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야말로 '인문학 열풍'이다. 스티브 잡스가 생전에 "인문학과 기술의 교차점에 있는 제품을 만드는 것"을 애플의 정신이라고 해서일까. '인문학과 기술의 조화'를 들먹이며 내로라하는 기업들은 물론, TV 프로그램까지 인문학을 배우고자 하는 열의(?)가 그야말로 대단하다.

인문학이란 언어, 역사, 문학, 철학 등을 아우르는 자연과학과는 배치되는 개념으로 인간에 관한 가치를 따지는 학문이다. 그러니까 스티브 잡스가 돈 버는 것과 밀접히 관계된 과학기술 문명의 선두에 섰으면서 돈하고는 상관이 없는 인문학을 이야기한 것은 그야말로 어울리지 않는 표현 방식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획기적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인문학의 죽음'과 '인문학 열풍'이 공존?

▲ <진중권의 테크노 인문학의 구상> / 진중권 지음 / 창비 펴냄 / 160쪽 / 7,000원

우리 대학에서는 철학 같이 기초 학문을 배우는 학과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있다. 그 이유를 콕 집어서 말하면 돈벌이가 안 되기 때문이다. 의예과, 이공과 계열 학과를 졸업해야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는 시대다. 그런데 이런 사회 분위기와는 전혀 다르게 '인문학 열풍'이라니.

그래서 어떤 이는 이런 현상을 "뻔뻔한 지성들의 르네상스"란 말로 꼬집었다. 보헤미안 작가가 <뻔뻔한 지성들의 르네상스>(베프북스)에서 일부러 어려운 용어로 지적 우월감을 만끽하는 일부 전문가들 모습을 비꼬며 "인문학 열풍이 헛똑똑이를 양산한다"고 비판한 이유다.

대학 현장에선 인문학을 폐강하는데, 사회에서는 인문학 열풍이 인다. 참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인문학의 죽음'과 '인문학 열풍'이 어떻게 같은 사회에서 일어나는가. 보헤미안 작가의 말처럼 헛똑똑이의 뻔뻔한 지성 때문일까.

실제로 인문학이 죽었다고 하는데 도서관의 인문·사회과학 도서는 대출이 늘어나고 있고, 인문학 분야의 책 출판도 늘어나고 책도 잘 팔리고 있다. 이런 현상을 "각자도생의 시대에 공부에서 길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개인적으로 동의하지 않지만)이라고 본 출판사가 있다.

'창작과비평(창비)'이다. '창비'가 50주년 특별 기획으로 '공부의 시대'라는 시리즈 강의를 열었다. 물론 문전성시를 이뤘다. 이 강의에는 강만길, 김영란, 유시민, 정혜신, 진중권 등 다섯 명의 지식인들이 강사로 나섰다. 강의 내용은 모두 '공부의 시대'라는 시리즈로 출판되었다.

진중권의 <테크노 인문학의 구상>(창비)도 그중 하나다. 미학자 진중권은 디지털 시대에 인문학이 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 기존 방식을 뛰어넘지 않고는 인문학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위기감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인문학이 죽어 가고 있다는 전제 아래 인문학의 거짓 열풍을 넘어 진정한 인문학의 토대를 마련하려는 시도다.

진중권은 과학기술 및 미디어의 발전과 더불어 인문학이 위기를 맞이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인문학을 지속 발전시킬 새로운 방안으로 '테크노 인문학'이란 새로운 구상을 독자들에게 주창한다. 그는 이를 "문자 문화의 종언이 가져온 위기 속에서 인문학이 나아가야 할 길을 모색하는 지적 여정"이라고 표현한다.

학문이 영리 활동과 결부된 20세기에는 먹고사는 것에서 자유롭던 인문학을 자연스레 영리 활동과 결부할 수밖에 없으며, 그런 시도는 디지털 시대와 걸맞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는 인문학의 종언을 선언하려는 이 시대를 위기라고 보지 않고 새로운 도전 앞에 인문학이 서 있다고 본다. 위기는 또 다른 기회라는 말의 우회적 입장 표명이다.

