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영화 '곡성'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편집자 주

 

▲ 신촌 청어람아카데미에서 영화 '곡성'을 놓고 대담을 진행했다. 김종일 목사와 양희송 대표가 이야기를 나눴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뉴스앤조이-이은혜·강동석 기자] 나홍진 감독의 신작 '곡성'(哭聲, 2016)만큼 뜨거운 영화도 드물다. 현재 700만 관객 동원을 목전에 두고 있지만 관객 수는 문제가 아니다. 영화 해석을 놓고 이만큼 오래 회자되는 한국 영화가 있었나 싶을 정도다. 감독이 영화 해석에 대한 해명 인터뷰를 하고, 관객들이 영화를 놓고 갑론을박하며 서로 다른 이야기를 내놓는다.

'해석'이 핵심 문제로 부각되는 것은 '곡성'이 갖고 있는 특성 때문이다. 기독교 모티프나 무속 신앙, 여러 종교 이미지가 혼재돼 있어 복잡한 탓이다. 더욱이 미스터리 스릴러라는 장르 특성을 극대화해 156분 동안 꼼짝없이 관객을 몰아붙인다.

이때까지 '곡성'을 두고 많은 이야기가 나왔다. 대개 각 등장인물의 선악을 논하면서 영화 자체 분석으로 귀결된다. 이동진 평론가는 '곡성'에 대한 2시간짜리 '끝장 평론'을 녹음해 내놨다. 이 또한 영화 내부 미스터리를 푸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기독교인들도 여러 반응을 보였다. 해석 문제에 천착해 '곡성'을 가룟 유다 같은 영화이며, '곡성'의 흥행이 마귀적이라고 평하는 글도 눈에 띄었다. 기독교 모티프를 잘못 사용했다는 지적도 있었고, 영화 자체를 기독교라는 틀로 풀어내는 글도 있었다.

'곡성'을 한국 사회와 한국교회라는 맥락 속에서 어떻게 읽을 수 있을지 궁금했다. 6월 14일 오후, 신촌 청어람아카데미 사무실에서 김종일 목사(동네작은교회)와 양희송 대표(청어람ARMC)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 보기로 했다.

아래는 대담 내용이다.

▲ 영화 '곡성' 포스터. ⓒ이십세기폭스코리아

- 먼저 영화 본 소감 한 말씀씩 부탁드린다.

양희송: 일단 좀 황당했다. 줄거리도 안 잡히고, 누가 범인이며 영화가 뭘 말하려고 하는지도 모르겠더라. 전반적으로 장면 장면 만듦새는 좋은 영화라 156분 동안 몰입해서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영화관을 나설 때 정리하면서 나갈 수 있어야 하는데 전혀 정리가 안 되니까 당혹스러웠다. 극장에서 나와 올라온 리뷰를 찾아봤는데, 오히려 납득이 안 갔다. 두 번 봤는데, 두 번째 보면서는 꽤 정리가 됐다. 여러 갈래로 해석할 여지가 있는 영화다. 정리할 수 있었지만 쉽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도전적인 영화라 좋았다.

김종일: 보고 온 청년들이 재밌다고 해서 혼자 봤다. 어떤 부분은 이해가 안 가더라. 영화에 대놓고 성경 말씀이 나오고, 여러 장치를 보면 기독교적인 걸 보여 준다. 나 혼자 고민하고 있다가 몇 가지 확인해야 할 부분이 있어서 다시 봤다.

돌출되는 광기 앞에 무기력한 종교…얽혀 있는 성 문제

- 김종일 목사는 '곡성'이 정치사회적인 내용이 담긴 영화라는 글을 페이스북에 쓰기도 했다. "교회, 사제, 기독교가 어떤 존재로 서 있어야 하는지 묻게 된다"고 했다. '곡성'에서 맞딱드릴 수 있는 한국 사회와 교회 모습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으면 좋겠다.

김종일: 맨 처음 무명이 등장했을 때, 무명은 군복을 입고 경찰인 주인공에게 돌을 던진다. 이 모습이 다르게 보였다. 어떤 공동체나 국가가 심각하게 왜곡돼서 악이 횡행하는데 민감한 사람이 경찰이라는 공권력한테 얘기를 하는 거다. 문제가 있다, 너는 알아야 한다고. 예전에 학생들이 돌 던지는 것이 연상됐다.

외지인이 일본 사람인데 악마로 등장한다. 일본 제국주의로 민족이 수탈당할 때, 그 안에서 또 다른 수탈 세력이 우리 편이었다. 무당 일광도 (우리 편인 줄 알았는데) 굿하면서 1,000만 원씩 빼먹고 있다. 과연 외부의 적이 전부냐. 내부에 적이 또 있는 거 아니냐.

