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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교회 개척한 아들 목사에게 "교만한 꼴통"
주날개그늘교회 설립 감사 예배에서 축하 인사를 빙자해 돌직구 날린 아버지
  • 김종희 (jhkim@newsnjoy.or.kr)
  • 승인 2016.03.17 18:58


▲ 아버지 남영우 목사가 인사말을 하는 장면이다. 영상을 먼저 본 다음 본문을 읽기 바란다. (영상 제공 주날개그늘교회)

"정말 교만하기 짝이 없습니다. 아버지로서 이런 말을 하면 안 되는데, 우리 아들은 꼴통입니다." 개척교회 설립 감사 예배에 나타난 아버지 목사가 담임목사인 아들을 겨냥해서 '교만하기 짝이 없고, 꼴통이다' 하고 독설을 날렸다. 축제장이 한순간에 얼음장으로 돌변할 만한 발언이었다. 교인들은 좋아 죽겠단다. 박장대소를 하며 공감했고,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이며 동의했다. 목사 아버지와 목사 아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일산은혜교회(강경민 목사)가 주날개그늘교회라는 이름으로 분립 개척하고, 3월 6일 설립 감사 예배를 드렸다. 개척교회 교인들과 일산은혜교회 교인들과 외부 손님 등 200여 명으로 예배 장소가 차고 넘쳤다. 이 교회 초대 담임은 남오성 목사다.

남오성 목사의 아버지 남영우 목사(부천 새로운제자교회 원로)는 인사말을 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예정에 없었는데 사회자가 즉석에서 요청한 것이다. 자신에게 순서를 부탁하지 않은 아들이 괘씸해서였을까. 힘차게 출발하는 아들을 축복하고 응원해도 모자랄 텐데, 아버지는 원망과 유감을 가득 담은 말을 쏟아 냈다.

사연이 궁금해서 3월 15일 경기도 부천에서 부자를 같이 만났다.

아버지는 지금부터 34년 전인 1982년, 부천에서 교회를 개척했다. 개척하기 전에는 평범한 감리교회 권사였다. 20가지가 넘는 직업을 돌고 돌다가 마지막에는 제법 큰 경양식집을 운영했다. 느닷없이 소명의식을 느끼고는 신학교에 들어갔다. 교회를 개척했을 때 아버지는, 1학년 초짜 신학생이었고 39살 노땅 가장이었다. 아들 남오성은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나이 제한 때문에 감리교회에 속할 수 없었다. 여러 교단을 알아보다가 성결교회에 둥지를 쳤다. 아버지는 현신애 권사와 이천석 목사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병을 고치고 예언하고 방언했다. 성령과 은사와 기도 운동이 목회 삼발이였다. 당시 이름을 날리던 유명 부흥사들과 교류했다. 수많은 부흥사 단체 임원을 맡았고, 부흥회 일정을 광고하는 교계 신문에는 아버지 얼굴이 자주 등장했다.

한 번 입은 와이셔츠는 두 번 갈아입지 않았다. 당시에는 부흥회 강사가 묵는 숙소에 와이셔츠와 속옷을 챙겨 놓는 것이 관례였다. 그걸 집에 가지고 와서 한 번씩만 입어도 남아돌 정도였다. 군대에 있던 아들을 면회할 때 당시 가장 비싼 자가용을 타고 나타나 위병소를 지키던 군인들이 '높은 분이 오셨다'고 연락하는 등 호들갑을 떨게 만들었다.

교회는 시동을 걸자마자 질주했다. 1년 만에 100명이 되었다. 상가 25평 공간에서 시작했지만 이내 더 넓은 곳으로 옮겼다. 개척 5년 뒤인 87년, 지금 위치에 예배당을 지었다. 잘나갈 때 교인 숫자가 1,000명에 육박했다. 교회는 성장하고, 부흥 강사로 명망을 날렸다. 이 모든 게 하나님의 축복이었다.

브레이크 없는 질주의 종착지는 재앙이다.

교단에서 급성장하는 교회였지만, 목사가 나이는 많고 서열은 한참 뒤다. 부러움과 미움을 동시에 받았다. 이단 시비도 겪었다. 교단을 옮길까 하고 마음이 흔들리기도 했다.

어느 날 갑자기 교회 안에 분란이 일어났다. 재정 비리가 터졌는데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적반하장으로 교인들을 선동했다. 온갖 유언비어가 난무했다. 절대 카리스마 아래에서 숨죽이던 교인들도 흔들렸다. 결국은 수백 명이 교회를 떠났다. 충격을 받았고, 기가 완전히 꺾였다.

