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대문호 괴테는 "지금 네 곁에 있는 사람, 네가 자주 가는 곳, 네가 읽은 책들이 너를 말해 준다"고 말했다. 우리의 사고방식과 개념, '세계관'은 성경에 의해서 형성되고 점검되어야 한다.

성경적 세계관은 학자나 지식인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하루하루 삶과 인생을 결정한다. 그리고 정치, 경제관이나 사회적 함의나 의식을 반영한다. 또한 세계시민(citizens of the world)으로서의 삶과 의식을 자유하게 하거나, 제약하거나 결정한다.

사람들은 지혜로운 사람이나 리더의 자질로 문제 인식능력과 문제 해결 능력을 꼽는다. 이러한 면에서 분석하자면 이제 설교나 신앙 서적, 세미나와 토론 현장, 일상에서 성경 진리와 다양한 이슈, 이데올로기, 정치적 적용 문제는 더 첨예화되어 가고, 그 간극만큼이나 교회 내 보수와 진보 논쟁은 더 중요하고 치열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이러한 와중에 성경적 관점이 기본적으로 확립되지 못하면 혼란을 초래하고, 교회 리더들과 공동체는 심각한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잘못하면 공동체가 분열되고, 본질이 왜곡되거나 변질되고, 영혼들에게 악한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그래서 복음 안에서 이념과 사상의 혼돈과 복잡성에 대응할 신앙 의식 변환을 위한 집단 지성과 새로운 도전이 요구된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엡 6:12)

이데올로기나 보수나 진보라는 정치적 진영 논리나 기준에 천착하고 사람을 평가하거나 규정한다면, 복음은 물론이고 한 영혼의 소중한 가치까지 훼손되고 만다. 결과적으로, 말과 행위로 판단 오류를 범할 수 있다. 그 단적인 예가 세월호 참사에 대한 대처를 두고도 보수와 진보 진영으로 나뉘면서 극단적인 대치를 보인 경우이다.

이는 현상적 접근이다. 보수와 진보라는 진영 논리와는 사실상 무관하다. 이 사건의 본질은 영혼들의 죽음과 피해, 가족들의 아픔과 분노이다. 그들에 대한 관심은 성경 진리의 실천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드러남이다.

오늘날 책은 대부분 인간의 욕망과 성공을 강조해야 잘 팔린다. 교회 공동체에서도 축복이나 사회적 성공을 강조한 책들이나 간증을 더 선호한다. 성경 진리에 입각한 하나님의 영광과 사랑이 아니라 돈, 명예, 권력, 쾌락, 맘몬이 지배적인 가치가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보수, 진보를 초월하셨다.

우리는 흔히 마르크스주의나 공산주의에만 유물론이 있다고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거대한 자본주의의 기저에도 강력한 유물론이 내재한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기독교도 서구 자본주의 토대에서 성장해 왔다. 그래서 크리스천들은 이데올로기나 정치적 관점을 분별하고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성경적 진리가 무엇인지. 정치, 사회적 리더라면 진정한 성경적 리더십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

교회의 보수나 진보 논쟁에서 예수님은 물론이고 신약성경 핵심 인물이었던 사도 바울도, 베드로도, 열두제자 모두 보수주의자거나 진보주의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한마디로 오직 예수주의자들이었다. 추구했던 이념은 하나님나라였다.

제자들의 정체성을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주의자'가 아닌 복음의 사람들이었다. 구약 선지자들도 특정 정치적 편향에 서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의 계시와 메시지만 전하고 선포했다. 굳이 규정하자면 하나님주의자였다.

한국교회가 복음의 원칙과 대사회적 관계에서 정체성과 영향력이 강화되고, 이러한 영향력으로 전도와 선교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모든 영역에서 대안을 세워야 하겠다. 하지만 무엇보다 우선순위는 교회 내 대립 구도인 보수‧진보 개념과 왜곡된 신학 사상을 정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의 창일한 중에서는 어찌하겠느냐." (렘 12:5)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다가 지쳐 낙심 가운데에 있었던 예레미야 선지자를 향한 말씀이다. 책망이기보다는 소망과 위로 메시지다. 신앙의 안전지대에서도 사명을 바르게 감당하기 어렵다. 헌데 어떻게 오늘날같이 힘든 위기의 시대를 헤쳐 나가겠는가, 하는 의미이다.

보수와 진보 아닌 진리와 비진리

정확한 신학적 개념은 이렇게 분류하고 대처할 수 있다. 교회 변혁, 세월호 참사, 동성애 문제, 모든 사안이나 이슈를 이해하고 대처하는 정확한 안목과 올바른 관점이다. 보수인지 진보인지 규정하지 않고, 성경에서 볼 때 진리인지 비 진리인지 분별하는 게 필요하다. 이러한 분석과 이해는 중요한 사안이나 환경을 지혜롭게 분별할 수 있는 역량이자 시각이다.

