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해 준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서 너희에게 구주가 나셨으니, 그는 곧 그리스도 주님이시다. 너희는 갓난아기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것을 볼 터인데,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표적이다"(누가복음 2장 9절-12절)

사는 일이 힘겹고 앞날에 뚜렷한 전망을 보기 어려울 때, 인간이란 대체로 자신과 세상의 장래에 대해서 깊은 호기심을 갖게 마련입니다. 용하다고 소문이 난 점술가에게 점을 치거나 사주를 보는 일이 오늘날과 같은 첨단 과학문명의 생활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때에도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을 끌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에게 닥칠 불행을 미리 예방하고, 조금만 기다리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 예언에 희망과 용기를 가져보고 싶기 때문인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한 의미에서만 보자면 점술이라는 것이 그 사회와 시대에 일종의 정신 치유적 기능을 하고 있는 측면도 있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불안해하고 좌절하고 있던 인생에 그 나름의 희망을 부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이 현재 처한 자리에서 가장 솔깃해 할 말을 골라 들려주면 반은 따 놓은 당상(堂上)이 될 수 있습니다. 중년 고개를 넘고 있는 사람에게는 중년 고생이 좀 있겠으나 말년에 운수가 피겠다고 하고, 아직 젊은 나이의 사람에게는 초년에 액땜을 잘하면 중년에는 운수대통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추운 겨울에는 내년 춘삼월이 되면 의외의 귀인을 만날 운이니 잘 참고 있으라고 말하고, 더운 여름철에는 소슬한 바람이 불면 반드시 기쁘게 찾아올 소식이 있으니 마음을 급하게 먹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번 선거에 나가도 되겠느냐, 학교에는 붙을 것 같은가 하고 물으면 몇 가지만 주의하면 된다고 하고, 나중에 혹 떨어지고 나면 미리 언급했던 그 몇 가지를 제대로 지키지 못해 그런 것이라고 도사가 호통치듯 둘러대면 되는 것입니다.

사기성이 농후할 수 있는 방식인데 결국 자기 인생에 무언가 좋은 일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희망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교묘하게 움켜쥐는 일에 속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해서 이와 같은 방식은 자칫 윤리적 기준이 바로 서 있지 못한 상태에서 이기심을 부추기고 요행을 바라게 하며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관에 대한 자기 성찰적 훈련을 하지 못하게 만들고 말 수 있습니다.

실로 문제는, 이러한 방식이 혹 마약이나 아편처럼 잠시의 위로와 인내, 용기를 줄 수 있을지는 모르나 자신이 이루려는 목표가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인지 깊이 살펴보도록 하지 않고, 그것을 쉽게 정당화할 수 있다는데 있습니다. 점술만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도 그런 함정에 빠질 수 있습니다. 잘 되면 길운(吉運)이라고 하고, 잘못 되면 불운(不運)이라고 하는데, 사실 그 개인의 길운이 다른 사람들에게 불행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고 그 반대의 경우도 성립합니다.

정치적 식견과 백성들에 대한 헌신적 봉사심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자가 그 막중한 책임을 져야할 정치에 나서는 일을 부추기거나, 이웃에 대한 사랑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자가 약한 사람들 착취해서 제 돈벌이가 잘 될 궁리나 하고 있는 것을 잘 되라고 빌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뇌물이나 갖다주면서 부패를 조장하는 자를 귀인(貴人)이라고 여기고 서로 붙어서 짝짝꿍을 하면 나라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더 이상 고생할 것 없다면서 불의에 가담할 것을 종용하고, 그래서 물질적인 생활이 편해지면 그로써 그의 운은 이제 틘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얼핏 고생인 것처럼 보이나 사실 그것이 그의 사람됨을 새로운 차원으로 성숙시키는 과정인 경우가 적지 않으며, 겉으로 보기에는 운수대통인 듯 하지만 그의 인간적 몰락이 시작되는 경우 또한 적지 않습니다. 초라하고 무력한 출발인 듯 하지만 사실은 그 안에 인생과 역사를 바로 세울 힘이 태어나고, 지금이야 대단히 크고 강성하게 보이지만 얼마 못 가서 붕괴되는 운명에 처하게 될 것들 역시 세상천지에 널려 있습니다. 우리의 눈과 귀가 세상의 그럴싸하게 보이는 허상(虛像)에 속으면 진실을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진정한 하늘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자기 죽을 길을 향해 가고 마는 것입니다. 대단한 권세가 곧 힘이라고 여기고, 풍족한 재산이 축복이며 높은 지위가 또한 자신의 인생을 든든하게 보장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들이 없으면 불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우리 인생을 진정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권력의 절정에서 쫓겨난 자가 부지기수이며, 돈 많은 청년들이 마약으로 자신의 인생을 좀 먹는 경우가 적지 않고 높은 지위를 누리면서 고독해지는 사람들 또한 드물지 않습니다.

