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돌 손양원 목사 자료 선집> / 산돌손양원기념사업회 엮음 / 한국기독교연구소 펴냄 / 555쪽 / 3만 3,000원

자료집에 대해 서평을 쓰기는 처음이다. 서평의 대상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또 자료집은 그만큼 전문성을 확보하고 있어야 쓸 수 있다는 뜻도 되리라. <산돌 손양원 자료 선집>(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은 지난 10월 손 목사의 고향인 함안군 칠원읍에 소재한 손양원기념관 개관에 맞춰 출판되었다. 기념사업회 회장인 "이만열 교수 편"으로 되어 있지만 "기념사업회 엮음"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많은 사람들의 노고가 결합된 자료집인 것 같다.

신사참배에 저항한 참목자

산돌 손양원 목사는 참목자요, 기독교인일뿐 아니라 전 국민의 스승이 되는 사람이다. 일제강점기, 신사참배에 반대해 5년간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다는 것, 여순 사건 때 공산주의자 청년들에게 두 아들 동인과 동신을 빼앗겼다는 것(순교), 그 뒤 6·25 전쟁 때 여수 애양원교회에서 양 떼들과 끝까지 함께하다가 인민군에 의해 그 역시 총살당했다는 것 등은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들이다. 이런 단편적 내용 뒤에 숨어 있는 그의 기독교적 사랑도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일제강점기 신사참배에 대해서는 가톨릭, 침례교를 시작으로 장로교단이 1938년 총회에서 참배를 결의함으로써 대부분의 기독교인이 일제의 종교 정책을 따르게 됐다. 그러나 평양의 주기철, 경남의 한상동, 호남의 김형모 등을 비롯해 소수 목회자는 이것은 십계명 제1, 제2의 우상숭배 계명에 위배된다며 참배를 거부했다. 손양원 목사도 여기에 포함된다. 일제는 '신사비종교론'(神社非宗敎論), 즉 신사는 종교가 아니라는 애매한 명분을 내세워 목회자들을 회유했다.

두 아들과 손양원 목사의 순교

손양원 목사의 참된 목자로서의 모습은 순교당한 두 아들에 대해 임한 자세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아들을 죽인 공산주의자 청년 안재선을 처형 직전에 구하여 양아들로 삼았다. 순교한 두 아들은 천국에 갔지만 저 죄인(안재선)은 죽으면 지옥 갈 것이 뻔한데, 그대로 둔다면 목자의 의무를 하지 않는 것이 된다며 그를 구해 양자로 삼았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한 결과이다. 후대의 많은 사람들이 그를 '사랑의 원자탄'으로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손양원 목사는 1950년 9월 28일 퇴각하는 인민군들에 의해 여수 근교 미평 과수원에서 총살당함으로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 피난 가라는 주위의 권유도 뿌리치고, 한센인 성도로 구성된 애양원교회를 끝까지 지키다가 순교당한 것이다. 삯꾼 목자가 판을 치고 있는 이때, 그의 행동은 참목자상(像)으로 우리에게 각인되어 있다. 박형룡 박사는 손 목사의 추도식 때 설교하면서, 그를 '성자(聖者)'로 존호해도 손색이 없다고 했다.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는 우리가 세계에 내놓아도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성자이다.

생각보다 일천한 손양원 연구

이런 손양원 목사에 대한 연구는 생각보다 훨씬 미진하다. 일찍이 안용준 목사가 <사랑의 원자탄>(성광문화사)을 출판한 이래 그에 대한 글들이 종종 발표되었지만, 종합적인 연구는 일천하기 짝이 없다. 이렇다 보니 손 목사의 출생 연도부터 수세(受洗) 날짜, 각급 학교 입학과 졸업 날짜, 목사 안수받은 날짜 등 어느 것 하나 통일된 것이 없다. 연구 부진의 결과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런 점에서 이 자료집의 출판은 의미하는 바가 적지 않다. 손양원 목사에 대해 연구할 자료들을 집대성해 놓았기 때문이다.

