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약자를 위한 예배와 저항의 책 - 요한계시록> / 이병학 지음 / 새물결플러스 펴냄 / 542쪽 / 2만 2,000원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재림과 지구 종말에 대해 관심이 많죠. 요한계시록을 대할 때는 더욱 더 그 관심이 증폭됩니다. 요한계시록이 다가올 예수님의 재림과 그리스도인들의 들림받는 사건, 천년왕국, 백보좌 심판 그리고 새로운 하늘과 새 땅의 도래를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죠. 세대주의 종말론자들은 요한계시록의 '666'을 '바코드'로 또 '베리칩'으로 인식하게 만들고 있어 혼란을 더 가중시키고 있죠.

그러나 요한계시록을 기존의 천편일률적인 해석을 답습하지 않고, 구약과 유대 묵시 문학의 조명 아래서 새로운 의미를 규정하려는 책이 나왔습니다. 바꿔 말해 로마제국의 현실에 대한 요한계시록 저자의 인식과 그의 신학적 주장을 부각시키는 데 중점을 둔 것이죠. 이병학 교수의 <약자를 위한 예배와 저항의 책 – 요한계시록>(새물결플러스)이 바로 그것이죠.

"유대 묵시 문학은 무엇보다 구약성서의 예언 전통과 지혜 전통을 유산으로 물려받았다. 그것은 기원전 250년부터 기원후 100년까지 전성기를 누렸다. 이스라엘 민족이 여러 제국에게 억압받으면서도 자신들의 오랜 신앙 전통을 지키고자 제국의 통치자들과 충돌하며 그들에게 저항했을 때, 그들이 흘린 눈물과 피가 섞인 잉크로 자신들의 살던 실존의 무대 위에 기록한 문학이 유대 묵시 문학이다." (22쪽)

한마디로 요한계시록도 유대 묵시 문학에 포함된 편지라는 점입니다. 이 기준점을 놓치지 않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죠. 그래야만 요한계시록에 바르게 접근할 수 있고, 올곧게 해석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궁극적으로 이 책을 통해 말하는 바도 요한계시록이 미래에 도래할 '피안의 세계'만을 동경하라는 게 아니라, 지금 세계 도처에 일어나고 있는 황제숭배와 같은 제국주의적 신앙 요소에 대항하여 바른 신앙 세계를 구축하는 걸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A. 프롤로그(1:1-20)
   B. 소아시아의 상황과 일곱 교회들에 대한 환상(2:1-3:22)
       C. 현재의 역사와 일곱 봉인에 대한 환상(4:1-8:1)
           D. 일곱 나팔 환상과 새로운 출애굽(8:2-11:19)
               중심: 짐승들과 대결하는 교회와 예배(12:1-15:4)
           D'. 일곱 대접 환상과 새로운 출애굽(15:5-16:21)
       C'. 음녀 바벨론의 심판과 천년왕국 환상(17:1-20:6)
   B'. 마지막 심판과 미래의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환상(20:7-22:5)
A'. 에필로그(22:6-21)

이른바, 이 책 67쪽에 있는 요한계시록의 동심원적 구조를 밝혀 놓은 부분입니다. 이 구조는 요한계시록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가장 많이 취하는 것이라고 하죠. 이 구조의 특징은 기록된 내용을 연대기적인 순차적 발생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현재적 시간에 일어나고 있는 짐승들과 교회의 저항, 그 속에서 예배하는 모습을 다루고 있는 것이죠.

천년왕국 환상(계 20:1-6)도 실은 이 땅 위에서 이루어질 미래적인 현실이 아니라 이미 하늘에 세워진 현재적인 실재를 가리킨다고 하죠. 바꿔 말해 순교자와 죽은 성도들이 지금 천년왕국에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 땅에 임한 폭력과 억압과 불평등의 역사가 끝나는 그날에 하늘에 있는 천년왕국이 끝나고, 그 다음 마지막 심판이 일어나고(계 20:7-15), 새 예루살렘이 전개된다(계 21:1-22:5)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하늘에 살아 있는 자들과 아직 땅 위에 있는 산 자들이 서로 재회해서 영원히 함께 살게 된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666'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요? 게마트리아(gematria), 곧 고대인들이 그리스어나 히브리어의 알파벳 문자에 숫자값을 부여하여 표현한다는 이 방식에 따르면 '네로 황제'의 이름값이 666이 된다고 하죠. 문제는 다른 사람의 이름도 그런 방식으로 계산하면 충분히 666이 될 수 있다고 하죠.

그래서 이병학 교수가 주장하는 바는 666이 로마 제국주의를 상징하는 수라고 말합니다. 이른바 로마의 군사적 침략과 정치 경제적 억압 그리고 사회적 배제라는 죽음의 통치 구조 말이죠. 놀랍게도 그 숫자가 열왕기상 10장 14-15절과 역대하 9장 13-14절에 이미 기록돼 있는데, 솔로몬이 백성들에게 거둬들인 조세 징수 금액이 그 숫자라고 하죠. 그만큼 솔로몬 왕국의 화려함 이면에 백성들의 고혈을 짜낸 경제적 착취와 억압이 숨어 있다는 지적이죠.

그렇기에 14만 4,000명의 성도들. 곧 하늘에 살아 있는 순교자와 죽은 성도들이 하늘의 예배에서 부르는 새 노래를 듣고 배울 수 있는 '민감성을 가진 성도들'.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한 자들. 로마의 짐승 문화(우상 문화)에 자기 몸을 더럽히지 않는 '구별된 성도들'. 다시 말해,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악을 악이라고 분명하게 말하는 '흠 없는 자들'이 그런 로마의 제국주의 짐승 문화에 저항하며 승리할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지혜와 힘을 공급받는다고 하죠.

"요한계시록의 저자는 천년왕국 환상을 통해서 죽은 자들에 대한 역사적 기억을 보존하고 재현했다. 이 환상은 산 자들에게 죽은 자들의 증언과 저항을 기억하게 하고, 압제자들의 은폐된 폭력 행위와 대량 학살의 진실을 규명하게 하며, 압제자들에 의해서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는 기억의 문화를 건설할 것을 요구한다." (472쪽)

이것은 각 장 끝에 실려 있는 '살아 있는 메시지'로서 요한계시록의 메시지를 더 쉽게 이해하도록 하기 위한 삶의 현장성을 보여 주는 삽화라 할 수 있습니다. 이른바 초대교회가 천년왕국 속에 살고 있는 서머나 교회의 순교자 폴리캅을 기억하듯이, 오늘날 교회도 불의한 제국주의 사회에 맞서 저항하다 생명을 잃은 4·19 학생 혁명의 원혼들과 5·18 광주 항쟁의 민주화 투쟁 영혼들, 세월호의 여린 영혼들을 기억하는 것이 그들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일이자 진정으로 하나님나라를 이 땅에 일구는 희망의 원천이라고 말하죠.

혹시라도 요한계시록을 세대주의 관점으로 미래 세계에 도래할 피안의 세계를 동경하는 것으로 바라봤다면, 이제부터는 유대 묵시 문학적 관점에서 현실 세계의 문제로 이해했으면 합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도 황제숭배와 같은 제국주의적 신앙 요소에 대항해 '안디바'와 같은 신실한 신앙 세계를 구축했으면 합니다. 그런 선한 싸움을 싸우다 하늘나라의 천년왕국에 입성한다면, 어찌 주님께서 그들을 귀하게 맞아주지 않겠습니까?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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