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비록 현실적인 방식을 받아들인다는 비판을 듣더라도 변화의 가능성을 보여야 한다. 동시에 그리스도인들은 내가 주장했던 성적 순결을 포함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행위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포기하지 말고, 동성애자인 형제자매들이 그들의 영혼을 좀먹을지 모르는 분노, 병든 의지, 부정적인 감정이 무엇이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216쪽)

스탠리 J. 그랜츠 <환영과 거절 사이에서 – 동성애에 대한 복음주의의 응답>(새물결플러스)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동성애에 대한 복음주의 응답'이라는 부제에 걸맞게 이 책은 동성애자를 무조건 정죄하거나 비판하지는 않죠. 동성애가 심리학적 요인이든 생물학적인 요인이든, 성적 지향이 정적이든 동적이든 그들을 모두 주님의 사랑으로 품도록 하고 있죠.

그것은 인간에 관한 이해와 맞물려 있기도 합니다. 예전에는 하나의 규범적인 틀로 규정되었지만, 지금은 사회 변화와 맞물려 다양한 인간성을 지닌 사람들이 등장하고 있죠. 과거에는 '이성애'라고 따로 부르지 않아도 이해를 했지만, 지금은 '동성애'라는 말을 굳이 사용해야 하는 시대가 됐죠. 그만큼 인간에 관한 이해가 다변화되었고, 접근 방식도 다양화되고 있다는 뜻이죠.

그렇기에 교회는 하나님의 창조 섭리에 역행하지 않는 흐름 속에서 다양한 인간을 품고 수용해야 하죠. 그것은 동성애자나 성적 지향성에 놓여 있는 자들도 마찬가지죠. 다만 주님께서 간음한 여자에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 8:11)고 단호하게 명령했듯이, 교회는 어떤 유형이라도 악한 행위에 대해서는 지속적으로 거부하는 게 옳겠죠.

이 책을 읽고 있자니, 요즘 새벽 기도회 시간에 나누고 있는 욥기서가 떠오르네요. 욥은 '우스'(עוּץ) 곧 팔레스타인 북쪽에 위치한 아람(창 10:23)이나 팔레스타인 남쪽의 에돔(창 36:28)과 관련된 지역의 족장 시대 인물로 추정하죠.1) '미워하다', '혐오하다'는 뜻을 지닌 '욥'(אִיּוֹב)(창 36:33)도 본래 이름이기보다는 그 많던 재산 잃고, 자식들 다 잃고, 그 몸에 악창이 들끓고, 아내마저 반대편에 서고, 세 명의 친구들까지 정죄하는 환란과 괴로움 때문에 붙여진 '별칭'으로 보기도 하죠.

욥기서 기록자와 기록 시기에 관한 의견도 분분하죠. 어떤 이는 욥과 토론을 벌인 엘리후가 썼거나, 시리아 역본 모세오경 다음에 욥기서가 이어지는 걸 감안해 모세가 기록했을 것2)으로 추정하기도 하죠. 다른 이들은 에스겔서 언급(겔 14:14, 20)이나 '고난당하는 백성과 하나님의 침묵'을 주제로 생각할 때 포로기나 포로 후기의 인물로 생각하기도 하죠. 그런가 하면 고대 근동 메소포타미아 문학(Ludlul Bel Nemeqi)과 이집트 문학(The Admonitions of Ipu-wer)에도 욥기서와 비슷한 내용이 기록돼 있다고 하죠.3)

우선 1:1-2:10은 산문으로 기록돼 있는데 욥의 특징과 시험을 다루죠. 하나님과 사탄의 대화가 주를 이룹니다. 3:1-42:6은 시로 기록돼 있는데, 37장까지는 욥과 친구들이 나눈 대화가 중점을 이루는데 그들의 대답은 욥에게 불충분했죠. 적어도 38:1-42:6절까지 보여 준 하나님의 대답은 완벽하고 충분했죠. 그리고 42:7-17은 산문으로 기록돼 있는데, 욥의 고통이 해결되는 장면을 보여 주죠.4)

사람들 대부분은 욥기서를 그런 관점으로 이해하죠. '하나님의 자녀들은 까닭 없이도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가?', '의로운 백성이 왜 고통을 당해야 하나?', '당신의 백성에게 고통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인가?', '인간의 고통은 항상 인과응보식은 아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의 지혜를 뛰어넘는다', '고통은 소극적인 믿음을 적극적인 믿음에 직면토록 하고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에 눈뜨게 한다', '번영신학은 하나님의 은총의 계획 그 어디에도 없다'5)는 점들 말이죠.

그런데 욥의 세 친구들 곧 데만 사람 '엘리바스', 수아 사람 '빌닷', 그리고 나아마 사람 '소발'이 욥과 나눈 첫 번째 대화로(욥 4-14장) 전혀 다른 차원을 성찰케 됐습니다. 그들은 '공의로우신 하나님', 곧 '신정론'(Theodicy)에 대해 깊은 이해심을 갖추고 있었지만 인간에 대한 이해심은 결여돼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심은 대로 거두게 하는 분이지만 인간을 향한 긍휼과 자비를 거두지 않는 분이시죠.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심과 함께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들은 욥을 사랑과 긍휼로 품기보다는 기계적인 인과응보식 견해만 내비칠 뿐이었죠. 그것은 욥을 품거나 긍휼로 위로하고자 한 태도가 아니었죠. 오히려 정죄하고 비난하는 꼴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욥의 고통을 가중하는 일이요, 욥의 화를 돋우는 일이고, 궁극적으로 욥이 성찰할 수 있는 기회마저 막아서는 꼴이죠. 누군가 고통 속에 괴로워하거나 울고 있을 때는 그저 함께 괴로워하고 함께 우는 게(롬12:15) 상책일 때가 많죠.

열왕기하 4장에서 보여 준 엘리사 모습도 그랬죠. 하나님께서 수넴 여인에게 아들을 허락하셨는데, 그 아이가 자라다가 어느 날 머리가 아파 죽고 말았죠. 그녀는 엘리사를 만나고자 고통을 안고 수넴에서 갈멜산까지 24km 거리를 달려갔죠.

그때 엘리사는 사환 게하시에게 지팡이를 하나 주면서 그 아이 얼굴 위에 올려놓게 하죠. 물론 자신도 곧장 뒤따라갔죠. 그때 하나님께 먼저 기도하고 아이 위에 올라 엎드려 자기 입을 아이의 입에, 자기 눈을 아이의 눈에, 자기 손을 아이의 손에 대고 엎드렸죠. 그러자 몸이 따뜻했고 생명도 돌아왔죠. 그만큼 '차디찬 신앙의 잣대'만 들이대지 말고 '고통을 자기 몸으로 포갤 줄 아는 사랑과 긍휼함'으로 다가서야 한다는 자세를 보여 주는 일이지 않을까요?

만약 동성애자나 성적 지향에 있는 사람들이 그런 괴로움과 갈등 속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구한다면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앞의 책에서 일깨워 줬듯이, 욥의 세 친구들로 반면교사를 삼을 수 있었듯이, 크리스천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통해 인과응보식 잣대만 들이대며 정죄하고 비난만 해서는 안 되겠죠. 오히려 스탠리 J. 그랜츠 견해처럼, 엘리사의 마음과 자세처럼, 그들을 품는 자세가 필요치 않을까 싶습니다. 그들도 주님의 사랑 안에서 얼마든지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으니 말예요.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