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제 'Do you believe?'(믿습니까?)가 '신을 믿습니까?'로 번역되었다. 보통의 기독교인이라면 '하나님을 믿습니까?'라고 번역했을 텐데, '신을 믿습니까?'로 표기된 것은 교파와 교단마다 달리 번역하여 사용하기 때문은 아닐까. 가톨릭을 포함해 개신교 내에 '하느님'을 선호하는 교단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을 선호하는 교단도 있다.

▲ 영화 '신을 믿습니까?)'. 12명의 변화를 담은 전형적인 기독교 영화다.

개신교가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개역개정 성경에 '하나님'이라 표기되었음에도 굳이 '하느님'을 사용하는 데는 나름 정당한 근거가 있다. 어떤 것을 선택하든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지만, 표기에서 일치점에 이르지 못하다 보니 '신' 같은 비인격적이고 개념적인 말로 번역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 다소 씁쓸하다.

'신을 믿습니까?'는 전형적인 기독교 영화다. '세상 속 그리스도인과 삶의 변화'를 말한다. '신은 죽지 않았다 2'가 학교 내 신앙의 자유와 관련해 일어난 갈등과 법정 소송에 국한해 기독교인이 자기 정체성을 지키려고 할 때 직면하는 고난의 문제를 다루었다면, '신을 믿습니까?'는 비슷한 주제 의식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더 다양한 삶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미국과 한국 기독교인들이 신앙을 표현하는 방식이 서로 달라 다소 오버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장면이 있어 갸우뚱거리게 하지만, 영화의 핵심은 명확하다. 곧 오프닝 자막에서 인용된 야고보서 2장 26절이 시사하고 있듯이,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임을 경고한다. 긍정적으로 표현한다면, 신앙의 진정성은 십자가 정신의 실천과 삶의 변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는 말이다.

비록 기독교인을 겨냥해서 만들었다고 해도 믿지 않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을 정도로 쟁쟁한 배우들이 출연하였다. '600만 불의 사나이'로 잘 알려져 있는 리 메이저스는 선한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등장하고, '반지의 제왕'에서 샘 역할을 맡았던 숀 애스틴은 무신론적인 성향의 의사로 출연하였다. 사망진단을 받은 지 8분 후에 살아난다는 설정은 비현실적으로 보이지만, 세상 속 그리스도인에 대한 성찰을 위해 작지 않은 임팩트를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 '반지의 제왕'에서 샘으로 분했던 '숀 애스틴'이 무신론 성향을 보이는 의사로 출연했다.

참된 신앙은 '반응'하는 것

변화의 시작은 지나치는 만남에서 비롯하였고, 또 작았다. 십자가를 짊어지고 다니면서 전도하는 사람이 매튜 목사에게 다가와 예수를 믿는지, 십자가를 믿는지, 그 의미가 무엇인지 대답할 수 있는지 등 도발적인 질문을 던졌다. 매튜 목사는 거부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질문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고, 목사로서 나름대로 반응하면서 변화의 움직임은 시작된다.

곧 매튜 목사는 전도자의 질문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돌아보며 깊은 고민을 하였다. 그 결과, 설교할 때 성도의 믿음에서 십자가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묻고 또 선포하였다. 그의 감동적인 설교를 들은 성도들 역시 깊은 감동을 받고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나름대로 반응하며 실천에 옮기게 된다.

이런 연쇄적인 반응으로 공동체 안에서는 과거와는 다른 삶의 변화들이 일어나고 결국 기적에 가까운 일들을 경험하게 된다. 이로써 십자가 신앙이라는 것, 곧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확인한다.

▲ 극 중 변화의 시작이 되는 매튜 목사(테드 맥긴리).

영화는 한 사람의 목사로 시작한 변화의 물결을 보여 주기 위해 12명의 사람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들의 삶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또 이 변화를 위해 그들이 어떤 힘겨운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보여 준다. 다양한 삶의 자리에서 나타나는 변화들의 핵심을 정리한다면, 한편으로는 사죄의 경험과 회심과 믿음을 실천으로 옮기는 용기라고 볼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변화된 사람들에 감동을 받아 새롭게 믿음을 갖게 되는 일이다.

다시 말해, 죄를 짓고 살았던 사람은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회심의 경험을 한다. 옳은 일을 알면서도 마음의 부담감 때문에 실천하길 주저했던 사람들은 용기를 내어 실천함으로써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원수를 미워하는 대신에 사랑을 베푼다. 과거의 잘못된 행위 때문에 죄책감에 시달려 삶의 의욕을 갖지 못한 사람은 사죄의 은혜를 경험하면서 삶의 용기를 새롭게 갖게 된다.

그동안 삶에서 이해할 수 없는 힘겨운 일을 겪으면서 신앙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은 신앙 때문에 선하게 변화된 사람들을 보고, 또 그들이 베푼 선행과 희생에 감동을 받아 새롭게 믿음을 갖는다.

말씀 실천에 용기를 낼 때 변화가 일어난다

영화에서 내용적으로 주목해야 할 부분은 크게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하나는 변화가 한 길거리 전도자의 도발적인 질문에 매튜 목사가 진지하게 반응을 보인 것으로 시작했다는 점이다. 자신이 목사임을 밝혔음에도 길거리 전도 대상이 된다면, 목사로서 맘이 불편했을 텐데도 그는 오히려 진지하게 반응했다. 그 결과, 매튜 목사는 십자가 신앙을 새롭게 생각할 수 있었고 더욱 깊은 깨달음에 이를 수 있었다.