'자료 선집'이라고 했지만 손양원 연구에 필요한 것들은 거의 망라하고 있다. 전국을 발로 뛰며 자료를 수집해 연구에 매진해야 할 텐데, 이 자료집 발간으로 수고를 덜게 되었다. 이 자료 선집은 '국판 555쪽'에 이르는 방대한 양을 담고 있다. △일지, 일기 △편지 △설교 △재판 기록. 분류하자면 네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과거 문투를 현대문으로 일일이 바꾸어서 정리, 읽는 이들의 편리를 도모하고 있다. 각 편을 읽으면서 손양원 목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일기에서 느낄 수 있는 따뜻한 인간미

일기는 그야말로 개인의 사소한 기록이다. 손양원 목사는 기록을 해서 보관하는 데 신경을 많이 쓴 듯하다. 성자 손양원 목사에 대해 선입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일기는 그의 인간적 면모를 그대로 접할 수 있게 한다. "동인이 머리 깎음, 이날 양원도 머리 깎은 날"(32쪽), "지갑 산 날"(46쪽), "일기장 산 날"(50쪽), "남창 교우 일동 사진 박은 날"(62쪽), "양 새끼 낳은 날"(66쪽), "목욕 새 옷 입음(新衣着)"(76쪽) 등의 내용을 읽을 때는 웃음이 피어오르기조차 했다. 성자의 인간적 면모를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다. 그의 일기를 읽으면서 새로운 사실들도 확인할 수 있었다. 손 목사가 야학을 했다는 것["금야부터 야학 시작"(29쪽)], 손양원 목사의 아호를 '산돌'이라고 쓰고 있는데, 이것은 한자 '활석(活石)'을 우리말로 바꾼 것이라는 사실(35, 41쪽), 손 목사에게 처제가 있었음["처제에게 편지 온 날"(43쪽)], 그가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기 이전, 그러니까 경남성경학원을 졸업하고 전도사 생활을 할 때부터 이미 사찰을 당하고 있었다는 것["1931년 9월 21일 2인 시찰인(視察人) 돌아감"(61쪽)] 등.

또 동생 문준과 갈등이 있었다고 솔직하게 쓰고 있고(87쪽), 손 목사가 평양신학교를 졸업하는 그해 목사를 안수받기 바랐으나 신사참배 반대 문제에 부딪쳐, 해방 후인 1946년 2월에 가서야 안수를 받게 되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해방 뒤 국기배례도 일제 때의 신사참배와 마찬가지로 우상숭배에 속한다고 하여 그가 적극 반대 의견을 개진해 급기야 당시 대통령 이승만을 만나 당위성을 설명하기도 했다. 그래서 결국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대며, 예를 표하는 주목례로 바꾸게 했다. 신앙이 민족 위에 있다는 예증이 될 것이다.

오늘날 들어도 뒤지지 않는 설교

손양원 목사는 많은 설교를 기록으로 남겨 두고 있다. 지금까지 여러 곳에 산재되어 있던 것을 이번 자료 선집에 모아 221편으로 정리했다. 어떤 이는 손 목사의 설교에 대해,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내용이 초보적이고 피상적인 것들이어서 특별한 것이 없다고 했지만, 그의 설교를 정독한 나의 느낌은 그렇지 않았다. 그의 설교는 평이(平易)하지만 그 가운데 영적 파워를 느낄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성경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날 그대로 회중에게 전해도 될 정도로 설교의 틀을 갖추고 있었다.

손양원 목사가 구속된 죄목은 치안유지법 위반이다. 신사참배 반대가 주 이유가 되겠지만, 그가 한 설교도 꼬투리를 잡으려 했다. 본인 손양원 목사가 경찰서와 검찰에 자주 불려 가 피의자 심문 조사를 받았지만, 그 주위 인물들, 예를 들어 애양원교회 장로, 집사들도 증인으로 불려 가 조사를 받았다. 일제의 검찰과 경찰은 두 개의 설교를 문제 삼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현하 교회가 요구하는 교역자'와 '주의 재림과 우리의 고대'라는 설교였다. 일제 천황제를 비판하고 독립의 당위성을 은근히 강조한 설교이다.

