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화대교가 놓여진 곳은 조선시대 서울을 출입하던 나루터인데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권2 산천조에 의하면

"양화도는 서강나루에 있는데 처음에는 나루지기인 도승(渡丞)을 두었으나 후에 별장을 두었다"고 하였고,

관방조(關防條)에는

"양화진은 1754년에 설치한 것으로 어영청 소속으로 별장이 있고 아장(牙將)이 200명이었다"고 되어 있다.

그외 각종 문헌에도 양화나루에는 나루지기가 있으며 방어를 위한 진(鎭)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다. 곧 고려 이래로 양천·강화로 가려면 반드시 이곳 양화나루를 건너야 했으므로 영조 이후에는 송파진(松坡鎭)·한강진(漢江鎭)과 함께 서울 3진(三鎭)으로 요충지였다.

잠두봉 서쪽의 양화대교 동쪽지점인 양화나루를 큰나루라 하였으며 맞은편은 안양천이 유입되어 합류되는 지점을 연결하였다. 이 나루는 바다와 통해 있으므로 경상·전라·충청·경기도의 공세(貢稅)와 미곡을 서강의 광흥창까지 운반하는 조운(漕運) 전용항구였다.

조선초에는 용산강을 한강 으뜸의 항구로 쳤으나 수위가 낮아지면서 하류지역으로 옮겨지게 되었는데 1591년의 기록이나 1636년의 기록에서는 수위가 얕아져 양화나루 이상은 배가 다닐 수 없다고 하였다. 이러한 양화나루는 병인박해 결과 가져온 프랑스함대가 하중동까지 들어올 수 있게 만들었으며 개항 무렵에는 서양의 배가 자주 정박하였고 일본과 중국·독일 소속의 상선이 서울과 인천사이를 정기운항하는 기착지로 되었다. 이에 따라 지금의 양화대로는 개항 이후 서양 문물의 서울 진입로가 될 수 있었다.


한강변에 우뚝 선 신앙의 쉼터

▲절두산 기념성당

양화진을 끼고 한강변에 우뚝 솟은 봉우리의 모양이 누에가 머리를 든 것 같기도 하고 용의 머리 같기도 하고 해서 잠두(蠶頭) 또는 용두(龍頭)로 불리던 서강(西江) 밖의 봉우리가 절두산 (切頭山)이 된 데에는 가슴 시린 아픔이 있다.

자신의 쇄국 정책을 버티어 나가기 위해 무자비한 살륙을 자행함으로써 당시 절두산에서만 무려 1만 명의 교우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추산되지만 그 수가 맞는지 틀리는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선참후계(先斬後啓), 즉 "먼저 자르고 본다."는 식으로 무명의 순교자들이 아무런 재판의 형식이나 절차도 없이 광기 어린 칼 아래 머리를 떨구었고 그래서 30여 명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원래 잠두봉 또는 용두봉은 예로부터 풍류객들이 산수를 즐기고 나룻손들이 그늘을 찾던 한가롭고 평화로운 곳이었다. 도성에서 김포에 이르는 나루터 양화진(楊花津)을 끼고 있어 더욱 명승을 이루었던 곳으로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꼭 유람선을 띄웠다고 전해져 온다.

하지만 병인년인 1866년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까지 침입해 오자 대원군은 "양이(洋夷)로 더럽혀진 한강 물을 서학의 무리들의 피로 씻어야 한다."며 광기 어린 박해의 칼을 휘두른다.

당시 대원군은 일부러 천주교도들의 처형지를 이전의 서소문 밖 네거리와 새남터 등에서 프랑스 함대가 침입해 왔던 양화진 근처, 곧 절두산을 택함으로써 침입에 대한 보복이자 '서양 오랑캐'에 대한 배척을 표시했다.
  
1868년 남연군 무덤 도굴 사건, 1871년 미국 함대의 침입 등의 사건은 대원군의 서슬 퍼런 박해에 기름을 퍼붓는 꼴이 되어 살륙은 6년간이나 계속됐고 병인박해는 한국 천주교회 사상 가장 혹독한 박해로 기록된다.