또 하나는 교회 역할이다. 경찰이 가서 어떻게 하면 좋냐고 신부에게 물어 보았더니, 의사 말을 잘 듣고, 의사 뜻을 따르라고 한다. 그런데 이미 병원에서는 아픈 사람이 와도 죽어 나가고 치료도 안 된다. 이 사안에 내놓을 카드가 없다. 신부는 그것도 알지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냥 의사 말 따르라고 한다. 영적인 문제에 교회가 그다지 관심이 없는 거다. 마을 사람이 죽어 나가는 데도 말이다.

영화를 보면 교회 모습이 계속 나온다. 교회들이 막 보이게 장면이 잡힌다. 마을에 교회가 있고, 신부도 나오는데 이 문제에 정작 그들은 어떤 것도 해 주지 못하고 있다. 우리 공동체나 국가가 갖고 있는 문제에 대해 교회가 참 무기력하다고 생각했다.

▲ 주인공 종구에게 돌을 던지는 무명.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양희송: 이 영화가 표면적으로는 무속도 나오고, 신부도 나오고, 성경 구절도 등장한다. 종교적인 상징을 다양하게 가져온다. 액면 그대로 다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영화 전체가 여러 층을 깔고 있다. 어떤 것은 먹어도 되고, 어떤 것은 미끼처럼 깔아 놓은 부분이 있어서 관객에게 끊임없이 자기가 읽어 낸 것을 의심하게 만든다. 종교적인 개념이나 언어가 많이 쓰이고 있지만 그게 언제나 종교적인 의미로 쓰이는 건 아닐 수 있다. 표피로 깔리는 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영화에서 중요하게 보여 주는 것 말고 스쳐 지나가는 대목이 많다. 도대체 이 모든 살인 사건이 왜 일어났나? 기본적으로 깔리는 궁금증이다. 이를 풀어 가는 단순한 방법은 일종의 오컬트 영화로 보는 거다. 사람이 죽어 나가고 무당이나 사제가 나타나 대결한다. 오컬트로 보면 '곡성'은 비교적 단순한 구조로 흘러가는데 그건 아닌 것 같다. 이 모든 영적이고 종교적인 것들이 피상적인 껍데기일 수 있다.

모든 사실을 합리적인 수준에서 정리하면 독버섯 중독 사건이다. (사건 관계자) 대부분이 독버섯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돼 있다. 제일 먼저 죽었던 사람(살인 저질렀던 사람) 몸에서 (독버섯 성분이) 다량 검출됐다는 보고가 있었고, 딸(효진)이 발작하기 전에 병원에서 집에 와 한약을 한 사발 먹고 잠든다. 같이 일하던 경찰도 살인을 저질렀을 때 독버섯으로 만든 건강 보조 식품을 먹은 흔적이 있다. 독버섯과 관련된 환각 및 정신이상으로 사건이 해명되는 측면이 있다.

그 다음 흘낏흘낏 지나가는 중요한 포인트가 성 문제다. 첫 번째 사건은 경찰이 치정 사건이라 추정한다. 두 번째 며느리가 강간당하고 종구 딸은 성폭행당했다. 몸에 수포가 난 술집 작부는 매춘 문제가 걸린다. 대부분 사건에 성 문제가 깔려 있다. 이 부분은 거의 해명을 안 한다. 사람들이 광적인 방식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데 독버섯이라는 해명 가능한 지점이 있고, 성과 관련해 물고 물리는 관계가 밑바닥에 깔려 있다. 그 측면에서 사건이 상당 부분 해명된다.

사람들 눈을 가리는 게 '굿'이라는 매개다. 박춘배 좀비도 '굿'을 하고 죽었다. 경찰 딸도 굿으로 풀어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가 꼬인다는 생각이 든다. 쉽게 말하면 이런 거다. 마을에서 벌어진 치정, 성 관련 사건들을 현실 자체로 직시하지 못하고 귀신 들린 걸로 처리한다. 성 문제 피해자 여인들은 문제를 그 자체로 다루지 못한다. 언제나 귀신 들린 것으로 처리가 된다. 발언할 수 없는, 귀신 들린 '미친 여자' 취급을 받는다. 그걸 풀어 주는 매개가 굿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가 겪고 있는 상황과 오버랩되는 지점이다. 성·여성·동성애 등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지만 입에 올리지 못하는 사건이 광기와 더불어 돌출된다. 피해자가 피해자로서 발언할 수 없게 되는 사건들은 굿으로 개입할 때 광기와 결합한다. 피해자를 미친 사람이나 귀신 들린 것처럼 취급하는 양상이 전개될 수 있다.