정통 기독교인가, 사이비 이단인가? 근본주의인가, 신정통주의인가, 오순절주의인가, 자유주의인가, 개혁주 신앙인가? 아니면 사이비 이단을 제외한 포괄적 의미에서 '복음주의'인가? 행위와 율법적 구원론인가, 믿음과 은혜적 구원론인가? 이러한 규정이 중요한 지침이 된다.

신학에 따른 실천적인 면에서 차이점은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이론과 교리를 중시하는 교조적 성격을 띠는가, 실천과 현장 참여 지향적인가? 전통 지향적인가, 미래 지향적인가? 모순과 불의인가, 변혁과 정의인가? 관념적인가, 실재적인가? 미시(micro)적 관점(개인, 가정)인가, 거시(macro)적 관점(사회, 국가)인가? 사실인가, 거짓인가? 옳은가, 그른가? 진정성인가, 허위적인가?

교단 간에도 신학적 특성이 존재한다. 거룩한 성부 하나님 관점을 강조한 장로교 교단의 전통, 성자 예수님의 지상적 실천을 강조한 기독교장로회,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강조한 오순절 신학이 있다. 그리고 칼 바르트를 중시한 예장통합과 이를 경계하는 예장합동, 예장고신이 있다. 그리고 성경의 비신화화를 바탕으로 한 자유주의 신학이 있다. 물론 이 스펙트럼을 단순하게 재단하기는 쉽지 않다. 대략적인 관점이다.

사역의 현장성에 있어서 교회 중심 사역인가, 선교 사역 중심인가? 기관 사역인가, 문서 사역인가, 매스컴 혹은 미디어 사역인가? 청년‧대학생 사역인가, NGO‧사회복지 사역인가? 이 같은 관점과 개념 정리가 중요한 기준이다.

이렇게 보면 기독계의 성경과 무관한 진보, 보수라는 이분법적인 관점은 의미가 없다. 개인 구원인가, 사회 구원인가? 무의미한 개념도 소멸된다. 개별 존재인 영혼을 구원하고 사람의 집합체인 사람들과 정치 사회를 변혁한다는 표현이 성경적이다. 이러한 모순은 자기 소멸을 통해서 연합과 일치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사람의 전통이나 지식, 이데올로기보다 성경 진리가 우위이며 최종 권위이다. 성경은 '진보'를 언급한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한다.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게 하라." (고전 4:15)

보수가 아닌 '수보'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수보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 (사 58:12)

성경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초극한 초이데올로기

성경 진리, 즉 복음은 천하보다 귀한 영혼의 존엄성과 고귀함을 말하나 우상화나 신격화가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 앞에 죄인 됨을 선언하고 강제하고 구속한다. 물질과 세상의 우상화나 신격화가 아니라 물질과 세상이 삼위 하나님께 통치와 다스림을 받아야 할 대상으로 선포하고 있다.

그래서 성경은 사회주의의 장점인 통제와 계획경제를 통한 분배와 평등의 사회체제, 그리고 자본주의의 장점인 개인의 창의성 존중과 자유와 민주적 질서와 시장경제 체제 가치를 종합하는 초월적 이념을 제시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성경 진리는 이 대립하고 충돌하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등 모든 이데올로기를 동시에 심판하고 지양시키고 조정하고 통합하는 '초이데올로기'이다.

우리는 보수와 진보라는 개념을 초월한 성경 진리로 세상을 이해해야 한다. 마태복음 25장에는 양과 염소의 비유가 있다. 주님이 사람들을 오른편과 왼편으로 나누고,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해 주었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혀 주었고, 병들었을 때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주여, 우리가 언제 주님께 그렇게 했습니까?"라고 묻자, 주님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바로 나에게 한 것이다.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받으라"고 말씀하셨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 (마 25:23)

이러한 관점에서 사상적 진보와는 현상적 접근은 비슷하나 본질적 차원은 다르다. 복음은 전인적 구원과 치유, 회복, 축복, 자유와 해방의 메시지이며 능력이다. 예수님은 소외되고 상처받고, 굶주리고, 영적으로 귀신에게 눌리고, 과부와 고아와 같은 영혼들과 세리와 창기와 같은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셨다.

이러한 치유, 전도, 교육이라는 3대 사역의 최대 수혜자가 기층 민중이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지만 특정 계급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지는 않으셨다. 천하 만민이 대상이었다. 그러므로 보수와 진보라는 협소한 틀로 복음을 축소해서는 안 된다. 복음은 전인적, 우주적인 진리이기 때문이다.