▲순교자상
절두산에서의 기록에 있는 맨 처음 순교자는 이의송 일가족으로 그 해 10월22일 부인 김엇분, 아들 이붕익과 함께 참수됐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하지만 그 일가를 비롯한 30명 남짓 외에는 전혀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 무명 순교자들이다.

1966년 병인박해 1백주년을 기념해 그 옛날 수많은 순교자들이 목을 떨구었던 바 그 자리에 순교 기념관이 선다. 무심히 흐르는 한강 물 속에 애달픈 사연들은 기념관이 서고 순례자들의 발걸음이 머무르면서 오늘날에 다시 되살아난다.

우뚝 솟은 벼랑 위의 3층으로 세워진 기념관은 우리 전통 문화와 순교자들의 고난을 대변해 준다. 접시 모양의 지붕은 옛날 선비들이 전통적으로 의관을 갖출 때 머리에 쓰는 갓을 구멍을 갖고 있는 수직의 벽은 순교자들의 목에 채워졌던 목칼을, 그리고 지붕 위에서 내려뜨려진 사슬은 족쇄를 상징한다.

웅장하게 세워진 절두산 기념관은 순례 성당과 순교 성인 28위의 성해를 모신 지하묘소 그리고 한국 교회의 발자취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수많은 자료와 유물들이 전시돼 있는 전시관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특히 기념관에는 초대 교회 창설에 힘썼던 선구 실학자 이벽, 이가환, 정약용 등의 유물과 선교자들의 유품, 선교자들이 옥고를 치를 때 쓰였던 형구(刑具)를 비롯해 갖가지 진귀한 순교 자료들이 소장돼 있다. 그 중에서도 두 번째 간부였던 최양업 일대기 31점과 유중철(요한) 이순이(루갈다) 동정부부 일대기 27점은 귀중한 자료로 꼽힌다. 또 기념관 광장에는 김대건 신부의 동상, 오타 줄리아의 묘, 박순집의 묘, 남종삼 성인의 흉상과 사적비 등이 마련돼 있기도 하다.

특히 순례자들은 부친, 형제, 삼촌, 고모, 형수, 조카, 장모, 이모에 이르기까지 한집안 열 여섯 명의 가족들이 한꺼번에 치명한 박순집(1830-1912년) 일가의 이야기가 새겨진 비석 앞에서 가슴 뭉클한 감동을 가눌 길이 없다.

순교자들의 옛 모습들은 도시의 소음에 묻히고 아파트 그늘에 가려 그 옛날의 아픔도 함께 가려진 듯 하다. 하지만 유유히 흐르는 한강물과 같이 고요함 속에서도 우리에게 굵고 강한 목소리로 소리 높여 꿋꿋한 신앙을 가르친다.

젊은 교역자들이 부인과 젖먹이 아이들까지 함께 데리고 제법 강바람이 쌀쌀한 초겨울에 이곳을 찾은 것은 약간 무리였다. 월요일이라 그런가. 우리 일행을 맞이하는 분은 아무도 없고 늠름하게 서서 기념관을 바라보고 서 있는 김대건 신부의 동상과 약 20여 미터 옆으로 거리를 둔 곳에 우리의 어머니와 같은 다정한 모습으로 다소곳이 한복을 입은 마리아의 동상이 겸손히 순교자의 기념관을 향하여 기도하는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하다. 그리고 추위도 잊은 채 한 여인이 마리아 상의 두 손을 잡고 무릅을 꿇고 기도하는 모습이 보이다.

▲순교기념비(위의 사진들은 가톨릭자료실 것)

목회일선에 수고하는 미자립교회의 목회자들을 조금이나마 위로하기 위하여 지방 선교부 주관으로 이곳으로 국내성지순례를 오게 되었는데 얼마나 위로가 되었을지 모르겠다.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끝까지 버티다 머리가 절두(切頭) 되기까지 굽히지 않고 신앙의 길을 걸었던 순교자들의 신앙의 열정이 오늘의 사회에서 목회하고 신앙생활하는 우리들에게 큰 영적 힘으로 작용하여 더욱 힘차게 순례자의 길을 걸어가는 신실한 주의 자녀들이 되길 기대해 본다.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쌔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사도행전 7장 55-60)"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