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하나

Terry Fox(1958년 7월28일-1981년 6월 28일) 이 사람은 암으로 다리를 잃었습니다. 한 쪽을... 절망속에서 점점 자신을 옭아매오는 암의 공포를 끌어앉고 테리폭스는 희망의 마라톤을 시작합니다. 저 멀리 캐나다의 동쪽 끝 뉴펀들랜드에서부터 캐나다를 가로 지르는 횡단을 시작합니다. 3,000마일이 넘는 캐나다를 한 쪽 다리로 달렸습니다.

하루 평균 33km를 저 다리를 하고 달리고 달린다. 이제 그는 비록 가고 없지만, 그로 인해 수많은 이들의 가슴에 큰 희망을 남겼습니다. 한 발 한 발 내딛는 그의 발걸음은 느려도 지쳐도 희망의 발걸음이었습니다.


이야기 둘

목회자 모임이 있었습니다. 목사님들의 모임에는 당연히 설교 이야기가 큰 화제입니다. 설교 준비는 어떻게 하는가? 설교의 본문은? 설교의 어려움은? 등등 많은 대화 가운데 최근 서울 강남의 어느 대형교회에서 청년담당 목회자로 있다가 캐나다로 온 목사님의 말씀은 충격이었습니다.

"5초 입니다. 5초. 대학생들에게는 설교 시작 5초를 잡지 못하면 그 설교는 실패입니다. 처음에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하면, 벌써 '아~~ 그거' 하고 외면합니다. 5초가 중요합니다"

(물론 이 대목은 나에겐 충격이어서 5분을 내가 5초로 잘못 들은 것은 아닌지 지금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언론을 보면 시간과의 전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분초를 다투는 세상, 이 싸움에서 지면 정말 영원히 실패할 것만 같습니다. 절대 질 수도 져서도 안되는 인생의 정글, 마치 내가 잡아먹지 않으면 잡혀먹힐 뿐이라고 강력한 메시지를 전해주는 듯합니다.

두려웠습니다.

이곳 캐나다의 대학원에서 교육학을 전공할 때 직접 어떻게 가르치는가를 실습한 적이 있었습니다. 다른 과목같지 않게 그 과목은 도움을 받을 만한 한국사람도 없었고, 좀 더 친근한 동양계도 없었고 전부 노랑머리의 백인들 뿐이었습니다. 그들과 조를 짜서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했습니다. 그러나 번번히 제가 속한 조는 더 많은 시간을 허비해야만 했습니다. 저의 미숙한 진행과 부족한 언어문제에 거기서오는 자신감 결여 등등 저는 저희 조의 짐이었지 결코 도움이 되지 못하는 존재였습니다.

토론을 하면서 저에게 '네 생각을 말해봐'라고 이야기하는 동료들에게 어색하게 더듬거리며 제 생각을 이야기하느라 분위기가 썰렁(?)했던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정말 동료들에게 미안했습니다. 이미 다른 조는 모든 과제를 마치고 있는데 저희조는 저로 인해 속도가 뒤쳐지니까요. 어느날 저는 그러한 미안한 마음과 함께 동료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동료는 저에게

"우리가 이 일을 얼마나 빨리하고 잘 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네가 너희 언어, 문화의 벽을 이 과제를 통해 극복하고 네가 학교에 잘 적응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얼마든지 기회가 있다"

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캐나다의 곳곳에는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 참 많습니다. 호수와 산이 곳곳에 있습니다. 호수에 비치는 눈 덮인 산은 마치 그림과도 같습니다. 그런 곳에서 캐네디언들은 부부가, 연인이 벤치에 앉아서 하릴 없이 시간을 보냅니다. 하릴 없이 호수를 쳐다보며 경치를 즐깁니다.

멋있는 곳에 가면 한번 휘둘러보고 사진 한번 찍고 오는데 30분이면 족한 저로서는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 가만히 호숫가 벤치에서 한 시간도 두 시간도 좋습니다. 한 번은 그런 케네디언에게 물어봤습니다.

"아니 뭘 그리 오래 보셔요?"

"아름답지 않습니까?"

(아름다워도 유분수지 하루종일 그렇게 할 일이 없나 궁시렁 궁시렁~~)

어느 연세 지긋하신 한국분께서 그 차이를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우리 한국사람이야 왜정에, 사변에, 혁명에, 산업화에 정말 정치, 경제, 사회, 이 모든 게 정신없이 몰아쳤지. 어느 숨 쉴 틈이 있었냐구? 하지만 얘네들은 틀리다구 전쟁이 있었나? 먹고 사느라 힘이 들었나? 누가 뒤에 쫓아오길 하나? 인디언하고 싸웠다구 해도 그거야 지들이 인디언을 공격하니까 그랬지 가만히 있으면 인디언이 왜 공격을 했겠어? 그러니 우리나라 사람은 바쁜 거야 바쁜 거라구 늘 불안하잖아. 지금도 아이엠에프다 뭐다 불안하잖아"

그 말을 들으니 문득 고3 시절이 떠오릅니다. 칠판 한구석에는 늘 표어가 써 있었습니다. 이런 표어들이었지요

'네 적은 지금 네 옆에 있다'

'지금 네가 한순간 달콤한 졸음에 빠져있는 동안 수천 등수가 뒤쳐진다'


뭐 이런 표어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섬뜩한 표어들입니다.

이곳에서 버스를 탈 때 휠체어 탄 사람이라도 오면 버스는 휠체어가 올라올 수 있게 승강기를 내리고 휠체어를 올립니다. 그렇게 지체되는 시간 동안에 아무도 불평하지 않고 기다립니다.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이곳이 만약 서울처럼 복잡한데서 1분이 금쪽같은 시간에 휠체어를 타고 버스를 탈 수 있을까? 물론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이곳도 어느 정도 먹고 사는 여유들이 있으니 가능한 모습들이 아닌가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유는 마음의 여유가 먼저인 것 같습니다.

5초 안에 시선을 휘어잡고, 처음 대면 3분에 시선을 끌고, 이 모든 것들이 현대사회의 이방인도 아닌 저에게는 분명히 버거운 과제입니다.

힘겹게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천천히 달려나갔던 테리폭스는 1980년 7월 11일 이런 말을 했습니다.

"I'm not doing my run to become rich or famous. To me, being famous is not the idea of the run. The only important part is finding a cure for cancer. Don't forget that. I'm no different from any of you - I'm no better, no worse. You are cheeering and clapping for me but if you have given $1, then you are part of the Marathon of Hope. Even if I don't finish, we need others to continue. It's got to keep going without me."

그의 쉼 없는 한 걸음이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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