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리더의 역할은 한 시대가 길을 잃었을 때 길을 보여 주는 것이다. 길은 크게 나누어, 세 가지 뜻으로 정리할 수 있다. △교통수단으로서의 길 △방도를 나타내는 길 △행위 규범으로서의 길이다.

예수님께서도 길을 보여 주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

한국교회의 신앙적 지형이나 전망을 보면, 일반적으로 성경적 가치보다 세(勢)가 우선이다. 그래서 가치와 세가 충돌하면 세력과 규모가 우선이며 유리하고, 그 정당성을 획득한다. 목적과 수단에서 진리와 공정함과 정당성 여부는 소홀히 여긴다. 결과적이고 가시적인 성공이 지상의 은혜이고, 축복이라는 관념이 세상은 물론이거니와 이미 교회를 지배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의 원칙들을 현실적으로 적용하거나 실현하기가 쉽지 않다.

일반은총 영역에서 얻는 부와 권력, 명예가 특별은총 영역보다 우선시하는 교회의 문화가 지배적인 것이 사실이다. 심하게 표현하자면 사순절 기간을 제외하고는 현실적 축복이 우월적이며 대세다. 사회적 현실은 약육강식, 결과 제일주의, 승자 독식 사회의 문화다.

이러한 면에서 고착화된 기복신앙과 번영신학, 교회의 외형적 성장 추구의 구도는 현 한국 기독교의 구조적 자기모순이며 성경 진리에 반역하는 죄악이라는 생각이 든다. 대다수 크리스천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교회의 지배적인 문화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게 된다. 이러한 사고에 물들고 포로가 되거나 규정된다. 사역자들이나 크리스천들, 나 또한 예외일 수 없다.

좌표를 잃고 세상 가운데서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교회, 이 사실은 모두가 인정할 것이다. "혼란한 때일수록 원칙으로 돌아가라"는 말이 있다. 교회와 크리스천들이 가야 할 길, 그 원칙은 갈릴리 예수님의 길이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사역과 활동을 했던 대표적인 지역은 바로 갈릴리와 예루살렘이었다. 사역의 시작은 갈릴리에서였고 사역의 마침은 예루살렘이었다.

예수 공동체, 지배 체제와 중심 가치 체계를 해체하고 전복

이스라엘은 역사적으로 외세의 침탈과 제국주의 질서 가운데 오랜 식민지를 겪은 약소국가였다. 예수님이 오시기 직전에 잠시 외세로부터 벗어난 적도 있었다. 주전 323년은 역사에서 큰 획을 그은 해였다. 알렉산더 대왕이 33세의 나이로 요절한 것이다. 이스라엘 주변 국가의 질서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마카비 혁명'은 주전 167년 유다 지역의 작은 마을 모디인(Modiin)에서 시작된 유대인 저항운동이다. 지도자는 마타디아의 다섯 아들 중에 '유다'였다. 그의 별명은 '쇠망치'라는 뜻의 '마카비'(Maccabee)였다. 3년간 투쟁 끝에 '유다 마카비'가 이끄는 혁명군은 마침내 예루살렘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셀레우코스 왕가는 예루살렘성전 관할권을 유대인들에게 이양해 주었고 이로써 마카비 혁명은 일단 목적을 달성했다. 유대인들은 이날을 '하누카'(Hanukkah) 절기로 지켜 오고 있다. 성전을 '봉헌'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마카비와 그의 형제들은 더 큰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유대인들의 정치적 해방이었다. 이 질서도 잠시였고 로마의 침략과 지배로 이어진다.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할 당시 이스라엘의 정치적, 종교적, 경제적 상황은 참으로 비참했다. 국가적으로는 로마제국 식민지였고, 내부적으로 백성들은 그 시대의 3중 권력인 로마제국, 헤롯의 대리 권력, 종교 권력으로부터 고통과 억압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을 외세의 압제와 종교적 억압과 불의한 사회구조로부터 구원할 메시아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로마로부터 독립하고, 유대 종교의 착취로부터 해방되기를 간절히 염원했다. 이때 예수님이 등장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메시지는 과격했다. 기존 질서나 체제를 뒤흔든 파괴력이 있었다. 당시 기득권층인 제사장, 서기관, 율법사 들을 강하게 책망했다. 극단적으로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외쳤다. 이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다. 율법의 고정화, 형식화에 치우친 두려움의 발로였다. 이들은 당시의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예수는 자기를 유대인의 왕이라고 선전하며, 로마에 대해 모반을 계획하고 있다"고 고소하였다.

