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의 출발은 중세 로마가톨릭 면죄부 판매를 부정한 데서 비롯되었죠. 아무리 많은 죄를 지어도 면죄부만 구입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그릇된 가르침을 반박한 데서부터 말이죠. 그로부터 '오직 믿음',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그런 믿음을 왜곡하여 마치 중세 면죄부처럼 가르치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마음 놓고 죄를 지으면서도 잠깐의 뉘우침이나 감상적인 흐느낌만 있으면 모든 죄가 사함 받았다고 믿게 하는 경향 말이죠. 그런 크리스천의 믿음은 뜬구름 잡는 믿음입니다. 회개를 값싼 회개로 전락케 하는 일이죠.

"그리스도인은 진공관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비신자들과 더불어 삶으로 여러 가지 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 다양한 상황 속에서도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해 더 나은 길을 찾아야 합니다. 이런 적용의 노력이 없으면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평가받아도 사회에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26쪽)

정요석의 <소요리문답, 삶을 읽다>(새물결플러스)에 나오는 내용이죠. 크리스천의 믿음이 예배당 안에서 끝나지 않고, 세상 밖으로 연결돼야 함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래서 장로교 개혁파 신학의 정수인 소요리문답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고 있는 것이죠. 딱딱할 것 같은 교리를 성경 전체적인 맥락에서 되짚어 주고, 세상의 삶과 연결하여 성찰케 하고 있죠.

"믿음이 자기의 죄와 비참을 깨닫고 자신의 무능력을 인정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라면, 회개는 이런 믿음의 상태를 겪으면서 혹은 겪은 후에 죄로부터 돌아서서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즉 회개에는 새로운 순종이라는 완전한 목적을 위한 노력이 포함됩니다." (346쪽)

회개는 그만큼 자기 죄를 깨닫고, 탄식하며, 죄로부터 돌아서서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죄를 벗어버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한 새로운 순종을 다짐하는 노력을 포함하는 일이죠. 그때 비로소 면죄부 판매와 같은 값싼 믿음에서 벗어나 신실한 하나님 언약 백성으로 도약할 수 있는 것이죠.

▲ <소요리문답, 삶을 읽다> / 정요석 지음 / 새물결플러스 펴냄 / 560쪽 / 2만 2,000원

이 내용을 읽을 무렵, 요즘 새벽에 살펴보고 있는 느헤미야서가 떠올랐습니다. 역대기서가 포로 귀환자들을 위한 설계도면이라면,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시공서와 같다고 할 수 있겠죠. 특별히 에스라서는 제1차와 제2차 포로 귀환자들의 활약상을, 느헤미야서는 제3차 포로 귀환자들의 활약상을 담고 있죠.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대왕을 들어 B.C. 605년 남왕국 유다를 공격케 했습니다. 제18대 왕 여호야김을 비롯한 고위 방백과 다니엘이 포로로 끌려갔죠. 그것이 제1차 포로 유수였죠. 바벨론의 제2차 공격은 B.C. 597년의 일이었고 그때 제19대 왕 여호야긴과 에스겔 등이 포로로 끌려갔죠. 제3차 공격은 B.C. 586년의 일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이 모두 무너졌고, 유다 하층민만 제외하고 마지막 왕 시드기야를 포함해 모두가 바벨론으로 끌려갔죠.

물론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들을 포기하지 않으셨죠. 다윗의 언약을 기억하사 페르시아 대왕 고레스를 감동시켜 70년 포로 기간이 끝나는 B.C 538년에 제1차 포로 귀환을 명령하죠. 그때 여호야긴의 후손인 스룹바벨 총독과 아론의 후손인 제사장 예수아를 필두로 총 4만 9,897명 곧 여자와 아이들까지 약 20만 명이 고국으로 돌아오죠.

1차 포로 귀환자들은 고레스 대왕의 칙령을 받들어 성전 재건에 최우선 목표를 삼았죠. 하지만 북쪽의 사마리아 사람들이 온갖 방해 공작을 펼쳤죠. 그로 인해 2년간 재건 공사가 중단됐는데, 원로 선지자 학개와 젊은 선지자 스가랴가 나서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독려했죠. 그때 용기를 낸 유다 방백들이 다리오 왕에게 조서를 써 선조 대왕의 칙령을 찾도록 했고,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다리오 왕은 신하들을 통해 악메다(Ecbatana) 궁성에서 그 문서를 발견하죠.

그로 인해 주춤했던 성전 재건은 신속히 진행되었고, 드디어 B.C. 515년 완공하게 되죠. 그때는 고레스 대왕이 칙령을 내린 날로부터 23년이 지난 기간이었습니다. B.C. 605년 바벨론의 첫 번째 침공으로부터 성전 재건의 지대를 놓기 시작한 B.C. 536년까지, 또 B.C. 586년 예루살렘 성전 파괴로부터 성전 재건이 완공된 B.C.515년까지 약 70년1)이 걸린 셈이죠.