전체 영화를 이 맥락에서 보면, '마을'이라는 멀쩡해 보이는 공동체가 은밀한 내부 사건을 적절히 다루지 못하고 미친 것, 귀신 들린 것으로 바꿔 낼 때 어떻게 악화되고, 광기 어린 양상으로 이어지는지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 양희송 대표는 '곡성'에 등장하는 종교적 상징을 액면 그대로 다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종교 이미지는 피상적인 껍데기일 수 있다는 것이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혐오'로 내재된 악 은폐하는 '가족주의'

- 기존 리뷰들과 다른 관점이다. 기독교계도 그렇고, 전체적인 리뷰를 보면 신앙적인 메타포에 집착한다.

양희송: 그렇다. 어떻게 연결될 수 있겠지만 종교적인 교훈을 주려고 사용한 것은 아니라 본다. 때로는 감추기 위해서, 때로는 드러내기 위해서 사용했다. 사람들이 그걸 못 읽어 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김종일: 다른 사람이 아닌 가족을 죽인다는 게 마을 문제의 핵심이다. 항상 가족이 죽는다. 가족주의를 보여 준 영화다. 주인공 종구도 공적인 경찰 일은 대충대충 하다가 자기 딸에게 문제가 일어나자 분연히 일어난다. 그때부터 종구는 경찰복 안 입고 나온다. 일광도 나이키 잠바, 종구도 잠바를 입고 나온다. 종구는 공권력이 아니라 아버지로 나온다.

영화는 가족에 대한 집착, 한국에 있는 가족주의를 드러낸다. 가족이 깨지면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다. 이웃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식구는 어떻게 이 재앙에서 피할 수 있을까에 몰두한다. 공동체 전체를 보지 못한다. 성 문제든 독버섯 문제든 마을 전체가 풀어내야 하는데, 그 역할을 못 한다. 종교 문제로 보일 때는 종교가 대응해야 하는데, 교회도 솔루션이 없다.

결국 자기 가족 문제다. 부제가 분연히 일어난 것도 삼촌이 그렇게 된 걸 보고서다. 십자가와 낫을 들고 일어난다. 그전까지는 무서워하고 벌벌 떤다. 한국 사회에 있는 가족에 대한 지나친 생각이 다 무너진 거다. 공동체가 무너진 거다.

▲ 종구는 자기 딸 효진에게 문제가 발생하자 경찰복을 벗고 분연히 일어난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양희송: 가족 중심으로 싸고 도는데, 파국이 가족에서 터져 나오는 게 중요한 포인트 같다. 그 대목과 짝을 맞추는 게 있다. 영화는 초반부터 외지인에게 모든 혐의를 넘긴다. 마을에 속하지 않는 누군가에게 책임을 다 넘긴다. 너무 순조로워서 이상할 정도로 모든 사람이 외지인에게 책임을 넘긴다. 한 명도 변호해 주지 않는다. 유일하게 가톨릭 신부가 옹호해 준다. 일본 대학교수, 스님이라고도 하고, 그냥 외지에서 온 한 사람일 뿐이라 말한다. 이 대목이 석연찮다.

모든 문제 근원을 외지인에게 넘겨서 마을에 내재한 죄와 악이 은폐된다. 나는 개인적으로 외지인은 끝까지 무죄라 본다. 마지막에 악마로 변하는 건 상징적으로 처리된 거라 생각한다. 무고한 외지인을 희생양으로 만들면서 공동체는 손쉽게 모든 일을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외지인은 공교롭게도 일본 사람이다. 빨간 눈에 고라니를 먹는 이야기, 누구를 겁탈했다는 이야기를 한다. 일본 '위안부'가 연상된다. 이 사람이 심상찮게 무속 의식을 하고 있는 걸 보여 준다. 그러면서도 영화 끝까지 이 사람에게 혐의를 확실히 물을 수 있는 증거를 안 보여 준다. 가족주의, 공동체주의로 폐쇄적인 마을에서 일본 사람은 너무나 쉽게 외지인으로 인식된다.

한국 사회에서는 타자인 외지인에게 손쉽게 혐오, 포비아, 공포를 씌운다. 타자가 우리에게 해를 가할지 모른다는 공포가 일목요연하게 드러난 영화다. 이 부분을 여러번 꼬아서, 관객들은 영화가 끝날 때도 "외지인이 나쁜 놈이야"라고 말한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외지인이나 타자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거다. 영화는 큰 질문을 던진다. 그 부분을 물어야 한다. 영화는 외지인에 대한 혐오와 포비아를 안고 극장을 나오도록 한다. 영화 자체가 열려 있는 구조다. 극장 밖이 다 영화 판이 된다.