'복음주의'는 '보수'와 '진보'의 초월적 가치를 제시한다.

현재 한국 기독교계를 지배하는 허위 이데올로기나 진영 논리를 분별하고, 오늘날 교회에 투영된 이념과 사상적 관점을 재조명해야 한다. 이에 대한 사전적 의미와 학문적으로 해석하고, 성경적 대안과 지혜를 구해야 한다.

학자들이나 사람들이 많이 오해하는 표현이 있다. "민주주의의 반대는 공산주의이다." 이 말은 틀리다. 민주주의의 반대는 독재나 전제정치이다. 사회과학에서는 경제체제를 하부구조, 혹은 물적 토대라고 한다. 정치제도나 질서를 상부구조라고 한다.

소위 말한 우파는 하부구조는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를, 상부구조는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한다. 좌파는 하부 토대인 생산수단의 소유나 경제체제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로 계획경제나 통제경제를 이행하는 제도이고, 상부구조는 전체주의나 독재나 전제정치의 형태를 띠를 것을 말한다.

보수(conservative)란 오랜 전통이나 관습, 제도, 방법 등을 소중히 여겨 그대로 보존하여 지킴을 말한다. 이에는 도덕성과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검증된 정당성을 전제로 한다. 새로운 질서나 변화에 대처하는 사고나 행동 방식이 급격한 변화를 원하지 않는 태도를 말한다.

보수주의란 전통과 관습을 중히 여겨서 급격한 변하를 원치 않는 신념을 말한다. 반면에 진보는 역사 발전의 합법칙성에 따라 사회체제나 질서의 변화나 발전을 추구함을 말한다. 그래서 진보(liberal)는 기존 정치, 경제, 사회체제에 대항하면서 변혁을 통해 새롭게 바꾸려는 성향이나 태도를 말한다.

중도는 어떤 대립되는 사상의 중간에 있는 위치를 말한다. '보수-중도-진보'라는 정치적 성향의 스펙트럼에 따른 중도는 이념이나 지역감정 등에 구애받지 않고,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판단에 근거하는 정치적 성향이나 세력이다.

앞선 언급한 진보주의는 사회의 모순을 변화와 개혁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해결해 나가려는 사고방식이다. 그리고 인간의 정신문명 역사가 시간을 따라서 나아지고 발전한다고 하는 의식과 신념을 말한다.

보수와 진보를 규정할 경우 엄밀히 말해서 '주의'라 하기에는 개념이 부족하다. 보수와 진보의 내용은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으로 달라지며 시대 상황과 각 나라와 민족의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래서 그 표현상 '보수적', '진보적'이라는 규정이 적절하고 타당하다. '적', 즉 성향의 관점과 차이를 말하는 것이다.

우파와 좌파, 그리고 보수와 진보의 규정

이데올로기(독, Ideologie)는 사회집단에 있어서 사상, 행동, 생활 방법을 근본적으로 제약하고 있는 관념이나 신조의 체계, 역사적·사회적 입장을 반영한 사상과 의식의 체계이다. 그럼 보수와 진보, 우파와 좌파의 의미 규정을 이해하기로 한다. 이 기준은 제도, 체제, 사회구조에 대한 시각 차이에서 시작한다.

거시 담론으로 이데올로기적 관점에서 우파와 좌파로 구분된다. 그런데 보수나 진보는 가치나 지향, 행동양식이나 성격과 성향의 기준이다. 이 이데올로기에서는 보수나 진보는 이념의 적용이나 구분이 없다. 이 두 개의 구조에 모두 적용된다. 진보와 보수는 탈이데올로기적이다. 자유주의나 사회주의 자체에서도 과거나 전통, 기존 질서를 주장하는 것은 보수이다. 그리고 새로운 변화나 혁신을 주장하는 것은 진보이다.

진보와 보수는 선악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 시대나 격변기에 보수나 진보가 적절한 대처일 수도 반대로 시대의 변화에 따라서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무능과 유능의 기준이 내포될 수도 있다. 국가정책의 구체적 목표와 가치에 따라, 정책을 입안하고 결정하는 자들은 각 사안마다 국민을 위하고 사회적 가치를 우선하는 새로운 관점이 필요하다.