유대 제사장들은 종교 권력을 악용해 세속 권력까지 장악하려고 한 것이다. 안정 국면을 원했던 빌라도는 그 요구와 압력에 따르게 되었다. 그것이 십자가 처형이었다. 로마 정권에 결탁한 유대인 대제사장 가야바와 바리새파 사람들이 정치적 부담 없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민 결과다. 결국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깨닫지 못했던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예수 공동체는 로마 권력과 결탁한 유대인들과 관제 종교에 저항한 것만도 아니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충실히 따랐고 그 사명을 다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사랑의 교회 공동체를 만들고 세우는 데 헌신하고 희생했다. 예수님의 복음과 하나님나라의 선포, 치유, 교육, 전도의 사역은 군중을 따르게 했다. 기존 종교 질서와 구도를 무너뜨린 변혁이었다. 지배 체제와 중심 가치 체계를 해체하고 전복한 것이다. 새로운 질서의 도래를 선포한 혁명이었다.

예수님과 천국 복음을 만난 백성들은 생활 주변의 모든 환경과 사물의 의미가 하나님나라 운동 속에서 다시 규정되었고, 이전과 다른 뜻을 지니게 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결과적으로 불가피하게도 로마와 유대교의 권력자들을 강력한 적으로 만들게 되었다. 예수님은 결국 대적들에 의해 처형당하는 고통을 맞이하게 된다.

예수님은 로마 지배 세력이나 당시의 종교 권력에 굴복하지 않았고 담대하게 사명을 다했다. 예수님의 재판의 죄목은 신성모독, 반란죄였다. 기존 종교 질서와 정치 질서를 위협하는 소요를 일으킨 선동죄였다.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는 것을 스스로 정당화하기 위하여 부여한 죄명은 '신성모독'이었다.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주장하는 종교적 문제였다.

하나님을 인간과 극단적으로 구분하는 유대인들에게는 수용할 수 없는 새로운 질서였다. 그리고 '유대인의 왕'이라는, 로마의 통치에 반기를 든 정치적 문제였다. 신성모독이라는 죄명으로는 사형에 처할 수 없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속국으로 로마법을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예수님은 정치적 죄명으로 처형당했다.

예수님 시대에는 로마의 폭정에 대한 피침략 전쟁과 강점에 대한 반제국주의 이념이나 저항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규정하지는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전체주의를 타파하고 기존 기득권 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한 대안적 수단이 아니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다윗의 후손으로 와서 로마로부터 민족을 구해 줄 강력한 왕 같은 메시아를 기다려 온 것이다.

그러나 영적으로 어두워서 예수님을 그러한 존재로 생각하기도 했다. 기대와는 정반대로 죄수의 모습으로 십자가에서 모욕과 수치스러운 처형을 당했다. 정치적 메시아를 대망한 이스라엘 백성과 제자들에게는 너무나 큰 실망이고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 1:18)

예수님의 메시지와 선포는 대안 질서가 아니라 새로운 하나님나라의 도래와 실현이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요 18:36)

예수님의 언어적 행위와 실천적 행동이 당시의 기득권자들의 체제와 지배 이데올로기를 뒤흔든 결과였다. 유대교 지도자는 그가 "모세의 율법을 훼손하고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칭한다"하여 그를 신성모독죄로 고발하였다. 초기에 종교적 범죄에 대한 유대인의 고발이 발단인데 반역죄에 대한 정치적 고발로 전환되었다. 상황이 더 악화된 것이다. 유대의 종교 권력자들과 로마인 권력자들이 사악한 목적으로 결탁하게 되었고, 모두가 연루되었다.

로마 총독부는 병자를 고치고 많은 기적을 행함으로써 많은 무리가 따르는 그를 치안을 어지럽게 하는 소란 행위로 규정하였다. 그런데 예수님을 직접 심문한 로마 총독 빌라도가 조사를 해도 특별한 혐의점을 찾지는 못했다. 무혐의였다. 그래서 사면하려고 하자 종교 권력자와 이에 선동당한 군중은 폭동을 일으킬 기세로 예수님의 처형을 요구한다. 예수님을 두려워한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파멸시키려고 음모를 꾸민 것이다.