김종일: 문제 원인이 바깥에 있더라도 조건이 안 갖춰지면 문제가 안 일어난다. 문제가 있을 때 스스로 맡은 자리에서 맞닥뜨리면 되는데 항상 바깥의 도움을 찾는다. 자기들이 해결하지 않고 (문제를) 영적인 부분, 우리 힘 바깥이라고 생각하고 굿을 한다. 주인공 경찰은, 공식적인 방법으로 해결이 안 되니까 폭력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이 마을은 결코 자체적으로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자기들 할 일을 잘못된 방식으로 풀어내려 하니까 일이 해결 안 되는 거다. 오늘날 한국교회도 그렇다. 이슬람·동성애 등 모든 문제를 바깥에서 찾는다. 바깥 문제라고 하면서 내놓는 것을 보면 대안도 아니고 설득력도 없고. 사안이 더 꼬인다. 곡성과 다를 바가 없다.

'미친 여자'와 '할매'의 대립에 담겨진 여성 문제

- '곡성' 자체가 미스터리, 스릴러, 오컬트라는 장르 특성을 극대화한 영화다 보니, 영화를 한 번 보고 메시지를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곡성'이 메시지 전달에 성공한 영화라고 보는가?

양희송: 평론가 중에도 그런 얘기를 하는 사람이 있다. 그 점에서 영화가 거칠다. 해명이 너무 많이 필요하다. 감독이 이렇게 인터뷰 많이 한 영화는 잘 없다. 감독 이야기만 믿거나, 감독 말로 때울 수도 없고. 찍어놓고 들어낸 장면이 너무 많다. 감독이 매끈하게 연출하고 찍은 영화는 아니다. 너무 많은 밑밥과 미끼를 뿌려 놔서 감독도 주체가 안 되는 방식으로 영화를 끝냈다고 볼 수도 있다.

영화에서 '할매'와 '미친 여자'가 등장한다. 불난 집에서 무명이 종구에게 이야기하는데, 며느리에게 제일 심하게 보복당한 존재가 할매다. 술집 작부를 데리고 무당 찾아간 사람도 할매고, 딸 효진이 발작할 때 굿하라고 하는 사람도 할매다. 옆집 할매한테 물어서 용한 무당 소개받는다고 말한다. 나중에 옆집 할매는 가위에 찔려서 병원에 간다. 할매들은 마을에서 모든 사건에 개입하는 존재다. 진실을 드러내는 방법이 아닌 상황을 악화시키는 방식으로 부정확하게 개입한다. 논리적 비약을 일삼는다.

▲ '곡성'에서 할매들은 상황을 악화시키는 방식으로 사건에 개입한다. 효진에게 문제의 증상이 발생하자 장모는 종구에게 용한 무당이 있다며, 굿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할매는 마을에 오래 살아온 존재다. 모든 사건에 '성'이라는 층위가 개입해 있는데, 할매는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으면서도 외면한다. 모호한 자리매김이다. 할매는 이 사안에 성범죄가 개입된다는 걸 알면서도 혹은 알기 때문에 이 사안을 귀신 들린 문제로 왜곡한다. 역사적으로는 피해자에 설 수가 있기 때문에 이 사안을 정면으로 보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바꾸려 한 것 같다. 매번 대안이 굿이다.

할매 반대편에는 미친 여자가 있다. 이들은 피해자다. 피해자 대부분이 며느리, 딸, 손녀다. 육체적인 피해를 당했지만 말할 수 없는 존재다. 미쳐버렸거나 귀신 들린 존재로 왜곡된다. 이중 가해다. 피해를 당했지만 미친 여자 아니면 귀신 들린 여자가 돼 버린다. 매번 경찰이나 가족에 억울함을 호소한다. 비 오는 날 경찰서에 알몸으로 나타나거나 방화 현장에서 경찰을 붙잡고 물어뜯는다.

공권력이나 정의 구현을 해야 하는 존재가 일을 수행하지 못하거나, 자기 억울한 사연들이 전달되지 않는 처지에 놓일 때 발악한다. 미친 여자들은 할매의 머리를 깨거나, 할매를 가위를 찌르는 것으로 복수한다. 미친 여자와 할매 사이에 대립 구도가 생긴다. 영화에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무명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리뷰가 있는데, 내가 보기에는 원혼 같다. 무명은 동네 흔한 바보 또는 미친 여자 모습으로 등장한다. 무명은 피해자 자리와 가장 가깝게 있는 원혼이다.