하여 그 어떤 처지에 처해 있다해도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의 의미와 아름다움에 눈을 뜨고 하나님이 주시는 목표와 가치를 깨달으며, 그를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치는 기쁨이 곧 우리에게 감격임을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어디에 갖다놓아도 활기 넘치고 힘있게 살아냅니다. 그의 온유하고 겸허한 성품과 따뜻한 생기를 무엇으로도 가파르게 하고 꺾어놓을 도리가 없습니다. 그런 그는 자신이 놓인 현실로 인해 우울해하지 않습니다. 그에게서는 언제나 생명의 기력이 충만하게 뿜어져 나옵니다. 하여 사막에서도 꽃을 피워내는 존재가 됩니다. 마른땅에 샘물을 솟게 하는 이가 됩니다. 꺼져 가는 촛불을 되살려내는 사람이며, 꺾어진 갈대를 치유하는 자입니다. 가진 것이 없는 것을 고달파하지 않고, 가진 것이 많다고 오만해하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내가 진심을 다해 사랑하고 그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것이 감사한 것입니다. 나로 인해 누군가가 희망과 용기를 얻는 것이 기쁘며, 나로 인해 누군가가 새로운 인격으로 태어나고 자라는 것이 축복입니다. 나의 사는 목표와 모습이 인간사의 불행을 이겨내는 근거가 되고, 그 마음과 영혼이 바닥에 처한 이들에게 자신의 존재가 힘이 될 수 있는 것을 생에 최대의 기쁨으로 삼습니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의 의가 이루어지는 것을 삶의 최고 목표로 삼습니다. 이런 존재에게 하나님의 크신 축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마음이 은총이 되는 것입니다.

들판에서 양들을 돌보며 밤을 새고 있던 목자들이 하늘의 천사들로부터 받은 계시는 이상한 것이었습니다. 누가 듣기에도 그 고되고 힘겨운 시대에 답이 될 만한 휘황찬란한 광경이거나 놀라운 표적이 아니었습니다. 남루한 포대기에 싸여 소와 말의 냄새가 나는 구유에 누운 아기가 험난한 세월을 사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근거가 된다는 이 선언을 누구나 선뜻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그것은 그렇지 않아도 힘든 판국에 좌절을 깊게 하는 증거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 그 생명의 표적이라면 무언가 특별하고 화려하며 웅장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음성은 포대기에 싸인 갓난아기가 <구유>에 누워있는 것이 표적이라고 명확하게 밝힙니다. 실로, 인간의 가장 낮은 자리에조차 처하지 못한 생명, 거기에서 어떻게 세상이 새로운 소망과 용기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의 메시지는 우리의 헤아림을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더 이상 희망을 발견할 수 없고, 더 이상 내려가려 해야 내려갈 데도 없는 바닥의 자리, 세상의 어느 누구도 주목하지 않은 초라하고 무기력한 인생, 거기에서 보면 세상의 그 어떤 낮은 곳이라도 다 자신보다 높아 보이는 그런 현장, 그래서 하나님의 손길마저 닿을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그런 절대적 절망의 삶, 바로 거기에서부터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과 생명의 역사를 펼쳐 보이시겠다는 약속이 드러난 것입니다.

희망이 거기에서 시작되면, 다른 곳이야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사랑이 거기에서 움트면 또한 다른 곳이야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그곳을 어루만지신다면 다른 곳이야 역시 말할 나위가 없는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는 바로 그런 하나님의 절절한 심정이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태어난 징표입니다. 나사렛 예수는 바로 그런 하나님의 사랑이 시작된 자리를 증명하는 존재입니다. 구유에 누운 아기 예수는 바로 그런 하나님의 축복이 얼마나 겸손하고 얼마나 온유하며 이 세상에 임했는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세상의 거만과 세상의 욕심과 세상의 자랑이 무너지는 현장을 목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그 어떤 나라가 겸손하며, 이 세상에 그 어떤 지도자들이 그리 사랑에 충만합니까? 미국이라는 나라는 자신의 거대한 체구를 믿고 폭력을 내세우고 있으나 내일의 인류를 위한 희망은 그렇게 오지 않습니다.

저 2천년 전 팔레스타인의 작은 땅에서 미미하고 초라한 생명으로 오신 하나님의 방식으로 세상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사랑과 생명, 평화와 의로움이 아니고서는 인간과 세상, 역사는 진정으로 변화하지 못합니다. 구유에 누우신 하나님의 몸, 아기 예수는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이 세상에 충만해지는 하나님 나라의 독특한 방식에 우리는 눈을 뜨게 합니다.

그것은 우리를 무한히 겸허하게 만들고 우리를 진실한 용기로 채워주며 우리를 생명에 대한 감사와 감격으로 길러내며 우리를 무엇보다도 사랑에 충만한 존재로 이끌어 갑니다. 가장 낮고 낮은 곳에서 시작한 하나님의 축복 앞에서 오만해질 수 있는 자가 없으며, 자기를 내세울 자가 없고 세상의 강하고 높은 것을 숭상할 자가 또한 없을 것입니다.

우리 안에 이 마음이 태어나고 우리 안에 이 영혼이 자라면, 우리는 구유에 누운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 그리스도 예수의 생명을 우리 안에 얻은 자가 될 것입니다. 그런 감격이 이 성탄의 계절에 우리 모두에게 하늘의 선물로 주어지기를 진심으로 기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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