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세기 1장의 잃어버린 세계> / 존 H. 왈튼 지음 / 김인철 옮김 / 그리심 펴냄 / 251쪽 / 1만 3,000원

이 책을 읽고 난 후, '내가 이 내용을 성도들에게 어떻게 가르칠 수 있을까' 하는 심각한 고민이 들었다. 기존의 교회와 성도들은 창세기 1장의 창조 기사를 물질적 창조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그런 생각이 고착화되었기에 내가 강단에 서서 창세기 1장을 설교할 때 "여기 나오는 창조 기사는 물질적인 게 아니라 기능적인 내용입니다"라고 한다면, 그날 회중은 웅성웅성할 것이고 나는 그날부로 자유주의자로 낙인찍힐 것이다.

저자는 휘튼칼리지 구약학 교수 존 왈튼이다. 나는 이분을 새물결플러스에서 나온 <아담의 역사성 논쟁>이라는 책에서 알게 되었다. 거기서 왈튼은 아담이 실제로 존재하였다는 역사성은 인정하나, 아담을 '원형적인 인물'이라 주장한다. 아담이 흙으로 지음받았다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흙'의 성경적인 의미와 문학적인 의미를 예로 들며, 죽을 운명에 처한 인류의 대표라고 말한다.

나는 그 책에서 왈튼의 주장을 거부하고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아담이라는 인물의 역사성은 인정했다. 하지만 아담을 성경에 나오는 창조, 죄, 타락, 구속, 완성에 있어 모든 것을 이해하고 연결하는 인물로 보았고, 그런 인물의 실제를 부정하고 원형이라고만 했는데, 이는 성경의 권위로 보면 부자연스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때 그의 글을 보며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아담을 포함한 창조를 당시 고대 근동 문화와 배경 속에서 이해하고 접근했다는 것이 내가 추구하는 성경 해석법과 일치하였다. 또한 그 일차적 해석이 공정하고 바르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성경의 창조 기사는 기능적 창조를 말한다?

그래서 이분의 창조 기사에 대한 책, <창세기 1장의 잃어버린 세계>(그리심)을 구입하여 읽었다. 이 책이 다루는 주제는 뜨거운 감자로, 읽는 내내 나를 고민하게 했고 책을 덮고도 계속 갈등하게 하였다. 나는 평소에 고대 근동 문서들과 신화를 포함한 외부적인 자료들이 성경보다 위에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또한 과학적인 증거가 아무리 객관적이고 확실하여도 결국은 가변적이기에 성경이 더 우선시된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창조 기사에 있어서는 그의 접근과 해석이 맞을 수 있겠다는 의심이 들었다. 새롭게 발견되는 창조의 증거들과 나날이 발전하는 과학을 배제하지 않고 대화하며 수용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동안 나는 과학과 신앙은 대립적이고 결코 섞일 수 없다고 배웠고, 그렇게 접해 왔다. 그래서 한쪽을 지지하게 되면 한쪽은 무너지게 되고, 상대편과는 대화도 할 수 없고 합의점을 찾을 수 없는 원수가 되는 수순이었다. 게다가 창조과학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컨코디즘(과학적 일치주의)이 보수적인 성경관과 신앙을 가지고 있는 우리에게 과학을 더 배제하고, 성경만 믿으라는 역효과를 불러일으켰다.

저자도 이런 과학적 일치주의가 잘못된 것이라 주장한다. 물질적 창조를 주장하고 성경 무오를 지지하려고 나선 창조과학이 오히려 성경의 권위를 깎아내리고, 과학을 더 불신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폐단을 극복하기 위해 저자는 성경의 '문자적 읽기'를 제시한다. 흔히 우리가 이해하는 직역적인 의미가 아니라, 저자가 말한 의도와 청중의 이해가 맞아떨어지는 해석하라는 말이다. 본문이 기록된 그 시대의 관점으로 읽는 것이다.