그의 깨달음은 설교로 이어졌는데, 십자가 복음이 단지 말이 아니라 삶으로 드러나야 하는 것임을 담대하게 선포할 수 있었다. 변화는 목사가 스스로를 점검하는 순간부터 시작했다고 말하려는 의도는 아니겠지만, 사실적으로 볼 때 전혀 무관하진 않을 것 같다. 잘 알려진 말 가운데는 "목사가 죽어야 교회가 산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다른 하나는, 설교를 듣고 성도들이 진지한 반응으로 삶의 자리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용기다. 다른 사람의 문제로 보지 않았고, 자신에게 일어나야 할 일들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변화를 위한 용기에는 언제나 지불해야 할 대가들이 있었다.

현대사회에서 십자가 정신을 행동으로 옮기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럼에도 결코 포기하지 않았을 때, 그들의 용기는 그들을 만난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말씀의 실천을 위해 지불해야 할 것들과 관련해서 결코 두려워하지 않고 용기를 냈을 때 변화가 일어났음을 강조한다. 이것이 영화의 핵심이다.

▲ 십자가 복음은 단지 말이 아니라 삶으로 드러나야 한다. 극 중 길거리 전도자의 모습.

한편 선한 행위와 믿음의 실천을 강조할 때마다 구원에서 믿음과 행위의 역할 문제가 등장한다. 행위를 강조하여 말할 때마다, 믿음의 역할을 묻는 질문들이 많이 생길 수밖에 없다. '신을 믿습니까'도 논쟁의 여지가 있는 행위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도 믿음과 행위의 상관관계를 묻는 질문으로 빠지지 않는다.

다만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를 물으면서, 나의 유익이 아니라 타인의 유익을 위한 삶이 중요하고, 또 삶의 변화가 다른 사람들이 믿음을 갖는 데 중요한 동기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에 집중했다. 이는 매우 현명한 전략이라고 생각한다. 불필요한 논쟁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영화를 보면서 누구도 행위 구원 문제를 고민하지 않을 것이다.

기독교인은 그리스도를 세상 가운데 드러내도록 부름받은 자

그 대신에 영화 내용을 관통하고 있는 신학적 주제는 하나님의 섭리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읽을 수 있는 사도 바울의 말을 빌려 말한다면, 인간은 결코 전체의 그림을 볼 수 없다. 보는 것은 다만 부분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은 지성으로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일 때문에 고통을 겪고 하나님을 의심하며 신앙을 떠난다. 심지어 적대적으로 바뀌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우리 각자는 작품 속의 한 부분을 감당하고 있어서 개별적으로 보면 아무 의미가 없는 듯이 보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없으면 온전한 작품이 되지 않는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되는 날은 마지막 날이다.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날, 인간은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을 알게 되고, 그것으로 겪은 고통에 대해 위로를 받으며,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깨달을 것이다.

그날에 인간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니 이것을 믿고 비록 지금은 이해할 수 없다 해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을 결코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신앙임을 영화는 강조한다.

▲ 범죄를 저지르면서 일탈 행동을 하던 청년 '피비', 그의 앞에는 어떤 삶이 기다리고 있을까.

영화는 이런 신학적인 성찰을 시각적으로 보여 주려고 서로 다른 삶의 영역에 속해 있으며, 또 서로 다른 문제에 직면한 12명의 인물들을 등장시켰고, 마지막에는 모두에게 일어난 사건이 하나의 그림으로 완성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상처 난 관계가 회복되고, 믿음이 갱신되고, 새로운 믿음을 갖게 되는 일들을 보여 주었다. 신학적인 주제를 영화적으로 시각화했다는 점에서 뛰어난 연출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들어 기독교 영화 르네상스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런 경향은 특히 미국에서 더욱 분명하다. 여기에 어떤 시대적인 이유가 있을까? 단지 영상 문화의 중요성을 인지한 결과일까, 아니면 시대적인 도전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나는 현상일까? 기독교 신앙을 문화의 뿌리로 두고 있는 미국은 최근 들어 종교의 자유와 인권 문제를 반영하여 법을 제정하였는데, 누구든 자신의 신앙을 공적인 영역에서 드러낼 수 없도록 규정하였다.

심지어 동성애 결혼을 인정하는 법도 통과될 정도로 미국의 기독교 신앙은 다방면에서 오는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 신앙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신앙으로 박해받는 상황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사회적인 입지가 좁아진 현실에서 기독교인은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지켜 낼 수 있을까?

기독교 영화에 대한 높은 관심은 영상 문화 시대를 반영하지만, 시대적인 도전에 따른 하나의 반응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도전받고 있는 기독교 신앙을 나타내면서도 신앙이 선한 삶에 미치는 효력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밝힐 필요가 있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를 계기로,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는 한국 기독교의 과제는 무엇인지를 깊이 고민해 보면 좋을 것 같다.

기독교인은 십자가 복음을 실천으로 옮기는 삶으로 그리스도를 세상 가운데 드러내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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