예수님의 이전 활동 중심지는 갈릴리 호수를 중심으로 한 유대 마을이었으며, 주변의 그리스, 로마의 도시에는 드나들지 않았다. 예루살렘에는 유대인의 관습에 따라 절기에 몇 차례 올라간 적이 있으나, 대부분 유의미한 여행은 없었다고 본다. 이러한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은 기원후 약 30년경 유월절 축제 때에 예루살렘에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성전 모독죄로 체포, 고소당하여 로마의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졌으며, 곧 사형에 처해진다.

위인이나 영웅들의 위대함은 전쟁과 권력과 폭력에 맞서는 고난의 길에서 형성되는 최고 인격에서 오는 것일 가능성이 있다. 마태는 예수가 나사렛에서 성장한 것을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마 2:23)라고 했지만, 구약성경에서는 이런 기록을 발견할 수 없다.

나사렛은 사방이 야산으로 둘러싸인 해발 380미터의 높은 분지인데 다른 도시나 마을과 교류가 거의 없는 아주 한적한 곳이다.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조롱하기 위해 십자가 위에 붙인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란 팻말에서 대제사장과 장로들도 그를 단순히 나사렛 사람으로 여겼음을 알게 된다(요 19:19).

'나사렛 예수', 경멸과 멸시받은 척박한 지역 태생

'나사렛 예수', 나사렛(Nazareth)은 이스라엘 갈릴리 고지의 남부에 있는 도시이다. 성모 마리아가 천사 가브리엘의 축복을 받고 예수를 잉태한 곳이며, 그 자리에 성 수태고지 바실리카가 자리하는 마을로 현재는 이스라엘 내 아랍인 마을이다. 성경에는 예수님의 부모님, 둘이 정혼(결혼)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되어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당시 역사적 배경을 보면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전국에 영을 내려 호적을 하게 하였다. 팔레스틴은 당시에 헤롯의 지배하에 있었으므로 예수 그리스도도 이 명령에 좇아 호적하는 것에 응해야만 했었다. 그런데 유대에서는 호적을 각 세대주가 현주소에 하지 않고 본적지인 고향에 가서 해야 한다는 유대적인 방법을 채택했다.

그렇기 때문에 요셉은 다윗의 출신지인 베들레헴으로 가게 되었다. 마리아도 함께 갔다. 그런데 도착하고 보니 손님이 많아서 방을 구할 수가 없었다. 이런 환경에서 인구조사를 위해 예루살렘으로 이동 중 유대 '베들레헴', 어느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으며 이후 갈릴리 호수 근처 나사렛이라는 동네에서 자라나신 것이다.

태어나자 곧바로 헤롯의 박해를 피해 이집트로 피신했다. 12세 소년 예수는 예루살렘에서 '내 아버지의 집'을 발견했다. 그는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나갔고, 갈릴리 마을과 도시를 다니며 병자를 고쳤고 천국 복음을 전파했다. 이어 예수님은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고 또 귀신들을 내쫓으셨다. 회당은 유대인들의 종교 집회 장소로 예배, 율법, 교육, 재판, 장례 등을 행하는 장소로 이용됐다.

예수님은 나중에 나사렛 고향을 방문하셨을 때 고향에서 환영을 받기는 했지만 존경을 받지는 못했다.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마 13:57)

베들레헴(Bethleham)에서 태어났고 가족들과 함께 갈릴리(Galilee)의 나사렛(Nazareth)에 거주한 예수님은 30세경부터 33세까지 구세주로서 사역을 전개한다.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사람의 이름 앞에 아버지의 이름이나 동네 이름을 붙여 사용한다. 예수님의 유대명은 여호수아(Jehosuah)인데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흔한 이름이었다.

히브리어 '여호수아'의 애칭은 예수아(Jeschua)인데 이를 그리스어로 표기하면 예수(Jesus)가 된다. 나사렛이란 이름은 히브리어 '나자르'에서 연유했다. '지키다', '수호하다'라는 뜻이다. 그리스어와 라틴어 발음을 따라 나사렛이라고 부른다.