원문이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심문 과정에서 증인들에 의해 드러나고 있는 내용은 대강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세계대전과 천재지변으로 조선 교회는 수난을 겪고 있다. 일제는 신사참배를 강요함으로써 우리를 괴롭힌다. 이런 일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지금의 정세하에서 조선 교회가 요구하는 교역자는 재림 주 그리스도의 지상 통치를 돕기 위해 말씀 위에 바로 서 있어야 한다." ('현하 교회가 요구하는 교역자', 505쪽).

"임박한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공중 권세 잡은 사탄 마귀가 멸망하고 악한 정치가 사라질 때가 되었다. 만왕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각국을 통치할 심판장으로 오셔서 세상을 평정하신다. 전쟁과 한재, 수재와 악병이 사라지고 또 애양원교회 성도들인 나병 환자들도 전쾌(全快)된다. 따라서 영원히 평화롭고 행복한 하나님나라가 출현하게 된다." ('주의 재림과 우리의 고대', 505~506쪽).

그의 설교를 일별하면서 알 수 있었던 것은 유난히 기도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손양원 연구의 보고(寶庫), <체형조서>(體刑調書)

손양원 목사를 알기 위해서 그리고 그를 연구하기 위해서 제공되는 중요한 자료 하나가 <체형조서>(體刑調書)이다. 그는 신사참배를 반대한다는 이유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구속되어 만 5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1심에서 받은 형량은 1년 6개월이었지만 전향, 즉 신사참배를 계속 거부함으로 위험 분자로 찍혀 전향할 때까지 구속 생활이 이어지게 되었다. 체형조서는 그가 일제에 잡혀가서 경찰과 검찰로부터 받은 심문 조서를 말하는데, 손 목사의 답변에서 그의 신앙뿐 아니라 일상생활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알려 주고 있다.

일찍이 <사랑의 원자탄>을 쓴 안용준 목사를 비롯해서 손 목사에 대한 중요한 글은 많은 부분이 이 체형조서에 근거한 것들이다. 손 목사 장녀 손동희 권사는 체형조서를 시기별로 정리해서 <사랑의 순교자 손양원 목사 옥중 목회>(보이스사)라는 제목의 책을 발간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체형조서 발굴에는 원택연 장로의 도움이 컸다. 해방 후, 그가 광주지방검찰청장으로 근무할 때 안용준 목사가 원 장로에게 특별 부탁을 해서 발굴해 낸 것이다.

일제하 구속되었던 사람들의 체형조서를 살펴보면 사실과 어긋나는 부분이 상당량 발견된다. 일반적인 죄를 지어 구속된 사람들은 죄를 가능한 한 줄이기 위해 자신에게 유리한 진술을 하는 일이 많다. 또 독립운동을 하다가 구속된 확신범(確信犯)들은 모든 것을 조국 독립에 맞추어 진술했기 때문에 사실과 배치되는 것들이 종종 발견된다. 하지만 손양원 목사는 목회자로서 신앙 양심에 근거해 진술했기 때문에 대부분 사실에 부합하는 내용이라고 보아도 좋다. 그만큼 사료적 가치가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교양 도서로도 일독을 권할 만한 책

이 자료 선집을 많은 이들이 읽어 보기를 바란다. 연구자들뿐 아니라 일반 사람들도 교양을 확보하고 정신적 자산을 구축하기 위해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있다. 세상이 점점 팍팍해져 간다. 개인의 잘못이 물론 아닐 것이다. 자본주의의 변형인 신자유주의는 사람보다 물질, 상호 보완보다는 경쟁을 부추기며 심한 이기주의를 양산해 내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역사를 의식하고 살아야 하는 것이 당위라면 더불어 살기 훈련을 받아야 한다. 그 교재로 <산돌 손양원 자료 선집>을 권하고 싶다. 신앙과 민족을 위한 삶은 이타적인 삶을 살 때 가능하다. 산돌은 그런 전형을 보여 주고 이 세상을 뜬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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