박춘배 야상, 술집 작부 가디건, 효진이의 머리핀. 피해자와 동일시되는 지점을 보여 준다. 미친 여자로 표상되는 피해자 목소리는 가장 가까운 할매들에 의해 마을 공동체에 발현되지 않는다. 틈을 메우려고 언제나 굿이 개입한다. 굿은 시각적으로 강렬한데, 마을 사람 전체와 관객을 현혹하는 세팅으로 작동한다. 교차편집하는데 나중 보면 전혀 딴 얘기다.

무당 일광이 영험한 사람으로, 문제 해결사로 등장한다. 일광이 알고 있던 상황도 제한적이고 오류가 있다. 처음부터 거짓말하는 것이 아니라면 일광은 일개 무당이다. 왜곡되기도 하고 교정되기도 한다. 굿 장면은 시각적 묘사를 보면 공들인 장면이지만 공동체 문제를 푸는 해결책은 아니다. 문제를 꼬이게 만든다. 굿의 결과로 살인이 난다. 부적절한 해결책을 도입해 놓고, 종교적인 열정이나 무속적인 방법으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그게 문제를 더 악화하고, 왜곡한다.

보는 것을 의심할 용기가 있는가

- 흥미로운 지적이다. '곡성'에 나오는 기독교적 모티프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영화 맨 처음에 누가복음 24장 도마의 의심을 다루는 구절이 등장한다. 맨 끝에 외지인이 똑같은 구절을 내뱉는다. 이 부분은 어떻게 보는가. 현혹하기 위한 장치인가, 메시지적인 측면이 있는가.

김종일: 도마는 죽음과 부활을 의심하는 존재로서 (질문을) 던진 것이다. '의심'이라는 게 포인트다. '소문'은 끊임없이 의심을 일으킨다. 소문이라는 단어가 영화에 많이 나온다. 소문의 진위를 따져 나가는 모든 개체가 자기 내면에 있는 문제를 풀어낼 수 있는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문제를 철저히 방기한다. 그러니까 문제가 더 꼬인다.

소문 때문에 자기들이 서로 꼬여 버린다. 외지인이나 무명, 무당은 직접 물리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외지인도 사람을 해친 적이 없다. 무명도 자기가 스스로 뭘 하지는 않는다. 그냥 말해 주고 마지막에 가지 말라고 한 번 붙잡을 뿐이다. 무당도 굿을 하는데 마을 사람들이 거기에 현혹돼 넘어간다.

'헛된 믿음'을 보여 주는 것 같다. 소문을 자기 방식으로 확인하려다가 스스로 무너져 버린다. 마지막 부제가 등장하는 동굴 장면에서도 그런 게 보인다. 우리가 생각하는 진리를 알아가는 방식이나 사안을 풀어 가려는 프로세스가 오히려 문제를 꼬이게 만드는 것 아닌가 생각했다.

▲ 김종일 목사는 부제와 외지인이 대면하는 장면을 두고, '헛된 믿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양희송: 영화 앞과 끝에 누가복음 구절이 나오는 것을 흥미롭게 봤다. '곡성'은 우리가 보는 것을 의심할 용기가 있는가, 혹은 들은 것을 거부할 용기가 있는가 질문을 던지는 것 같다. 도마는 부활한 예수님을 만났을 때, 못 믿고 만져 봐야겠다고 말한다. 그때 예수님이 "영은 몸이 없지만 나는 몸을 갖고 있다"고 답한다. 흥미로운 대화다. 관객들이, 영상으로 보여 준 '곡성' 전체 내용을 안 믿을 수 있겠냐는 질문에 계속 시달리게 만든다.

외지인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여러 장치로 보여 준다. 영화를 자세히 보면 그것도 등장인물들이 상상이나 충격 속에서 본 환상일 수도 있다. 제일 웃겼던 것은 건강원 주인이 증거가 있다면서 빈 냉장고를 보여 준다는 점이다. 기발한 장면이다. 우리가 확실하게 봤고, 경험했다는 사실을 입증할 증거는 냉장고가 비어 있다는 것밖에 없다.

아버지가 딸을 추궁하면서 "너 일본 사람 만난 적 있지?" 하니까 딸이 끄덕끄덕하고 미쳐 버린다. 여기서 딸의 유명한 대사가 나온다. "뭣이 중한디? 뭣이 중한지 알지도 못하면서." 영화 전체를 집약할 만한 대사 같다. 추궁한다고 생각하지만 진실은 다를 수 있다는 말이다. 종구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나서는데, 계속해서 자기가 모르는 것을 건드린다. 경찰로서 범인을 찾아야 하는데 말이다.

