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최유리 기자] 눈이 벌겋고 입 주변이 퉁퉁 부어올랐다. 눈썹은 사라졌고 눈두덩이는 보라색 아이섀도를 바른 것처럼 멍들었다. 갈비뼈가 부서지고 몸 곳곳은 피멍이다. 짧게는 5년, 길게는 10년 동안 함께 살던 파트너에게 폭행을 당했다. 얼굴이 처참해 스크린을 차분히 응시하기 어려울 정도다.

"자고 있는데 문을 두드리더라고요. 저를 개 패듯 팼어요. 머리채를 잡고 질질 끌고 다녔죠." 
"연락을 안 받으니까 잡아 죽이겠다고 메시지를 보냈어요. 반드시 찾아내겠다고."

몇 년간 살을 섞어 온 사람에게 이유 없이 구타당하는 사람. 경찰 신고 후 판결을 기다리는 사람. 가해자가 보석으로 풀려났다는 소식에 손을 파르르 떠는 사람. 왜 자신을 때리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동시에 그 사람에게 돌아가고 싶은 사람. 첫 신고를 하기 전 50여 번의 폭행을 참은 사람. 10월 11일 여성인권영화제에서 이들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가 상영됐다.

피해자다운 게 뭔데? 

다큐멘터리는 1년간 가정 폭력을 당한 영국 여성들을 밀착 인터뷰한 '닫힌 문 뒤에는'이다. 영화 상영 후 신상희 소장(한국여성의전화 가정폭력상담소)과 허민숙 연구교수(이화여자대학교 한국여성연구원)가 가정 폭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다큐멘터리에는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이 종종 나온다. 몇 년간 폭행을 당했던 여성 사브리나는 마음을 굳게 먹고 파트너를 신고한다. 처벌을 원하지만 법정에 선 가해자를 마주하자 마음이 녹는다. 가해자가 용서를 구하는 모습을 보며 "다시 시작하자, 내가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다. 여전히 그를 사랑하는 것 같다며 울음을 터뜨린다.

가해자를 증오하는 것이 정상적인 반응 같은데, 피해자는 가해자와 밥을 먹고, 자살하겠다는 가해자를 걱정한다. 더 나아가 가해자와 재결합하고 싶다고 말한다. 신상희 소장과 허민숙 교수는 이런 피해자의 양가감정은 당연한 것이라고 보았다.

"외부에서 보면 '미친 거 아니야? 자기를 그렇게 때렸는데 연락한다고 다시 만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게 떠나는 과정이다. 최종적으로 떠나기 위해서 사람들은 몇 차례 헤어짐을 겪는다. 이게 자연스러운 일이다.

우리는 종종 전형적인 피해자상을 만들고 거기에 그들을 끼워 맞춘다. 그러면 안 된다. 상에서 벗어난다고 피해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 우리가 그들을 통제하려는 거다."

가해자가 사랑하는 사람을 때리는 이유는 뭘까. 허민숙 교수는, 가해자에게 이유를 물어봐야 알 수 있는 문제지만 동기 자체를 궁금해하는 건 매우 중요한 일이라 평가했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피해자에게만 "왜 떠나지 않았어?", "왜 신고하지 않았어"라고 추궁했다.

전문가와 언론은 가해자가 분노 조절 장애, 공격적 성향으로 홧김 범죄를 저지른다고 했다. 원인을 가해자의 개인 성향에서만 찾았다. 최근 강남역 살인 사건만 보더라도 언론은 가해자 개인 성향에 포커스를 맞췄다. 그러나 허 교수는 가해자가 사회에서 어떤 메시지를 받았기에 이런 행동을 했는지 질문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허 교수는 2013년 미국에서 한 남성이 6명을 살해하고 14명에게 중상을 입히고 여성을 혐오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한 사건을 예로 들었다. 사건이 일어났을 때 미국 언론은 사회구조적인 문제를 지적했다. 허 교수는 한국 언론이 이런 태도를 보이지 못하는 게 아쉽다고 평가했다.

▲ 피해자다운 건 없다. 가해자에게 양가감정을 느끼는 게 이상해 보일지라도 그것 또한 헤어지는 과정 중 일부다.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피해자에게 잘 도망치라는 한국 vs. 가해자 접근 차단하는 영국

영국은 최초로 가정 폭력 피해자를 위한 쉼터를 만든 국가다. 사건이 발생하면 케이스를 전담한다. 한국은 검사가 바뀌는 경우가 많아서 여러 차례 사건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영국은 그렇지 않다. 전담 수사관이 있기 때문에 한 번만 이야기하면 된다.

영국이 잘하고 있는 게 하나 더 있다. 사건이 생기면 가해자를 쫓아낸다. 정푸름 교수는 피해자가 위험 상황을 어떻게 벗어날지 고민해야 한다고 했다. 한국은 피해자 '스스로' 상황을 벗어나라고 말한다. 가해자가 폭력을 휘두르려고 할 때 도망치라는 것이다. 영국은 아니다. 피해자가 집에서 나갈 이유가 없다 여기고 가해자를 내쫓는다.

독일도 마찬가지다. 한국은 가해자가 피해자 반경 100m 안으로 접근하지 못하게 막는 경우가 많다. 독일은 가해자를 아예 다른 지역구로 이주시킨다. 피해자가 있는 구역으로 들어오는 행위 자체를 엄격히 제한한다.

허민숙 교수는 말했다.

"한국은 가정 폭력을 '집에서 일어난 일인데 그게 뭐 대수냐'고 생각한다. 서구 사회는 가장 안전해야 하는 가정에서 일어난 일이기에 더 위험하다고 본다. 안전 지역이라고 생각하는 집에서 받는 상처는 더 큰 문제다."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