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인 사역을 하면서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노숙인 형제들이 사역자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까지 함께 노숙 생활하던 형제가 사역자로 변하는 모습을 보면서 현장에 있는 노숙인이 깜짝 놀라며 뭔가 도전을 받고 계신 것 같습니다. "목사님, 저도 함께 사역해도 되나요", "저도 동참하고 싶어요"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전보다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 얼마 전까지 노숙인이었지만, 이제는 사역자로 나선 형제님. (사진 제공 손은식)

평범한 시민이 노숙인이 되었다는 것은 그 사람을 받치고 있던 많은 지지 기반(가정, 직장, 친척 등 그가 몸담았던 공동체)이 붕괴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랜 기간 노숙인으로 지내며 삶이 황폐하게 변했는데, 그들을 사회로 복귀하게 하는 방법으로 몇 푼의 돈과 기술만을 생각한다면 큰 오산입니다.

노숙인의 자활을 위해서는 누군가 그들을 위한 지속적인 관심과 돌봄과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저 또한 4년 동안 노숙인과 함께 생활하며 얻게 된 깨달음입니다. 현재는 그와 같이 사랑받던 노숙인이 사역자로 세워져 거리의 노숙인을 가슴으로 품는 것을 봅니다. 이런 감동의 현장에서 가장 큰 위로와 격려를 받는 사람은 제가 아니라 사역자로 세워진 노숙인 형제들입니다. 그분들의 간증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노숙인이었던 형제들의 사역을 바라보며 제 안의 편견이 깨어지고 생각이 변화하는 것을 느끼며 노숙인 사역의 깊이가 깊어지는 것을 봅니다. 지금까지 노숙인 사역은 '노숙해 보지 않은 정신과 육체가 좀 더 건강한 사람이 조금 못한 사람들에게 유익한 것을 나눠 줄 때 효과가 있다'라는 편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갓 3주째 사역 현장에 나온 형제가 메모지를 가지고 노숙인 성함을 적고 대화하며 필요 사항을 기록하고 함께 기도해 주는 모습이나, 종로 쪽방촌에서 어르신을 한 분 한 분 찾아다니며 그분들을 마음으로 품으려 노력하고 기도하는 모습은 일반인도 잘하지 못하는(아니, 거의 하지 못하는) 행동입니다.

▲ 예상과는 달리 종로 쪽방촌에 이르는 도움의 손길은 거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종로 쪽방촌에는 연세 드신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많이 살고 계십니다. 오른편 사진의 할머니는 올해 100세가 넘으셨습니다. (사진 제공 손은식) (사진 제공 손은식)

노숙인 자활에 대한 단상

얼마 전 자활하신 아버님 한 분을 만났습니다. 그분은 수년 전 사업 실패 후 거리로 내몰렸고(빚과 그에 따른 이혼으로), 한겨울 등에 땀이 식을 틈 없이 열심히 뛰어다니셔서 다음 겨울이 찾아오기 전에 자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2년 이상 거리에서 노숙하는 아버님, 어머님은 스스로 일어나기에는 너무 큰 아픔을 겪었고, 긴 시간이 흘렀습니다. 누군들 자활하기 위해 노력을 안 해 보았겠습니까. 그분들 또한 나이로, 몸의 병으로, 여러 사회의 편견으로, 공공 기관 자활 프로그램 미비로(신청 대기자가 100명이라면 그중 5명도 혜택 보지 못하는 좁은 문), 그마저 있던 자활 의지도 꺾이고 말았습니다.

이런 현실적인 벽에 가로막힌 가운데 하루하루 연명하는데, 그분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언제나 곱지 않습니다. '그래도 음지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소외 계층보다는 노숙자가 맘 편하지', '힘든 현실을 이겨 내야지', '힘들다 힘들다고만 하니까 문제가 해결되겠어', '주변을 찾기만 하면 먹을 것(배식 장소) 천지인데 뭐가 힘들어'라며 막말하는 분을 보면,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꼬이게 만들었나 고민이 깊어집니다.

▲ 일주일에 네 차례 일회용 지퍼백에 10~13가지 간식을 준비하는 일이 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가치 있고 은혜 넘치는 일입니다. (사진 제공 손은식)

저는 노숙인이 이 시대 가장 가난한 자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 사각지대에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도 마지막 희망의 끈이 끊어지면 찾는 곳이 거리이고, 그런 분을 통칭해 노숙인이라 부르기에 그러합니다. 적어도 오늘 하루 몸을 뉠 곳도 없어 길 위에 버려진 분보다 상황이 나쁜 분은 없잖아요.

편견을 버리세요. 이 지점에서 노숙인 자활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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