종구는 나중에 무명에게 "왜 나에게도 이런 일이 벌어지냐?"고 묻는데, 무명은 "네 딸의 애비가 무고한 사람을 의심하고 죽여서 그렇다"고 답한다. 무명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이렇다. 종구가 무고한 사람을 의심하고 죽였다. 그 대상이 외지인에게 간다. 종구는 경찰관(공권력)이라는, 냉정하게 진실을 규명하고 죄 있는 사람에게 죄를 물어야 할 입장에 있다. 그런데 누군가를 쉽게 의심하고, 그 사람을 죽였으니까 그 죄가 크다. 그래서 종구에게 일이 벌어진다는 말이다.

종구가 그 과정까지 오면서 여러 왜곡과 혼돈을 통과하지 못했다는 말이 된다. 마지막 장면에 종구 가족이 다 죽고 난 후, 종구가 피바다에 앉아서 이런 대사를 한다. "효진아, 괜찮아. 아빠 경찰이야. 아빠가 잘 해결할게." 이 사람이 실패한 모든 게 이 대사에 담겨 있다. 괜찮지도 않고, 경찰로서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고, 철저히 실패했는데도 뭘 실패했는지도 모른다. 무능한 공권력과 무능한 가장으로 남겨진 모습이다.

일본 사람이 종구 딸을 성추행한 게 사실이라면 종구가 다그치는 게 당연하다. 외지인은 거기에 일절 반응을 안 한다. 돌이켜 보니까 영화에서 일본 말을 하는 사람이 두 명이다. 부제하고 일본인. 효진이 만난 일본인이 누구일까. 또 다른 추리가 가능하다.

▲ 부제 양이삼. 외지인이 사용하는 일본어를 통역할 수 있는 영화 속 유일한 사람이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그러고 보면 이 부제는 굉장히 이상하다. 효진 아빠랑 처음 만날 때 눈도 못 마주치고 땀을 흘린다. 외지인 말을 통역하면서도 안절부절못하고 벌벌 떤다. 나중에 삼촌이 효진이 운동화를 찾아서 영화에서 보여 줄 때 카메라가 난데없이 백미러로 부제 얼굴을 두 번 잡는다. 뭔가 편치 않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내가 볼 때는, 일본 사람이 누구였느냐는 질문에 또 다른 종류의 추리가 가능하다. 그 추리에 부합하는 일정한 개연성을 영화가 보여 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외지인과 부제가 동굴에서 만나게 되는 이유가 진실이 과연 뭔지를 거기서 맞대면하기 때문이 아닐까.

외지인이 거기 있는지 어떻게 알았겠으며, 주고받는 대화를 봤을 때 부제가 뭘 믿고 동굴에 갔겠나. 내 추리의 개연성이 맞다면 외지인이 범행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것을 부제가 알기 때문에 간 것이다. ‘당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얘기해라. 나는 믿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자 한 게 아닐까. 진실과 맞부닥치는 대면(confrontation)으로 보인다.

외지인은 그걸 해명하려 하지 않고 "내가 말해도 믿지 않을 거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자기가 믿는 것을 보는 것이지, 보는 것을 믿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결국은 부제가 당신은 악마냐, 사람이냐고 묻는다. 그때 외지인은 손을 내밀면서 "영은 몸이 없지만 나는 몸이 있다"고 답한다. 자기가 사람이기도 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것을 못 받아들인다.

부제 시각에서 외지인은 악마로 변하는데, 진실은 자기가 믿는 바를 보게 된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 메시지를 충격적으로 표현했다. 그 장면을 보고 누가 외지인이 악마가 아니라고 볼 수 있을까. 외지인이 정말 인간이 맞다면 온갖 죄를 다 뒤집어쓴 희생양이 된다. 거기에 예수 이미지가 살짝 덧입혀질 수 있다.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으면 곧바로 악마가 된다. 이는 그가 실제 누구인가는 중요하지 않고, 그를 누구로 보느냐에 따라 바뀌게 되는 현상을 보여 준 거다.

마지막에 무명과 종구가 만나는 장면에서도 이 이야기를 한다. 사족으로, 무명이 덫을 놨을 때 닭이 세 번 울기 전에 종구가 집으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고 했다. 성경에서는 닭 한 번이다. 마가복음에 닭 두 번이라고 나온다. (성경에 나온 내용을) 있는 그대로 가져다 쓰지는 않는다.

