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의 '400번의 구타'(Les 400 Coups, 1959)

'400번의 구타'가 무엇보다 프랑스 영화사에서 매우 의미 있는 작품임을 숙지하여야겠다. 영화사에서 고전과 현대를 가르는 분기점에 서 있는 작품이다. 다시 말해, 1895년 뤼미에르 형제에 의해 처음 상영된 영화가 세상에 안겨 준 충격이 어느 정도 가신 후, 영화는 다분히 관습적인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영화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이 관습적이었다는 말이다.

이야기를 전달하는 매체가 문자에서 영상으로 바뀌었을 뿐, 영화적인 특징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주로 미국 할리우드 영화 제작 방식을 답습하기에 바쁜 시대였다. 바로 이때, 일부 영화인들 사이에서 산업화되는 영화 제작 방식에 반기를 들고 영화 작가라는 개념을 굳히는 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주로 <카이에 뒤 시네마>라는 잡지를 중심으로 펼쳐졌다.

중심 인물은 앙드레 바쟁이며, 그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로 트뤼포를 포함해 클로드 샤브롤, 장 뤽 고다르, 에릭 로메르, 자크 리베트 등이 있었다. '400번의 구타'는 바로 새로운 영화 운동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의미에서 제작된 영화이다. 물론 누벨 바그의 첫 번째 작품으로 꼽히는 것은 샤브롤의 '미남 세르주'(1958)이다.

당시 새로운 영화 운동 맥락에서 볼 때 '400번의 구타'는 단순한 이야기를 전하는 것만이 아닌 트뢰포의 '작가로서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내용이 트뤼포를 담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자서전적인 내용이 없진 않다) 영화 제작 방식에서 트뤼포의 특징을 볼 수 있다는 말이다. 

▲ '400번의 구타'는 14살 앙뜨완 도이넬이라는 소년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좌충우돌 소년의 이야기

영화의 프랑스어 제목은 '야단법석 떨기'를 표현하는 관용구다. 이것은 사용하는 맥락에 따라 달리 이해된다. 말썽꾸러기 청소년 아이들에게 적용할 경우, 아이들은 400번 매질을 받아 비로소 어른이 된다는 뜻을 갖는다. 다른 관점에서는 운이 나쁜 일이 연달아 일어나 사람들을 매우 혼란스럽게 여겨지게 하는 일을 말한다. 영화는 바로 14살 앙뜨완 도이넬(장 피에르 레오)을 중심으로, 소년이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겪는 좌충우돌 경험을 이야기한다.

앙뜨완 도이넬에게 일어나는 우연적이면서도 불운한 일들은 앙뜨완 자신이 일으킨 일이기보다는 대체로 그를 바라보는 시선을 표현한다. 그의 부모조차도 이런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엄마는 그래도 앙뜨완을 돌보려고 애를 쓰지만, 의붓아버지는 별다른 애정을 보여 주지 않는다. 부모를 포함해 앙뜨완 주위 사람들의 정당하지 못한 시선은 단지 그들의 편견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어른들의 부정적인 시선은 앙뜨완의 행동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쳐, 앙뜨완은 일종의 생존을 위한 노력으로 그 나이 아이가 넘어가서는 안 되는 선들을 전혀 주저하지 않고 넘나들게 만든다. 그나마 그의 유일한 낙은 발자크가 쓴 글을 읽는 것과 영화를 보는 것이다. 

결정적인 사건은 아버지 회사에서 타자기를 훔친 일이다. 팔지 못했기 때문이지만, 나중에 물건을 돌려놓았고, 또 아직 청소년임에도 그는 매춘부나 다른 범죄자와 동일하게 여겨진다. 부모조차도 앙뜨완에 대한 책임 있는 보호가 어렵다며, 그를 소년 감호원으로 보내길 원한다. 결국 경찰은 부모의 바람에 따라 앙뜨완을 감호원으로 보낸다. 그러나 앙뜨완은 그곳에서 탈출한다.

트뤼포 감독은 비교적 긴 시간을 할애해 그가 도주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앙뜨완이 달리고 달려 결국 이른 곳은 그가 처음으로 보는 바닷가이다. 더 이상 나아갈 수 없고, 그렇다고 뒤돌아갈 수도 없는 바닷가에 서 있는 앙뜨완 모습을 보여 주면서 영화는 끝난다. 

▲ 앙뜨완은 아버지 회사에서 타자기를 훔치고, 감호원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아래는 바닷가에 서 있는 앙뜨완의 모습.

아이와 어른의 경계

'400번의 구타'에 관한 대화에서 빠짐없이 등장하는 마지막 장면은 새로운 경계에 서 있는 앙뜨완의 모습이다. 아이와 어른의 경계에서 갈등하는 모습을 상징하는 것 같다. 앞으로 앙뜨완은 어떤 모습으로 성장할까? 범죄인으로 살게 될 것인지, 아니면 더 이상 어른들 구속을 받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게 될 것인지는 관객의 상상에 맡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영화에서 분명하게 볼 수 있는 것은, 아이는 보호를 받아야 마땅한 존재이지만, 그것은 너무나 쉽게 구속의 모습을 띠고, 또 어른으로서 자유는 책임을 동반하는 일이지만, 그것은 너무나 쉽게 방종으로 미끄러진다는 사실이다.

앙뜨완은 비록 자기 행동이 어른들 보기에 화를 돋우기만 하고 책망을 불러일으키는 일이었지만, 그 전에 올바르게 판단받길 원했고 보호를 위장한 구속을 벗어나 책임 있는 양육과 자유를 받길 원했다. 자신을 편견으로 대하기보다 진지하게 바라보길 원했다. 이에 비해 아이들의 눈에 비친 어른들은 아이에 대한 책임 있는 양육 대신에 자기 자유를 즐길 뿐이며, 오직 부모의 권리만을 주장할 뿐이다.

앙뜨완이 감호원으로 보내진 것은 어른들 선택과 결정에 따른 일이라도 앙뜨완의 탈출은 책임을 구실로 구속하려는 어른들 시선에서 벗어나려는 의지 표현이며, 또한 바닷가에 서서 돌아보는 마지막 장면은 구속과 억압에서 벗어난 아이들이 직면한 현실에 갈등할 수밖에 없는 모습을 보여 준다.

아이들을 키울 때 책임감 있는 양육이 구속으로 변질되지 않아야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다. 양육 책임을 이유로 이뤄지는 구속은 정당화된다. 이것은 결국 아이들로 하여금 앞으로 나아가지도, 또 뒤로 돌아서지도 못하는 막다른 골목으로 인도할 뿐이다. 영화가 보여 주는 교육의 현실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이뤄지는 것에서 멀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들이 느끼는 한계 경험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아이들을 향한 편견과 왜곡된 시선은 오히려 아이들을 경계 밖으로 내몰 뿐이다. 만일 그들의 인격을 소중히 여기고, 무한한 가능성을 내다보며 편견을 벗어 버릴 수 있다면, 그들을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을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자녀를 양육하는 어른과 청소년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이 반드시 감상해야 할 영화라고 생각한다. 물론 청소년이 자기 성찰을 위해 감상한 후 토론의 시간을 갖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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