인문학의 새로운 도전, '테크노 인문학'

그러니까 겉모양만 인문학의 무늬를 입힌 '헛똑똑이 지성'으로는 안 된다고 보고, 시대의 물결을 흡수하는 인문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디지털 인문학'으로 본 것이다. 르네상스 이후 전통적 인문학은 거시적 사회 변동의 소용돌이 속에 놓여 있다. 그러므로 시대에 뒤떨어지는 인문학으로는 대처가 힘들다. 그런 인문학은 죽은 인문학이 맞다.

현대는 문자 문화에서 급격하게 영상 문화로 미디어적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스마트 기기의 발달과 SNS(Social Network Services/Sites)의 일상화는 글자가 아니라 미디어가 대세다. 우리 문화를 완전히 바꿔 놓은 디지털 시대에 인문학이 가야 할 길도 디지털이어야 한다. 기성세대의 히스토리는 젊은이들의 스토리로 바뀌고, 거짓말하는 자가 아니라 지루한 자가 '나쁜 놈'인 세상이다.

"정보 전달의 플랫폼이 바뀌었으니 인문학 역시 이제는 텍스트를 넘어 사운드와 이미지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다시 규정하고 고민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중략) 디지털이라는 새로운 기술이 우리 생활 세계를 완전히 바꿔 놓았습니다. 그것은 곧 인문학에서 다뤄야 할 주체 역시 과거와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죠." (39~41쪽)

예를 들어, 자신의 책 <미학 오디세이>(휴머니스트)를 전자책으로, 에셔(M. C. Escher, 기하학적 원리와 수학적 개념을 토대로 2차원의 평면 위에 3차원 공간을 표현한 네덜란드의 판화가- 기자 주)의 그림을 3차원 입체 영상으로, 바흐(J. S. Bach)의 '무한히 상승하는 카논'을 이미지와 사운드로 재현하여 영상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대는 지식 권력의 시대다. 아는 자가 권력을 행사한다. 그렇기에 빠르게 변하는 기술 문명에 버금가는 패러다임 전환이 인문학에 적용되어야 한다. 이제 본질을 묻는 대신 세계 인식에 사용하는 정신과 의식의 본질부터 묻는 '인식론의 전회'가 일어나고 있다. 20세기 후반부터는 '미디어적 전회'가 일고 있다.

'테크노 인문학'은 제작학으로 발전해야

구체적으로 디지털 시대의 존재론은 파타피직스(디지털 시대의 가상과 현실이 중첩된 상태- 기자 주)여야 하고, 인간학은 호모루덴스[놀이가 문화의 한 요소가 아니라 문화가 놀이 자체라는 요한 호위징하(Johan Huizinga)의 주장- 기자 주]여야 하고, 사회학은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로 갈리며, 이를 아우르는 '테크노 인문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새로운 시대는 놀이가 노동이다. 그러나 강요된 예술은 더 이상 자유가 아니다. "미학적 인간, 유희적 인간이 되라는 요구는 사실상 자본주의의 정언명법"이라면서도 획일화된 '헬조선'의 해프닝을 염려한다. "스티브 잡스 같이 되라"고 말할 때 "그럼 아이들을 자퇴시켜야 한다"는 웃픈 이야기를 예로 든다. 테크노 인문학을 주장하면서도 그런 획일화된 모습이 될까 걱정하는 것이다.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창조 경제'를 표방했습니다. 그러자 대한민국 정부 부처들은 자기 부서 이름 앞에 '창조'라는 글자를 붙였지요. 그 결과 팔십 몇 개의 부서가 획일적으로 '창조'라는 이름을 갖게 됐습니다." (100쪽)

이름 바꾼다고 '창조 경제'가 되는 건 아니다. 마찬가지로 인문학 또한 그런 형태의 이름 바꾸기가 되어선 안 된다는 뜻이다. 발상의 전환, 새로운 패러다임의 적용이 필요하다.

우리는 자본주의사회에서 산다. 저자는 소비 자본주의에서 미적 자본주의, 유희 자본주의, 기호 자본주의 형태로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들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디자인을 강조하여 제품이 아니라 작품을 만드는 시대는 이런 변화의 대표적 모습이다. 결국 새로운 인문학은 세계의 해석학에서 제작학으로 변모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뒤안길은 뒤쪽으로 나 있는 오롯한 오솔길입니다. 책을 읽으며 떠오르는 생각의 오솔길을 걷고 싶습니다. 함께 걸어 보지 않으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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