마지막 장면은 내가 해석한 방식으로 본다면 누군가가 희생양이 되거나 악마가 되거나 하는 것은 사람들이 어떻게 보고 인정하느냐에 달린 것이라는 말이 된다. 부제는, 자기 죄를 인정할 때 그가 희생양이 돼 버리고 만다는 사실을 알고 진실과 만나는데, 끝까지 자기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 부분은 사실 알 수 없는 영역이다. 내가 죄인이 아니라면 상대가 악마여야 한다는 식으로 논리적인 완결성이 펼쳐진다.

외지인이 초연하고 관조적으로 비춰진 측면도 있다. 타자를 죄인이나 희생양으로 몰아넣고 말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진실은 마을에 있다. 진실을 보고 싶어하지 않으니까 희생양을 만들어서 그렇게 다 몰아간다. 그 결과, 종구가 아비로서도 경찰로서도 여전히 일이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고, 아무 해결책 없이 끝을 맞는 게 아닌가. 영화 자체는 뒤를 많이 터놓은 방식으로 마무리해서 제각각 해석하겠지만, 터놓은 부분이 너무 커 사회적으로 큰 질문을 던지는 거라고 본다.

▲ '곡성'의 등장인물들은 계속해서 외지인을 범인으로 지목한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우리 사회 모습 같다" 

- 나홍진 감독이 인터뷰한 내용을 보면, 감독은 '곡성'에서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고 말한다. 급작스럽고 우발스럽게 찾아오는 비극 앞에 신에게 "당신은 선입니까, 악입니까. 존재는 하시는 겁니까. 존재하신다면 왜 방관만 하십니까" 물어보고 싶었다는 것이다. 신정론적인 부분 같다. 여기서 메시지를 읽어 내거나, 기독교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대목이 있을까.

양희송: 신정론은 사실 신이 주도적으로 관여하고 개입해서 끌어갈 때 두드러진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를 보면, 인간들이 무지하고 왜곡된 방식으로 헤질러 놓은 게 많다. 신정론적 질문보다는 인간이 무지하고 어이없는 존재라는 생각이 압도적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

이 일이 왜 벌어졌는지 인간들 스스로 규명하지 못하니까 자꾸 초월적인 존재, 무속·신·원혼·굿·무당·영혼 등이 등장하는 것이다. 주인공은 끝까지 답을 못 얻고 영화를 보는 관객도 마찬가지다. 그 질문에 대해 그렇게 깔끔하게 포착하기는 쉽지 않겠다.

김종일: 신정론의 딜레마는 왜 악이 성행하냐.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왜 가만히 앉아 계시냐. 어거지로 절대자의 개입을 만들려고 조장하는 경우가 있고, 그렇지 않으면 신이 없다고 완전히 반대로 나가는 경우가 있다. 문제는 꼭 자기가 원하는 신의 모습을 끌어들이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 영화도 한편에서 영적인 존재를 끌어들인다. 그게 왜곡되어 나오니까 달라진다. 풀어내는 방식이 지극히 폭력적이다. 죽이고 복수하고 내쫓는데 해결이 안 된다. 국가, 공동체, 조직에서 내부 문제가 나와 원인을 찾을 때, 언제나 외지인을 끌어들인다. 욥기를 보면, 욥 친구들이 그렇다.

영화에 (여러 인물이) 대문에서 기웃거리는 장면이 나온다. 마지막에도 대문 들어서는 순간 재앙이 임하는 식으로 나온다. 종교학에서 문은 중요한 이미지다. 마을 안 문제를 그릇된 종교적 방법으로 해결하려 한다. 그게 안 풀어질 때 파국으로 간다. 우리 사회 모습 같다.

사회 안에서 문제가 팍팍 터지는데 합리적인 방법이 필요할 때가 있다. 세월호 문제만 봐도 합리적인 요구를 하는데 반응이 합리적이지 않다. 이단이 대한민국에 성행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교회가 영적인 문제를 공동체 내에서 건강하게 해결하지 못하니까 무당 일광 같은 인물이 나온다.

▲ 대문을 기웃거리는 박수무당 일광. ⓒ이십세기폭스코리아

- 나홍진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위로를 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영화에는 무기력하고 막대한 피해를 당하는데 어떻게 할 수 없는 인간이 등장한다. 종구가 아무리 노력해도 실패로 귀결된다. 이렇게 종구 같은 입장에 있는 피해자들에게 당신들 탓이 아니라고 위로하고 싶었다고 감독은 말한다. 이 영화 자체가 감독 말처럼 위로를 줄 수 있을까.

양희송: 위로라는 생각은 별로 안 든다. 한국 사회를 놓고 본다면, 한 사회가 내부에서 붕괴될 때 어떤 종류의 메카니즘이 작동하는지 읽어 나가는 장을 보여 준 것이 아닌가 싶다. 상황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직접적인 위로를 준다고 보기는 어렵고, 왜 이렇게 되는지 질문 던지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세계를 펼쳐 보여 준다.