국가가 정한 헌법의 가치나 이념과 체제 내에서 허용할 수 있는 보수와 진보의 범위가 분명히 존재한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가 이를 부정한다는데 큰 문제가 있다. 바로 생산수단의 소유와 주체를 혁명을 통한 전복, 무산계급인 노동자들이 주인이 되는 '프롤레타리아 유혈혁명'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애국심은 국가 구성원들이 국가 공동체 생성과 유지, 공동 운명체로서 그 근원적 개념을 잠재적으로 인식하고 구성원 스스로의 존립과 평안을 위해 국가를 지키고 영위하고자 하는 사회심리적 상태로 볼 수 있다. 애국심의 근원은 건강한 '애국주의'나 자국 중심의 '민족주의' 내지는 심화된 '국가주의'이다.

정치철학적으로 보면 '사회계약설'이 내포되어 있다. 애국주의에 바탕을 둔 공존적 민족주의와 배타적 민족주의는 차이가 있다. 경제적인 질서나 정책에서 우파나 좌파는 일정한 선이 분명히 존재하나 보수와 진보라는 진영 논리 구분은 한계가 있다. 정책 집합의 효율과 결과적 측면에서 보통 '시장의 자율성'과 '정부의 규제나 통제'가 있다. 실패와 성공 기준은 결과가 입증하게 된다.

국가정책들과 사안에 대한 정치적 입장과 진영의 찬반 입장은 국익을 위해 개별적이고 구체적으로 논의되어 정책화라는 합리적 정당성을 갖춘 프로세스를 거친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지역적 편 가르기, 계급이나 계층 간 갈등을 조장하여 이해와 득실을 추구하려는 태도는 국가 사회 발전에 역기능적 요인이 된다.

보수와 진보의 국제정치와 대북 문제에 대한 관점

국제정치나 외교 안보적인 측면에서도 보수, 진보 구분이 가능하나 국익이라는 관점에서는 무의미하다. 외교적으로 국가 간 대화와 공시적 기구에 의한 경향은 기본적으로 '리버럴리즘'의 영역이다.

대치되는 개념으로서는 국제 질서와 현실을 전제로 한 힘의 논리를 외교의 주안점으로 삼는 '리얼리즘'이 있다. 대외적으로도 반미나 친미는 보수나 진보에 따라서 다르다. 부정적 의미의 사대주의나 숭미, 친일도 있다. 개인적 성향도 다르다.

북한에 대한 입장도 보수, 진보가 다르다. 북한에 총격을 요청한 사람들이 정당하고 보수적인가? 의문이다. 종북과 반종북 차이지, 보수와 진보의 차이 구분은 모호하다. 그래서 애국 보수라는 말은 언어 모순이다. 애국 진보도 정당하다. 아니 둘 다 아닐 수도 있다.

수준 높은 전통과 도덕성, 숭고한 가치를 지키자는 보수는 드물다. 자신들 기득권과 소유와 재산을 지키려는 이가 대부분이다. 그렇게 된다면 이들은 이익집단이나 패권주의에 불과하다. 진보도 자신들 이해 요구를 충족하기 위한 세력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자기모순이 내포되어 있기에 절대적인 보수도, 절대적인 진보도 없다.

다양한 이념이나 주장이 서로 보완적이고 유기적으로 작동하는 정치 질서가 건강하고 정상적인 국가 공동체이다. 건강치 못한 보수(reaction) 진영은 창조적 변화를 거부하고 세상을 조종하기 위해 세 가지 논리를 사용한다고 한다.

미국 경제학자 앨버트 허시먼의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웅진지식하우스)[원제; <The Rhetoric of Reaction>]에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정반대의 결과를 낳을 것이다"(역효과 명제, perversity), "그래 봐야 기존의 체계가 바뀌지 않을 것이다"(무용 명제, futility), "그렇게 하면 우리의 자유와 민주주의가 위태로워질 것이다"(위험 명제, jeopardy). 이 세 가지 명제로 현상 타파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무기력함을 유포한다는 것이다.

소셜 네트워크의 시대와 세계 변혁

"모든 것은 변한다"는 진리만큼은 절대 변하지 않는 진리인 것 같다. 지식 정보화 시대, 과학 문명의 발달과 함께 사회 문화, 커뮤니케이션 방법까지 획기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을 예측하지 못하거나 동참하지 못한다면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사고와 문화로 전락할 수 있다.

이미 소셜 네트워크 시대가 도래했다.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가 국가와 사회 변화를 주도하고 있다. 회원 개인이 자발적으로 작성한 글이나 사진, 속보로 뉴스 매체 기능까지도 감당하는 1인 미디어 시대이다.

정체된 정보 콘텐츠가 아니라 지식과 정보의 생산, 가공, 유통이 다이나믹하게 이루어진다. 특히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는 개인 간 대화나 정보 교류 차원을 넘어 사회, 국가 공동체의 정치 지형까지도 변화시키는 혁명의 도화선이 되기도 한다. 놀라운 피플 파워와 영향력을 갖고 있다.