목회의 기뿐 아니라 육체의 기도 꺾였다. 99년에 뇌경색으로 쓰러졌다. 중환자실에 실려 갔다. 다행히 살아났으나, 뇌졸중, 뇌출혈, 심장질환, 중풍이 차례로 덮쳤다. 그때부터 외부 활동은 다 중단했다. 그리고 목회에만 전념, 주차장과 후생관 부지를 매입하고, 식당을 짓고 교육관을 세웠다.

아들 남오성은 89년 연세대 신학과에 들어갔다. 신학이라는 분야보다는 연세대라는 타이틀에 끌렸다. 아버지는 동상이몽이었다. 아들이 신학과에 들어가자마자 후계자로 낙점, "이 교회는 아들이 물려받습니다" 하고 일방적으로 선포했다.

아들은 뜨악했다. 학교 타이틀 때문에 점수에 맞추어 신학과를 갔을 뿐, 사명감은 전혀 없었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이 귀로 듣고 저 귀로 흘려보냈다. 아버지 역시 아들에게 목회의 소명이 있는지 없는지는 고려하지 않았다. 아들이 이 교회를 물려받는 건 너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데모하다 걸리면 집에서 쫓겨날 줄 알라고, 쓸데없는 일 만들지 말고 공부만 열심히 하라고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잔소리했다. 공염불이었다. 학교에서 제적 통지서가 날아왔다. 아버지는 아들이 학교 안 가고 야학에서 어려운 애들을 가르치다가 그리된 것으로 지금까지 알고 있다. 하지만 아들은 운동권에서 활동하다가 짤린 것이다.

퇴학당한 아들은 고려대에 가고 싶다면서 학원 수강료를 내 달라고 했다. 아버지는 '고대 떨어지면 신학교 가는 것'을 조건으로 돈을 주었다. 하나님은 공부하는 아들보다 기도하는 아버지의 편을 들었다. 사회학과에 지원했으나 떨어졌다. 약속대로 성결대 신대원에 들어갔다. 이곳에서도 공부보다는 운동이 체질에 맞았다. 학교가 있는 안양에서 운동에 전념했다. 김영삼 대통령의 '운동권 학생 복교 조치' 덕분에 연세대 졸업장을 받았다.

성결대를 다니는 동안 군대를 갔다 왔다. 제대 후, 다른 건 몰라도 영어는 붙잡아야 할 것 같아서 미국에 날아가 1년 동안 어학연수를 했다. 그리고 직장에 들어갔다. 도무지 회사 생활이 적성에 안 맞았다. 인생 전반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다.

신학 공부를 결심하고 성결대 신대원을 마친 다음 노스캐롤라이나에 있는 듀크대학에 갔다. 아버지가 뇌경색으로 쓰러져 119를 타고 중환자실로 갈 때였다. 아버지는 아들을 만류했다. "내가 쓰러지면 이 교회를 어쩌란 말이냐." 아들은 냉정하게 손을 뿌리쳤다. 이 정도 청개구리 행보면 설립 감사 예배 때 아버지에게 독설 아니라 독화살을 맞아도 싸다.

뭐든지 '거꾸로 행보'를 고수하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유학비를 보냈다. 교회를 물려주기 위한 스펙 쌓기에 투자하는 것이었다. 물론 교인들이 바친 헌금이었다. 미국에서 교회사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과정을 밟을 단계인데, 아들이 귀국했다. 아버지는 학비를 보내 주지 못해서 할 수 없이 돌아왔다고 지금까지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아들의 기억은 다르다. 당시 전액 장학생이었던 그가 귀국한 이유는 아버지의 건강이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서로를 애틋하게 여기는 불통 부자다.

미국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귀국한 아들은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국내 명문대를 나왔고, 미국 유학을 했고, 신학교 교수가 된 아들은, 아버지 교회에서 청소년, 대학 청년, 장년 예배 설교를 자주 했다. 세습할 스펙은 차고 넘쳤다. 아들의 신선한 설교를 교인들은 좋아했다. 주일예배 대표 기도 때마다 '미국에서 유학하는 남오성 전도사님'을 위해 빼먹지 않고 기도하던 교인들은, 아들이 교회를 물려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세습으로 가는 길에는 한 조각의 장애물도 없었다. 뭐든지 '거꾸로 행보'만이 문제일 뿐이다. 어느 날, 남 목사는 아버지에게 교회를 떠나겠다고 했다. 아버지가 일방적으로 선포한 것처럼 아들도 일방적으로 맞선포를 한 것이다. 청천벽력이었다. 설립 감사 예배 때 탄식했듯이, 공든 탑이 와르르 무너지자 아버지는 닭 쫓던 개 처지가 되어 잠을 못 자고 눈물을 흘렸다.