위로보다는 이해의 차원이다. 두뇌 게임하듯이 영화를 만들었다. 1차적으로 얻는 건 머리로 납득하고 해명되는 경험이지 가슴으로 위로받는 경험은 아닌 것 같다.

'곡성'은 보면 안 되는 영화인가

- '곡성'을 두고 페이스북에 이런 글이 떠돈다. 혼합주의다, '가룟 유다' 같은 영화로 하나님을 삐딱하게 그려 낸다, 감독이 성령 훼방 죄를 짓고 있다는 이야기를 한다. 이런 관점을 염두에 둘 때, '곡성'을 어떻게 봐야 할까. 영화를 단지 영화로만 봐야 하나.

양희송: 종교적 상징이 많이 쓰였으니까 그런 반응이 나오는 건 당연하다. 초기 나왔던 평들 중 무명은 그리스도고 일광은 사탄이고 외지인은 악마라는 식으로 해설하고 하는 리뷰도 있었다. 영화 전체 내러티브를 너무 평면적으로 봤다. 상징을 이렇게 저렇게 읽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감독이 일부러 (영화를) 토막 냈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납득이 되게 내러티브를 꿰는 작업이 필요할 것 같다.

그걸 꿴다면 나름대로 기독교적인 맥락이 많은 걸로 읽을 수 있다. 소재를 무속으로 썼을 뿐, 이야기를 충분히 끌어갈 스토리 라인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다. 영화 자체를 오도된 종교관이나 무속 찬양으로 볼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표현에 혹하는 것은 영화가 얘기하는 것처럼 현혹된 것일 수 있다. 기독교인으로서 충분히 진지하게 살펴볼 스토리 라인이 있다고 본다.

김종일: '곡성'은 일차적인 내용 뒤에 복선과 중의적인 내용을 깔아 놓는다. 읽어 나가는 재미가 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서로 이야기하게 한다는 점에서는 잘 만들었다. 이 영화를 보고, 무슨 사탄 숭배 같은 이야기로 흐르는 것보다 목회자나 교회학교 교사로서 학생들과 토론해야 할 경우가 생긴다면 조금 더 깊이 얘기하면서 여러 가지 요소를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페이스북에 올라온 글을 보면, 훈계조로 '보면 안 된다'며 포비아적인 태도를 보여 준다. 한국교회가 갖고 있는 심각한 문제라고 본다. 일단 금을 그어줘야 안전하다고 본다. 그게 우리 미션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교육자들 미션은 이런 데 현혹되면 안 된다, 보면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쁘고 위험하고 불량한 거라고 하면 일반 은총에서 하나님이 주는 풍성함을 다 놓쳐 버린다. 이 땅에서 문화적으로 하나님 영광을 보여 줄 수 있는 자질과 달란트를 다 놓쳐 버린다.

일반 은총의 영역은 분명히 있다. 종교관이나 이미지가 좀 그럴 수 있지만, 분명히 건질 수 있는 교훈이 있다. 교회 안에서 토론하고 비판하고 해야 생각을 발전시킬 수 있다. 어떻게 신앙적으로 결론에 다다를 수 있는지 훈련해야 한다. 왜 선생이나 전도사가 답을 주나. 이 해석, 저 해석 나름대로 해석을 할 수 있다. 들어 보는 게 중요하다. 결론짓지 말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보지 말라고 하면 얼마 안 남은 청년과 중고등학생이 더 편협해지고 만다. 사고 지평을 넓히지 않고 답을 외부에서 찾으려 한다. 왜 답을 외부에서 찾나. 왜 목사님이 답을 줘야 하나. 목사님이 답 줄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자기들이 찾아 나서고 이야기를 나눴으면 좋겠다.

양희송: '곡성' 관객이 600만 명을 넘겼다. 600만 명에 안 들어가는 것으로 (기독교인으로서) 할 일 다 하는 건가. 나는 기존에 나왔던 리뷰가 만족스럽지 않았다. 던지는 질문이나 풀어내는 방식에서 내가 원하는 게 없었다.

어떻게 보면 기독교인이 던지는 질문에 따라 훨씬 풍성한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이 던질 수 없는 질문을 던질 수도 있다. 신정론부터, 신학적으로 훨씬 풍요로운 질문이 있을 수 있다. 영화 평을 할 수도 있다. 단지 안 보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드는 것은 아쉽다. 이미지에 현혹되지 않고, 무엇을 읽어 내느냐에 따라 재해석할 수도 있다. 그게 기독교인이 할 일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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