그렇게 저자는 창조 기사가 물질적 창조가 아니라 기능적 창조를 보여 준다는 새로운 해석을 내놓는다. 당시 고대 우주론은 기능적 서술이었다고 주장하면서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수메르 등의 당시 문서들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저자에 따르면, 당시 사람들이 우주의 물질적 창조보다는 우주의 각 부분들이 어떤 역할을 하고 어떤 기능으로 움직이느냐에 더 관심이 많았다. 창조 기사를 받았던 이스라엘인들도 다른 시대가 아니라, 바로 이런 고대 근동에서 살았기에 이런 배경 속에서 저자의 글을 이해하였을 것이라 주장한다.

솔직히 나는 이 부분을 반박할 수 없었다. 그동안 물질적 창조라고만 굳게 믿어 왔는데, 고대 근동 세계관과 당시 사람들의 우주론 인식과 배경을 바탕으로, 기능에 초점이 맞추어진 기사라고 해석하는 게 더 설득력 있고 타당해 보였다. 창조 기사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기도 하지만, 일차적으로는 이스라엘을 포함한 고대인들에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근동의 신화와 외부 자료를 성경과 어떻게 비교할 수 있느냐는 의문은 들었다. 하지만 그런 자료와 성경을 비교·대조하여 당시의 인식을 파악하는 게 성경의 권위를 훼손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신자와 대화할 수 있는 다리 놓는 기능적 창조 이론

저자는 이런 기능적 창조를 잘 이해시키기 위해 세 가지 비유를 사용한다. 회사, 컴퓨터, 대학 비유다. 건물만 완공이 되었다고 회사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안에 부서가 나누어지고, 사람들이 제 위치에 배치되어 고유한 업무를 할 때 회사라고 부를 수 있다.

본체를 담은 케이스와 모니터와 자판만 있다고 해서 컴퓨터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소프트웨어가 들어가서 각 기능에 맞게 기기가 작동할 때 컴퓨터라 부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정문, 후문, 강의동, 기숙사 같은 건물만 있다고 대학이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저자는 교수와 학생이 각자의 자리에 있고, 커리큘럼이 작동될 때 대학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물질이 언제 창조되었냐는 질문이 생기고 의심은 멈추지 않는다. 저자는 성경에서 물질적 창조를 중요하지 않게 다루고 있다고 말한다. 그 어디에서도 정확한 기원은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하나님이 창조할 때, 이렇게 더 중요한 기능적인 것을 창조하셨다면 물질적인 것을 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냐며 도리어 반문한다. 즉 저자는 물질적 창조를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정확히 알 수 없을 뿐이고, 그보다 더 중요한 기능적 창조가 이루어진 것이라 논증한다.

내가 이 주장에 더 끌리게 된 것은 (솔직히 아직까지 기능적 창조를 지지한다는 입장은 아니다) 기능적 창조를 받아들일 때 과학 이론을 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진화론도 다 싸잡아서 난도질하는 게 아니라, 목적론적 진화론 같은 경우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무엇보다 물질적 창조가 이해되지 않아 교회를 떠나고, 신앙에 회의마저 갖게 되는 현대인, 비신자들에게 대화할 수 있는 통로가 될 수 있다.

저자는 창조 기사가 성전으로서의 창조를 묘사한다고 주장한다. 이 또한 고대 근동 자료를 비교하며, 근동에서 우주 창조가 성전 창조의 의미였고 기능적 창조였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래서 창조 기사를 보면 하나님이 각 날마다 우주의 각 부분들을 정하시고, 제 역할을 하도록 기능을 부여하셨다는 것이다.

마지막 7일째는 성전 낙성식이라 하여, 하나님께서 성소에 좌정하셔서 실제로 통치하시고 다스리시는 것이라 한다. 나는 이 부분에서 물질적 창조라면 창조가 과거로 끝날 약점이 있는데, 기능이라고 해석하니 지금도 계속 창조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더 풍성하게 지지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끝으로 나는 저자의 창조에 대한 기능론적 해석과 접근이 면밀하게 검토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성경을 해석할 때도 종합적인 의미를 발견하게 하고 신학적인 통찰을 얻을 수 있다. 특히 이 글을 쓰고 있는 보수적인 필자도 그의 아담의 원형론적 해석, 흙과 잠과 인생에 대한 그의 해석을 보며 은혜가 되기도 하였다.

