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룻기> / 조영민 지음 / 죠이선교회 펴냄 / 1만 5,000원

죄는 '종합적'으로 이해해야한다. 예를 들어 십대 청소년이 빵집에서 빵을 훔쳤다고 해 보자. 명백한 범죄다. 그런데 이 청소년은 잠잘 곳도, 먹을 것도 없는 고아였다면. 주변에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상황에서 일어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면, 단순히 절도범이라고만 하고 끝날 수 있을까. 물론 어떤 이유로든 절도를 미화시킬 순 없다. 하지만 여기엔 절도라는 죄만 있는 게 아니다. 절도할 수밖에 없는 상황, 구조도 죄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죄는 개인적인 동시에 공동체(구조)적이다.

이런 맥락에서 먼저 엘리멜렉 가족이 모압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 주목해야한다. 그들의 고향은 베들레헴, 떡집이다. 떡을 만들 만큼 소출이 풍성한 지역이다. 그런데 기근이 들었다. 룻기의 배경은 사사시대다. 사사시대의 기근은 하나님의 심판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불순종을 심판하실 때 주변 나라를 강하게 일으키셔서 이스라엘을 치셨다. 이 과정에서 많은 약탈이 있었고, 이스라엘은 고통을 당했다. 엘리멜렉 가족은 떠난다. 떠나는 그들에게 약속의 땅을 떠난다고 손가락질만 할 수 있겠는가.

떠나서 잘 살면 좋았겠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나빠졌다. 나오미는 남편과 두 아들을 잃었다. 이제 나오미에게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 나오미는 다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이 외에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며느리 룻이 함께한다. 늙은 과부는 아무 소망이 없지만 룻은 아직 젊다. 고향(모압)으로 돌아가 새로운 삶을 시작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그녀는 고향을 선택하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헤세드(긍휼)를 본다. 헤세드? 헤세드는 강한 자가 약한 자와 하나 되어 약한 자를 세우는 것이다.

헤세드는 단순히 성격이나 품성이 아니다. 헤세드는 하나님에 대한 구체적인 '신앙 반응'이다.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다!"라는 룻의 고백은 그 어떤 신앙고백보다 위대하다. 풍족한 상황이 아닌 더 이상 잃을 게 없는 텅 빈 상태에서의 나온 고백이기 때문이다. 텅 빈 나오미와 룻, 앞으로 이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나님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나오미의 가족의 텅 빈 부분들을 채워 가신다. 보아스를 통해 양식을 채우시고 엘리멜렉의 가문을 회복시키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체적으로 헤세드를 실천할 율법을 가르쳐 주셨다. '이삭 줍기'와 '고엘'(기업을 무르는 제도)이다. 보아스는 율법보다 더 적극적으로 지켰다. 율법은 떨어진 이삭을 줍지 말라고 했지만 보아스는 종들에게 일부러 이삭을 더 흘리도록 했다. 엘리멜렉의 가문을 회복시키는 일은 손해다. 당장 땅을 사면 좋을지 모르지만 결국 엘레멜렉 가문에게 돌려줘야 한다. 남 좋은 일이다.

저자의 말대로 룻, 나오미, 보아스는 자기 이익을 챙길 줄 모르는 '바보'다. 약자가 일어설 수 있도록 자신의 것을 제한 없이 나누는 바보다. 바보 원조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다. 죄로 인해 죽었고,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던 우리가 예수님으로 꽉 채워진다. 사랑받지 못하면 사랑할 수도 없다. 룻기는 이 자리에 우리를 끊임없이 초청한다. 손해와 희생, 위기를 감수해야 하는 바보의 삶은 위험하다. 계산적인 세상은 바보를 어리석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들을 귀하게 생각한다. 세상이 보기에 자신의 이익에 밝았던, 보아스보다 더 가까운 친족은 '무명한 자'가 되었고, 바보처럼 사는 자는 '유명한 자'가 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한 모든 이야기를 기억하시고 우리의 이름을 불러 주실 것이다.

그러니 바보가 되기를 부끄러워하지 말자. 하나님은 오늘도 이러한 바보들을 통해 자신의 헤세드를 보여 주신다. 바보들의 행진이여 영원하라!

이연우 /  남서울교회 목사

* 이 글은 <크리스찬북뉴스>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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