제2차 포로 귀환은 1차 포로 귀환이 일어나고 80년이 지난 일이었죠. 고레스 대왕 사후 그 아들이자 폭군 캄비세스(Cambyses)의 통치를 지나 새로운 다리오(Darius I)의 통치,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Xerxes) 곧 왕후 에스더의 남편 아하수에로의 통치를 지나, 그 아들 아르타크세르크세스(Artaxerxes I)-오른손이 왼손보다 길어 '롱기마누스'(Longimanus)라 불린 아닥사스다 대왕- 통치 시기인 B.C. 458년의 일입니다. 총 1,754명 곧 여자와 아이들까지 8천 명에 달한 이들이 귀환했죠. 아론의 제16대손이자 학사 겸 제사장인 에스라가 인솔했고, 그는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로 유다 백성들의 심령을 재건할 사명을 부여받았죠.

하지만 그 홀로 사명을 완수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죠. 비록 예루살렘 성전은 재건됐어도 그 성읍에 누구 하나 살려고 하지 않았고, 그 성읍을 둘러싸고 있는 성벽과 성문조차 다 무너진 채 황폐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죠. 당연히 이방 세력들의 약탈은 계속됐고, 그들의 우상 문화와 성적 유혹도 끝없이 밀려들었죠. 그런 상황이었으니 어찌 에스라가 그 사명을 완수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와 같은 처참한 상황을 페르시아의 수산궁에 거주하던 느헤미야가 접하게 되죠. '주님을 기다린다'는 뜻을 지닌 포로 생활자 '하가랴' 슬하에서 태어난 느헤미야는 자기 고국의 일을 "동생 하나니"(느1:2)와 몇 사람들에게서 듣죠. 그러자 하나님께 금식하며 매달렸고, 급기야 아닥사스다 왕 앞에 술 맡은 관원으로 서게 되죠.

그때 자기 고국에 성벽을 세우고 돌아오겠다고 하면서, 강을 건널 출입증과 문짝을 만들 벌목 허가증을 요청하죠. 그래서 B.C. 445년 제3차 포로 귀환이 이뤄진 것이었죠. 이때는 2차 포로 귀환에서 13년이 지난 시점인데, 유다 총독이 된 느헤미야는 4만 2,000명2) 곧 여자와 아이들까지 18만여 명을 이끌고 예루살렘 땅을 밟게 된 것이었죠.

그로부터 3일간 휴식을 취한 느헤미야는 몇 몇 사람들과 함께 밤에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벽 잠행에 나섰죠. 그런 뒤 방백들을 불러 성벽 재건을 독려했는데, 모두가 협력하기로 뜻을 모으죠. 물론 성전 재건 때처럼 이번에도 방해 세력들이 나타났죠. 북쪽 사마리아 출신의 산발랏과 도비야 같은 이들이 유다 방백들과 정략적인 결혼을 해서 세를 규합하여 방해 공작을 펼쳤죠. 심지어 느헤미야를 죽이려고도(느6:14) 했죠. 하지만 느헤미야의 지도력과 방백들과 온 백성들의 조직적인 방어와 헌신으로 52일 만에(느6:15) 성벽을 완공했고3) 문짝까지 달았죠.

그때부터 느헤미야는 에스라와 함께 백성들의 심령을 재건하기 시작하죠. 학사 겸 제사장 에스라에게 율법 강독을 요청했고, 온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수문(Water Gate) 앞 광장(느8:1) 곧 기혼 샘물과 기드론 골짜기로 연결되는 그 광장 앞에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기 시작하죠. 백성들은 안식일과 절기는 물론이요, 첫 열매와 십일조도 드려 레위인의 삶을 보장할 것이고, 우상숭배와 성적 타락까지 차단할 것을 다짐하죠. 더욱이 황폐화된 예루살렘 성읍에 들어가 살겠다는 이들이(느9-11장) 많아지게 되었죠.

그렇게 12년간 유대 총독으로서 임무를 다한 느헤미야, 총독의 재임 시절 가난한 동족들의 형편 때문에 자기 녹봉도 제대로 받지 않은 그는, 아닥사스다 왕과 약조한 대로 B.C. 432년에 페르시아로 돌아가죠. 물론 그 뒤로도 다시금 예루살렘 땅을 밟은 적이 있는데, 그 역시 유다 백성들의 영적인 각성을 불러일으키기 위함이었죠.

이상과 같은 내용들을 공부하며 읽어 나갈 때 깊이 깨닫게 된 점이 있었죠.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백성들의 심령을 재건코자 한 일이 얼마나 힘든 것이었는지, 그 시절의 유다 백성들이 지닌 믿음이 무엇이었으며, 회개가 그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성찰케 된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은 온실 속 화초나, 뜬구름 잡는 격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회개란 모세의 율법 곧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근본적인 죄악을 머릿속에 생각하는 것이요, 감정적인 통곡의 행위, 그리고 이후로는 진정한 언약 백성답게 살겠다는 결단이 포함된 일이었죠. 그만큼 하나님 은혜를 값싼 은혜로 삼지 않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소요리문답, 삶을 읽다>에서 이야기하는 바도 그것이었습니다. 진공관 속에 그쳐 버릴 믿음조차도, 머릿속에 그리며 감정적인 통곡으로 끝내 버릴 회개조차도, 이 세상의 실제적인 삶의 장으로 연결해 나가야 한다는 것 말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믿음이자 신실한 회개라는 말이죠. 오늘날의 크리스천들이 '중세의 면죄부 같은 믿음'을 다시는 되풀이하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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