나는 그의 해석을 존중하고, 이를 받아들여서 성경 전체적인 의미에서 활용하고 참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기능적인 의미를 가르쳐서 더 깊이 성경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을 수 있도록 할 수 있다고 본다.

우주·세계·인류 기원에 대해 성경만큼 정확한 책 없어

그러나 저자의 기능적 창조는 인정하겠으나, 창조 기사가 물질적인 게 아니라고 하는 주장은 거부한다. 아무리 그 주장에 통찰력이 있어도 계시에 대한 실제를 논할 때 물질을 부정한다면 이는 성경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것과 연결된다. 무엇보다 인류가 기능과 함께 시작한다는 말이 너무 불안하고 빈약해 보였다.

물론 그는 고대 근동의 세계관을 반영하여 창조 기사를 설명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진 창조를 고대 이방의 우주론 바탕에서 살펴보고 있다. 고대 이방의 우주론을 바탕으로, 물질 창조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주장한다면 순서가 잘못된 것 같았다.

모세가 창세기를 쓸 때, 고대 근동과 메소포타미아의 여러 자료와 신화를 바탕으로 창조 기사를 작성했다고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그런 이방 자료와 신화를 바탕으로 창조 기사를 쓰게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분명히 그에게 말씀하셨고, 창조와 세계와 인간의 기원에 대하여 계시해 주셔서 적게 하신 것이라 생각한다. 신화가 아니라 다른 문화 자료라 하더라도 창조 기사가 그것을 의존할 당위성은 없는 것이다.

창조가 우주 성전의 창조이고, 제7일은 성전 낙성식에 대한 내용이라는 것도 당시 세계관과 신화들을 통해 이끌어 낼 수 있고 충분히 적용할 수 있는 해석이라고 본다. 근동 자료들에서 우주 창조는 그들의 터전을 만드는 장면으로 그려진다. 여기에는 터전을 만드는 데 반대하는 적 세력이 있고, 아주 자기중심적인 신의 모습이 보인다. 즉, 참고할 수는 있겠지만 하나님의 성품이 깃들여 있는 성경의 창조와 동일선상에서 비교한다는 게 불경해 보였다.

하나님의 창조는 아무런 적이 없이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언제나 절대자이자 주권자이셨으며, 아무런 방해와 위협의 세력 없이 홀로 창조를 이루셨다. 물질과 그 기능까지 창조하셨다. 근동의 신화적 요소가 많이 가미된 자료로 성경의 창조 기사를 기능적이라고 말하는 그의 주장이 비성경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7일 성전 낙성식 부분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제 시작되고, 그분께서 좌정하셔서 온전히 다스리시며, 우주가 기능적으로 제 역할을 한다는 아주 은혜로운 해석이다. 나도 인정한다. 그러나 이 즉위식에 대한 내용도 문서마다, 신화마다 다르다. 또 적을 상대로 승리하고, 이긴 자가 즉위하여 권위를 세울 수 있다. 그래서 이것 또한 성경 속 창조 기사와 비교한다는 게 불가하다고 생각되었다. 하나님은 언제나 절대자셨고, 즉위자로서 만물을 지배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분의 창조 기사의 이론과 접근법과 해석을 통해 신학적 통찰력을 얻을 수 있었다. 성경을 전체로 보고 해석하며, 종합적인 시각과 관점을 얻는 데도 도움이 되었다. 또 이 책은 그동안 닫혀 있던 과학에 대한 입장도 열리게 되고, 진화론에 대한 이해도 달라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필자 또한 여전히 단호한 입장이지만, 조금의 가능성과 여지가 생기긴 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과학 이론이 발견되고, 새로운 진화론이 성립되어도 그것으로 성경을 다시 보려는 시도는 잘못된 것이라 생각한다. 가변적이고 불안성이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사실과 이론으로 성경을 보는 게 아니라, 우리는 언제나 성경에 기초하여 그런 이론들을 살펴야 한다. 우리가 지켜야 하는 것은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화가 아니라 성경 본문이다. 특별히 우주와 세계와 인간의 기원에 대해 성경만큼 정확한 책도 없다는 사실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방영민 / 전주서문교회 목사,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

*이 글은 <크리스찬북뉴스>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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