남영우 목사에게는 '세습'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내가 죽을 고생을 해서 쌓은 재산과 명예와 지위이기 때문에 혈육인 아들에게 넘겨주려는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의 자리를 아들이 물려받는 것 자체를 그저 당연하게 생각했다. 남들의 따가운 시선을 의식한다거나 죄책감을 느낄 이유가 전혀 없었다.

아들이 학생 때는 사회를 어지럽히는 빨갱이였는데, 목사가 된 뒤에는 교회를 힘들게 만드는 빨갱이로 거듭났다. 아버지 교회를 떠나서 교회개혁실천연대 사무국장이 되고, 얼마 후 일산은혜교회 청년부 담당 목사가 되었다. 아버지는 갈수록 멀어져 가는 아들을 결국 포기했다. 목회 32년 만인 2014년에 은퇴하면서 자식이 아니라 남에게 후임 자리를 넘겼다.

아들은 뭐든지 아버지의 생각과 정반대로 갔다. 베트남 참전 교관 출신으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군사 문화로 무장한 아버지는, 집안의 장군이고 아내와 자식은 하사관과 사병들이었다. 가족에게 자상한 아버지와 남편이 아니었다. 아들의 졸업식 사진에는 아버지가 없었다. 오직 교회밖에 몰랐고, 목회에 목숨을 걸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아들의 골수에는 자연스럽게 저항 기질이 새겨졌을 것이다.

정치관, 사회관도 같을 수가 없었다. 텔레비전을 보면 아버지는 폭력 데모꾼이 나쁜 놈들이었고, 아들은 폭력 경찰이 나쁜 놈들이었다. 독재 정권이 무력으로 나라를 통치하는 꼴을 견디지 못하는 아들 눈에는, 아버지 역시 교회에서 절대 독재자였다. 둘 사이의 균열은 깊어지고 넓어졌다.

아들이 아버지 교회를 떠나서 자기만의 길을 만들어 나가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았다. 처음에는 충격이었고, 절망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변했다. 자기와는 정반대의 길을 걷는데, 매스컴에도 사람들 입에도 제법 오르락내리락한다. 일간지에 쓰는 아들의 글을 통해 목회관도 엿보았다. 설교도 인터넷으로 들었다. 한편으로는 맘에 안 드는 구석이 있는데, 다른 한편으로는 뭔가 있어 보였다. 확실히 아버지보다는 똑똑하고 시대를 앞서 나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변화는 아들에게도 있었다. 운동권으로 투쟁하고 사회과학 책을 탐독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 인간은 누구도 예외 없이 시대의 자식이라는 것이다. 개인의 삶은 시대를 장악해서 지배하는 정신이나 가치와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교회사를 전공하면서 재확인했다.

집안 가장으로, 교회 목사로, 사회 구성원으로 아버지의 삶은, 우리 사회와 한국교회를 지배하는 가부장과 권위주의 문화와 맞물려 있다. 교회개혁실천연대에서 일하면서 목격한 수많은 사례는 그러한 확신의 무수한 실증들이었다. 전에는 아버지 개인이 미웠는데, 공부를 하면서 이해가 되고 아버지가 딱해 보였다. 자신의 걸음걸이는 아버지를 반항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둘러싼 세상의 왜곡된 가치와 문화를 거부하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부흥사로 잘나갈 때 일이다. 어느 목사가, 왜 목회가 안 되는지 모르겠다면서 남영우 목사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남 목사는 그의 명함을 가리켰다. "이게 뭐야. 서울대 법대 나온 걸 제일 위에 놓고 목회하는 교회 이름은 맨 밑에 넣어? 서울대를 지우든지 제일 아래로 내려. 그러면 성공할 거야." 나중에 보니까 명함을 바꾸었는데, 그때부터 복을 받아서 목회를 잘하더라고 했다.