과거 권위주의적인 사고와 수직적인 사회 체계의 해체를 가져오고, 네트워크로 사회 체계나 의식과 문화가 더욱 가속화되고 재편돼 갈 것으로 예측한다. 변화의 바람은 어디까지일까? 그 결과와 전망은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시대에 교회나 기독교 문화도 변화가 올 수밖에 없다.

인터넷상에서 모든 신앙 정보, 사회나 지식 정보의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소셜 미디어는 텍스트(성경), 컨텍스트(상황)과의 조화와 균형에서 중요한 도구로 새롭게 접근해 볼 의미가 있다. 사도 바울도 이 시대에 복음을 전한다면 책을 출간하고 더불어 아마 소셜 네트워크를 활용했을 것이다. 사회적으로도 21세기의 '체 게바라'는 소셜 네트워크라고 한다.

크리스천들은 모든 극단적인 사안이나 이슈에 대해 '숫자의 미학'을 적용하면 지혜롭게 대처할 수 있다. '전부 아니면 전무'(all or nothing)라는 사고를 초월한 원리이다. 이념의 스펙트럼도 1에서 10까지 다양한 관점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안에 따라 49:51의 원리나 90:10의 원리와 같이 유연하고 다양하게 적용하고 '다양성의 최적화'를 추구한다.

우리가 바라는 교회는 완벽하고 이상적인 교회가 아니다. 그런 완전한 교회는 이 땅에 없다. 다만 우리가 바라는 교회는 성경 진리에 기반한 상식적인 교회이다. 개인적으로 교회 개혁이라는 말보다는 교회 업그레이드, 콘텐츠 강화, 변혁이라는 말을 선호한다. 개혁 주체는 삼위 하나님이다. 나와 우리 모두는 이 개혁 대상이라는 관점이기 때문이다.

"겸손은 하나님에 대한 확신의 이면이다. 반면 교만은 자아에 대한 확신의 이면이다." - 존 베일리

복음주의(福音主義, evangelicalism)의 사상과 노선

세상 폭력에 맞서 교회 공동체가 사랑의 폭력을 제시한다면 급진적이다. 칼과 이성의 폭력 앞에서 신앙을 고백하고 죽음을 택한다면 급진적이다. 사회적 악인이 예수님을 믿고 사람이 변한다면 급진적이다. 노동자를 억압하고 착취한 기업인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서 회개하고 소유를, 주식을 노동자와 나눈다면 급진적이다.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사람은 다 여호와께 미움을 받느니라." (잠 17:15)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한다면 급진적이다. 제국의 폭력과 억압 가운데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평화를 전한다면 그야말로 급진적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죽음이 단번에 생명으로 변화되고 승화된 승리의 사건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것은 일시적 패배에 대한 전격적인 반전의 시각이고, 절망과 좌절에서 새로운 국면으로의 희망과 승리가 가능함을 믿는 신앙의 확증적인 사건이다. 예수님이 지상에서 보여 준 사람에 대한 최대의 사랑과 배려는 십자가 죽음이었다. 그래서 복음은 급진적이다. 가히 혁명적이다. 그래서 보수와 진보를 초극하는 진리이다.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사 1:16-17)

성경적 세계관은 복음에 대한 깊고 폭넓은 이해와 그리스도인의 문화적 사명에 대한 체계적 정립을 말한다. 복음주의(福音主義, evangelicalism)의 사상과 노선의 원칙적 관점은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성경을 축자적으로 이해하는 근본주의적 보수주의 노선이나 신학적 보편성을 근거로 삼는 사회철학적인 자유주의 신학과 급진적이거나 혁명적 진보주의와도 차별화한다. '복음주의'는 개혁주의 노선이나 오순절주의를 포괄한다. 성경 진리와 실천을 강조한다.

근본주의나 자유주의적 진보를 추구하는 이 양극단의 긴장 관계 중심에 있으면서 동시에 상호 비판적인 상관관계 속에서 양자를 비판적으로 견인하고 수렴하며 변증적인 종합을 추구하는 신학의 정체성을 지향한다. '복음'의 절대성을 견지하면서도 ‘실천’을 강조한다.

복음은 죄인과 죄악으로 왜곡된 세계 구조, 방향을 구속하고 변혁한다.

황준배 / 목사. <카리스마적 리더십>, <통일과 크리스천 리더십>, <기도와 크리스천 리더십>, <인생성공의 7대 비결>, <SQ영적지수> 저자. 출간 예정 저서로 <성경적 세계관으로 무장한 영적 전사-불멸의 스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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