유대인들은 이방 땅과 가까운 변방이었고 갈릴리 지역의 작은 마을이라는 점에서, 나사렛을 이방 땅으로 간주했다. 또 나사렛 출신을 경멸했다(행 24:5). 예수님이 이곳 나사렛에 와서 자라셨고 활동하심으로써 이방의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게 되었다(마 4:13-16).

더욱이 예수님께서 '나사렛 예수'라 불러짐으로써 이방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의 구주 되심)이 명확하게 드러났다. 그곳에서 육신의 부친인 요셉의 가업을 이어 공생애 전(30세)까지 목수로 일했다(마 13:55; 막 6:3). 모친은 마리아이며, 4명의 형제와 2명 이상의 자매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마 6:21).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성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서(마 3:13-17), 갈릴리 지방을 중심으로 하나님나라 복음을 전파하시며 각종 병자들을 치유하셨다(막 2:2; 6:55, 56). 그 당시 사회적 배경에서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종교적인 계명과 관습에 의해서 억눌리고 소외당한 유대 사회의 하류 계층이었음이 분명하다.

세리와 창기와 같은 사회적 배타 인물들과 죄인들, 어부들, 가난한 여인들이 주였다. 예수님이 갈릴리를 공적 사역 무대로 선택한 것은 유대인에게 통념화된 권위와 절대적 상징인 메시아 대망에 정반대되는 행위임에 틀림없다.

예수님은 북(北)이스라엘 갈릴리 지방에서 주로 사역하셨다. 예수님은 갈릴리를 무대로, 도래하는 '하나님나라'에 대한 복음을 전파한다. 율법에 따라 예수님은 12살부터 공생애가 시작되기까지 매년 3차례 예루살렘에 올라갔으리라 추측한다.

예수님의 부모는 해마다 유월절이 오면 예루살렘으로 찾았다(눅 2:41). 하나님의 율법에 따르면 모든 남자는 절기를 지키러 예루살렘에 모여야 했던 것이다(신 16:16). 그러나 절기만 지키고 고향으로 되돌아갔다고 유추한다.

갈릴리에서의 새로운 세상과 질서의 선포, 예루살렘의 구속사

갈릴리는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170여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큰 호수이다. 길이가 24킬로미터, 넓이가 12킬로미터, 둘레가 50킬로미터다. '갈릴리 예수', 갈릴리라는 뜻은 '둥글다'라는 의미이다. 갈릴리는 최초로 복음이 전달된 지역이자 부활 후에 만나기로 약속되었던 장소이고, 성경의 어느 지역보다도 의미가 깊은 지역이며 성령의 역사가 많이 나타난 지역이다.

갈릴리는 당시 소외된 지역이었다. 유대인들이 정통 유대인 거주지로 인정하지 않는 곳이었다. 심지어는 친구에게 예수님을 소개받은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며 친구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을 정도로 무시받고 천대받은 지역이었다.

갈릴리는 아프리카와 아시아로 가는 유일한 육로로, 전략적 요충지였다. 그래서 이방인들의 활동이 활발한 지역이고, 지속적으로 전투나 외국의 침략이 행해졌던 지역이다. 그 결과 우상숭배를 접하게 된 전통적으로 버림받은 땅, 비천하고 척박한 땅이었다.

이곳은 이방 지역과 인접하여 많은 가나안 족속이 거주하고 있었으며(삿 1:33), 이방인들의 침략도 잦았다(대하 15:20,29). 이러한 역사적인 이유로 신약시대에는 아예 갈릴리 지방을 '이방의 갈릴리'(사 9:1; 마 4:15)라고 부르기도 했다.

갈릴리 지방은 이방인과의 혼혈도 많았다. 언어 역시 방언이 많았다. 그래서 갈릴리 지방 사람들은 정통 유대인들로부터 무시를 받을 수밖에 없는 여건이었다(요 1:46; 7:52). 또한 수도 예루살렘에서 많이 떨어져 있는 산악 지대라는 지리적, 지형적 특성 때문에 로마시대 때는 혁명가나 반란자들이 이곳을 근거지로 활동하기도 하였다(행 5:37).

