 중의 복음이라고 인정하는 '탕자 비유'(15장 11-32) 그리고 같은 문맥에 등장하는 '잃은 양 비유'와 '잃어버린 동전 비유'(15장 4-10절)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 비유를 다 설명할 수는 없고 이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나타나는 예수님의 메시지를 하나의 주제로 적고자 한다. 바로 예수님은 자비하신 하나님을 드러내는 분이시다. 위에 모든 비유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메시지는 인간이 얼마나 절망적이고 교활하며 무능한지 드러나고 반면에 하나님은 이런 인간들을 심지어 대적자들까지도 품어서 변화시킬 수 있는 하늘 아버지라는 것이 나타난다.

불의한 청지기 비유에서 청지기는 그가 행한 악과 거짓말 때문에 심판과 죽음과 하나님나라의 도래라는 위기에 처했고 그는 아무런 변명을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청지기는 주인의 너그러움을 기억하며 그 자비에 모든 것을 맡기고 인생을 의탁한다. 사람들이 볼 때는 사기와 거짓말이었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그의 전적인 믿음과 신뢰를 지혜로 보시며 그를 용서하고 받아주시고 그의 영혼과 인생을 다시 회복시키신다.

우리가 잘 아는 탕자의 비유를 봐도(필자는 이 비유가 가장 은혜로웠고 지금도 아버지 품 안에서 울고 있는 듯하다) 탕자는 아버지에게 재산을 요구하고 이방 땅으로 가서 다 소진한다. 살아 있는 아버지에게 유산을 요구하는 것은 '아버지 빨리 죽어 주십시오'라는 저주이고 공동체로부터 돌에 맞아 죽을 죄이다. 그러나 아들은 자기에게 인생의 주도권과 결정권을 달라 요구하고 아버지를 떠난다.

그리고 쥐엄 열매를 먹는 삶을 살다가 다시 집으로 가야겠다고 하는데, 아들이 아니라 종으로 가겠다고 한다. 이 말은 회개했다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내 스스로 내 삶을 회복하고 인생을 구원하겠다는 다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아버지는 먼 거리에서도 뛰어나와 너무 기쁘기에 아들을 안아 준다. 유대인에게 뛴다는 것은 수치이고 품위 없는 행동인데 모든 굴욕을 당하고 욕을 먹더라고 달려 나와 그를 안아 준다.

그리고 또 급하게 뛰는 것은 공동체가 먼저 아들을 발견하면 돌을 던져 죽일 테니 내가 먼저 그를 안아 차라리 나에게 돌을 던져 나를 죽이고 아들은 살려 달라고, 살아야 될 이는 아들이라고 몸으로 행동으로 말하고 있다. 그리고 아들은 회개의 마음조차 없었는데 이 아버지의 사랑 앞에 마음이 흔들리고 아비의 품에서 지위와 신분이 회복된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용서를 받은 아들은 공동체가 받아들이게 되고 천국 잔치 같은 축제가 열린다.

이렇듯 본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죄인을 녹여 버리는 위대한 사랑과 마음이 드러난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걸으면서 이 땅에 하나님을 보여 주기 위해 사람들을 만나셨다. 그가 만난 사람들은 사회적 약자들이었고 가난하고 눈물 흘리고 고난 가운데 있는 자들이었다. 그리고 주님은 하늘에 아버지는 구름 속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의 현장과 인생의 고난 가운데 함께하시며 용서하시고 자비로우신 분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신다.

그리고 밤중에 찾아 온 친구 비유에서도 하나님의 성품이 잘 드러나는데, 여기서 저자는 집 주인이 벗 됨을 인하여서 빵을 주지는 않아도 간청함을 인하여 준다고 하는 말씀에서 그동안 이 '간청함, 끈질김'이라는 단어가 문맥적, 신학적, 언어학적, 문체적으로 잘못되었고, 원래 '창피를 당하지 않으려고'라는 뜻이라는 것을 알려 주어 이 비유의 본의를 드러낸다. 그래서 하나님은 명예를 소중히 여기시는 분이시고 백성의 기도를 들으시고 보호해 주신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가 되셔서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는 순간과 모든 삶의 과정과 다시 하늘로 돌아가는 그 시간까지 돌봐 주신다. 그것도 자신의 명예를 걸고 끝까지 영적 육적인 복지를 맡아 책임져 주신다. 친구가 밤에 빵을 달라고 할 때 주인이 그 이상으로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게도 가장 유효 적절한 것을 주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성품은 변함없으시고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는 분임이 드러나고 있다.

끝으로 책은 예수님의 비유를 풍성하게 보여 준다. 그러나 무엇보다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을 풍성하게 보여 준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하늘에만 계셔서 팔짱을 낀 채 이 땅을 향해 지시하는 분도 아니고 램프의 마마처럼 소원을 이루어 줄 때만 나타나는 신이 아니라, 직접 당신이 중동 사막의 뜨겁고 차가운 기후 속에서 백성들을 만나며 비유를 통해 하나님은 그들의 문화와 삶 속에 개입하시는 분임을 알려 주고 있다.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종교적인 마음과 심리적인 만족을 주는 관념적인 존재가 아니라,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그 길 위에서 사회적 차별과 고충과 역사적 격변과 고충을 맞이한 자들에게 하나님 아버지는 관념이 아니라 실재하시는 분임을 보여 준다. 하나님은 사회성과 역사성과 육체성이 없는 것이 아니라 도시를 걸으며 시골길을 걸으며 사막을 걸으며 이 땅과 백성을 사랑하고 구원하기 원하는 분임을 드러낸다.

따라서 본서를 통해 예수님의 비유를 해석하는 안목을 넓히고 그 의미를 풍성히 얻을 수 있다. 또한 팔레스타인의 1세기의 문화와 역사 속에 들어가 흙냄새와 청중의 정서를 느낄 수 있는 여행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아버지의 크고 높고 깊으신 사랑을 만끽할 수 있다. 얼마 전 <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가 인생을 재구성하는 예수가 강조되었다면 <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님의 비유>는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을 강조하고 있다.

*이 글은 <크리스찬북뉴스>에도 실렸습니다.
방영민 /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 열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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