아들은 '성공'이라는 가치는 동의하지 않지만, '서울대를 지우든 아래로 내려야 한다'는 가치는 동의한다. 아들에게 '서울대'는 무엇일까. 국내 명문대 출신에 미국 유학파 교수, 아버지가 견고하게 구축해 놓은 목회 토양과 땅과 건물. 이게 다 '서울대' 아닌가. 자신이야말로 금수저다. 아들은 그걸 독약으로 여겼다.

어떻게 하면 교회가 산다는 답은 아직 없지만, 어떻게 하면 교회가 죽는다는 답은 이미 안다. 그래서 내가 가진 모든 퇴로를 차단하고, 절박함을 가지고 출발하려고 했다. 첫 번째 퇴로가 세습이었다.

일산은혜교회는 몇 년 전부터 분립 개척 준비에 들어갔다. 남 목사는 신청자를 모으는 일에 정신이 없을 때였다. 당시 어머니는 암 투병을 하고 있었다. 항암 치료를 위해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현대 의학으로는 더 이상 할 게 없다"고 했다. 남은 시간은 6개월에 불과했다. '아, 엄마가 곧 내 곁을 떠나겠구나.'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시기 위한 시험이든 사탄이 넘어뜨리기 위한 시험이든, 그걸 두려워하면 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지막이 다가오는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는 길은 무엇일까. 어머니에게 선물하고픈 것이 하나 떠올랐다. 아버지와의 화해였다.

그날 아버지를 찾아갔다. 어머니 상태를 말씀드리고, 무릎을 꿇었다. 그동안 아버지 가슴을 아프게 한 것을 용서해 달라고 했다. '얘가 갑자기 왜 이러지? 자기 엄마 때문에 마음이 약해졌나? 이제 철이 좀 드는 건가? 그래도 쉬운 일이 아닌데, 기특하구나.' 아버지는 잘잘못을 따질 게 없었다. 아버지도 아들에게 미안하다고 하고, 함께 울었다.

어머니는 아들과 함께 병원도 다녔고 일산은혜교회도 출석했다. 어머니 소식을 들은 교인들도 함께 기도했다. 어머니의 암 투병 상황은 교인들이 교회 개척에 좀 더 관심을 갖도록 만들었다. 여생이 불과 6개월에 불과하다던 어머니는 2년 넘게 살아 계시다.

어머니가 하늘나라에 가시기 전에 새로 출발하는 교회에 모시고 싶었다. 올해 초, 어머니는 아들의 개척교회에서 드린 첫 예배에 참석했다. 아들의 개척교회 모습을 볼 수 있도록 어머니의 생명을 지켜 주신 것은 아닐까. 휠체어에 앉은 어머니는 아버지, 여동생와 함께 3월 6일 열린 주날개그늘교회 설립 감사 예배에 참석했다. 아들은 이날 어머니 이야기를 하면서 울었다.

아들은 가족을 초대했지만, 아버지에게 아무런 순서도 부탁하지 않았다. 아들의 성질머리를 잘 아는 아버지도 아예 기대를 안 했다. 어쩐지, 대기실에 앉은 아버지의 표정이 떨떠름했었다.

예배 후반이다. 사회를 맡은 강경민 목사는 남오성 목사를 앞으로 불러 무릎을 꿇도록 했다. 이날 설교한 홍정길 목사를 비롯해서 순서를 맡은 선배 목사들도 앞으로 나왔다. 남 목사에게 축복의 안수기도를 하기 위해서다. 아버지 목사에게도 나오라 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두 번째로 무릎을 꿇는 순간이다.

아버지는 광고 시간에 즉석에서 독설 담은 축복의 말을 꼴통 아들에게 해 주었다. 예배 마지막 순서로 홍정길 목사가 하기로 했던 축도를 남영우 목사에게 넘겼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순서를 하나도 안 맡겼는데, 안수기도에, 인사말에, 축도까지 아버지는 세 번이나 순서를 맡았다. 오늘 이 순간까지는 아들이 완승하고 아버지가 완패했는데, 이날만은 아들이 완패하고 아버지가 완승했다. 결론은 둘 다 승리.

교만하기 짝이 없고, 여태 뭐든 정반대 길로만 달리던 꼴통 아들이 이날 이후로 자랑스러워졌다. 뿌듯했다. 아들이 잘되어서 기쁜 것도 있지만, 아들이 새로운 시대에 맞는 멋진 목회를 하는 것 같아서 좋았다.