예수님은 예루살렘 사람이 아닌 갈릴리 사람이 되어서 대부분의 핵심 사역을 전개하셨다. 메시지 선포와 치유와 이적의 현장이었다. 사역의 시작과 다시 시작하는 장소였다. 부활하셔서도 갈릴리 바닷가에 다시 나타나셨다. 제자들을 위해 손수 아침을 준비하셔서 그들과 식사를 하셨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물으신다. 세 번이나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자, 베드로는 "내가 주를 사랑하는지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고백하며 그를 향한 열정과 사랑이 다시 일어나게 된다.

'갈릴리 바다'는 이름이 바다일 뿐 실은 넓은 민물 호수이다. 당시에 언어적 표현이 바다와 호수가 구분이 없었고 동일했다고 전해진다. 바다와 호수의 구분을 알았던 이방인 누가만이 누가복음에서 갈릴리 바다를 '호수'로 표현했다. 게네사렛, 긴네롯, 디베랴 등 여러 가지 다른 명칭으로 불린다.

요르단 강(요단 강)은 그 호수 한쪽 끝으로 흘러 들어가 맞은편 사해로 나간다. 호수 연안에서 예수는 네 어부를 제자로 삼았다. 그는 호수의 거센 폭풍을 잠재웠고(막 4:39), 한 번은 풍랑이 이는 수면 위를 걷기도 했다(막 6:45-53). 이 호수는 세계에서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담수호다.

예수님 고향인 나사렛은 이스라엘의 북부에 위치한 갈릴리 땅에 있었다. 11명의 제자가 갈릴리에서 만나게 되었다. 제자들도 배반자 유다를 제외하고는 모두 갈릴리 출신이었다. 예수님이 처음 기적을 보인 곳은 갈릴리의 가나였으며,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파하고 병자들을 치유하던 장소도 갈릴리 해안의 가버나움이었다. 마을 중심에는 커다란 유대인 회당이 있었다.

이 마을을 갈릴리 사역의 전진기지로 하고 이 마을, 저 마을 왕래하며 사역을 하셨다. 갈릴리 사람들 속에서 함께 생활하고 활동했다. 그리고 열두 명의 제자들을 불러 그들을 집중 교육시켜 그의 사도로서 하나님나라를 확장하는 핵심 일꾼으로 파송하셨다(마 10:1-15).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내용에는 제자가 되는 길에 대한 스토리가 많이 있다. 이 길은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는 제자도와 삶을 의미한다. 그 길은 지배층과 제도와 맞서 대항해야 할 땅, 즉 새로운 질서의 선포와 죽음과 부활의 현장이었다.

당시 죄인들의 사형장이었던 십자가의 치욕과 수치는 기존의 정치, 종교 권력자들, 외견상 승리한 것처럼 보였던 마귀의 권세를 깨뜨리고 죄와 사망과 죽음을 극복한 십자가상에서 승리를 알리는 장소였다.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골 2:15)

예수님의 승천 이후에는 제자들은 신실한 믿음과 장차 도래할 하나님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에 대한 희망과 그를 위한 사명을 감당했다. 심지어는 순교의 길을 걷게 되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그에 대한 신실함, 목적과 가치의 지향으로 인해서 로마 제국주의와 전체주의 정치 질서와 종교 권력이나 불의한 체제에 투항하거나 협력할 수 없었던 것이다. 즉 갈릴리는 예수님 사역의 현장이고 영역이었고, 예루살렘은 구속 사역을 완성한 영역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과 성령 강림으로 도래한 하나님나라다. 세상 나라에 마음을 둘 때 영적인 나라의 전열이 흐트러지고 지체된다고 했다. 왜냐하면 하나님나라는 비밀스런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눅 8:10)

하나님나라는 세상 속에서 비밀리에 이루어져 간다.

"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막 4:26-28).

그 나라는 세상 가운데, 사람들 삶에 더 깊게 스며들고 영향력을 주어 영적 질서를 대전환한다.

십자가의 길,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진행되는 예수님의 행로는 죽음으로 가는 길이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어떤 상황이 전개될지 미리 알았지만 성경에 일어날 약속의 성취, 그분의 뜻과 운명 때문에 예루살렘으로 향하게 된 것이다.

황준배 / 목사, 한세선교회 대표, <카리스마적 리더십>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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