아버지 목사 말에 의하면 요즘 교단에서 세습 안 하는 교회가 하나도 없다. 아들은 물론이고 사위에게도 세습한다. 아들에게 세습하려는 목사를 만나면 뭐라고 조언하겠느냐고 물었다.

"당연히 우리 아들 이야기를 해 주면서, 아들을 믿고 다 맡기라고 말하겠다. 자식 자랑은 아니지만, 아들이 잘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자기가 잘하는 것도 있지만 교인들이 믿어 주기 때문 아닌가. 왜 믿겠나. 갖춘 것이 있으니까 그러는 거 아닌가." 아버지는 자식 자랑은 아니라고 하면서도 여전히 아들의 스펙이 뒷받침이 되었다고 여긴다. 잘 가다가 도로 삼천포로 빠지는 느낌이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 아버지의 모습이다. 부정할 수도 없고, 외면할 필요도 없다. 대신 시대의 한계에 갇힌 아버지의 길을 답습하지 않고, 그 DNA를 품고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어진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아들이 필요한 시대다. 무승부가 아니다. 둘 다 승리하는 것이다.

   

   
▲ 위쪽 사진은 인터뷰를 끝낸 다음 포즈를 취하고 찍은 것이다. 아래쪽 사진을 보면 인터뷰 내내 분위기가 어떠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뉴스앤조이 김종희

설립 감사 예배 때 아버지만 독설을 던진 것이 아니다. 남오성 목사는 예배 며칠 전, 나에게 영상 축하 메시지를 한마디 해 달라고 요청했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길게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남오성 목사를 잘 아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모아서 핵심을 찔러서 축하해 주었다.

"남오성 목사님은 '뇌섹남'이라고 불리죠. 뇌가 섹시한 남자라는 말입니다. 샤프하고 예리하고 정확하게 글도 쓰고 강의도 하고 상담도 했습니다. 하지만 목회는 뇌만 섹시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무엇보다 겸손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남오성 목사님이나 저나 겸손과는 거리가 먼 캐릭터입니다. 이제 목회를 시작했으니 겸손남 목회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버지를 인터뷰할 때 남오성 목사도 동석해 달라고 했다. 연로하셔서 기억이 흐릴 수도 있으니 사실과 다른 점이 있으면 바로잡아 달라고 지원 요청을 한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가 자기 맘에 안 드는 말을 할 때마다 끼어들어서 깐죽거렸다.

"아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섭섭한 이야기를 하겠다"고 하면, "저도 좀 있다가 섭섭한 이야기를 할 거예요" 한다. "아들이 학교를 안 가서 짤렸다"고 하면, "학교는 갔거든요, 수업을 안 들었지" 한다. 교회를 어지럽힌 장로 예를 들면, "그 장로, 아버지가 세웠잖아요" 타박하고, "나랑 사이가 틀어지면 하나같이 피똥 싸더라" 하니까, "아니, 지구가 아버지 중심으로 돌아가요? 아버지랑 화해했어도 저 요즘 안 좋아요" 한다. "우리 오성이가 허니문 베이비에요. 몸도 깨끗하고 마음도 깨끗한 상태에서 낳은 아이에요. 깨끗한 아이에요" 하고 다소 엉뚱한 이야기를 하자, 마침내 항복이라는 듯이 고개를 푹 숙이고 한숨을 휴~ 내쉰다.

아버지는 당신 아들과 나의 얼굴을 번갈아 보면서 조금도 굴하지 않고 일사천리로 이야기했다. 순식간에 지나간 2시간 내내 13년 전 하늘나라로 가신 나의 아버지가 떠올랐다. 남오성 목사의 말대로 우리의 아버지는 그 시대의 자식일 수밖에 없다. 시대 속의 아버지를 발견하면 안쓰러움과 연민과 애증을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인터뷰를 마치고 점심 식사 시간이 되었다. 같이 점심을 하자고 하시나, 나는 선약이 있었다. 아버지는 주머니를 뒤져서 돈을 꺼냈다. 아들은 "이분은 돈 받는 기자 아니에요" 했지만, 나는 얼른 받았다. "봉투에 담아 주는 돈이었으면 안 받았을 텐데, 쌩돈이라 받는다"는 농담을 나누었다. 대화를 하는 내내 내 아버지가 생각났기에 10여 년 만에 아버지에게 용돈 받는 기분으로 주저 없이 받아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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