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 죽어야지."

연세 드신 부모님들이 흔히 하시는 말씀이다. 밑지고 장사한다는 장사치의 말과 결혼 안 하고 살 거라는 노처녀의 말과 더불어 세계 3대 거짓말에 해당한다고 하지만, 그 말속에서 이제는 아무 능력도 없고 자식들에게 부담만 주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정말 죽는 게 나을까? 이제는 아무런 경제적인 기여도 못 하고 온갖 병치레를 하면서 자식들에게 부담만 주고 있는 사람은 살아 있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낫을까? 죽게 되면 저 아름다운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지내게 될 것이니 본인에게는 훨씬 더 좋은 일이고, 남아 있는 가족들은 여러 부담을 줄일 수 있으니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꿀벌은 꿀을 따기 위해 꽃 사이를 돌아다닌다. 정작 꿀벌은 의식하지 못한 채 자신의 일을 한다. 꿀벌은 꽃가루를 수정해 식물이 열매를 맺게 하는 위대한 일을 해낸다. 자신이 그렇게 대단한 일을 한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는 꿀벌처럼,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지 모른다. 자신의 존재 자체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느끼게 하고, 긍정적인 결과를 빚어내게 만드는지 잘 모른다.

우리는 모든 것을 경제관념으로, 사이즈로 판단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경제적으로 생산적인 것 같으면 가치가 있다고 느끼고, 반대로 소비적인 것 같으면 무가치하다고 느낀다. 어쩌면 이러한 사고방식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아주 힘들고 어려운 시절을 보낸 경험 때문에 생겨나게 된 건지도 모른다. 전쟁과 보릿고개를 겪으면서 먹고사는 게 힘들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우리를 먹여 살릴 수 있으면 영웅이 되었고, 경제를 축내거나 아무런 기여를 할 수 없는 사람은 반역자로 낙인찍혔다. 인문학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무가치한 학문으로 여겨졌고, 우리 미래는 과학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경제적인 효과가 없다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라고 하는 생각이 지배적이게 되었다. 놀라운 것은 우리 가운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쟁과 보릿고개를 겪어보지 않았으면서 그러한 멘탈리티에 푹 빠져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아무런 경제적 기여도 못하고 병원비만 축내고 있는 늙은 부모는 빨리 사라져 버리는 것이 좋을까?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너무 모른다. 그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가족이 행복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마치 꿀벌이 자신이 했던 위대한 일을 전혀 인식하지 않고 자신이 한 일이 그저 꿀을 따 모은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한때는 나도 기러기 아빠로 생활한 적이 있었다. 미국에서 아내와 자녀들은 보스턴에 남겨 두고, 1년간 보스턴에서 약 6시간 정도 떨어져 있는 필라델피아에 혼자 내려와 박사과정 공부를 한 적이 있었다. 당시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내가 머물고 있던 숙소에 들어갈 때의 외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어둡고 컴컴한 빈 공간만이 아주 냉정하게 나를 맞이해 주었다. 그런 삶은 정말 나를 지치게 만들었다. 보스턴에서 함께 공부할 때도 별 차이는 없었다. 도서관에서 밤늦게까지 공부하다가 아파트에 들어가면 이미 아내와 아이들은 잠자리에 들어간 지 오래였다. 나는 조용히 어두운 방 안에 들어가야만 했다. 아내와 아이들은 내게 아무것도 해 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같은 지붕 아래서 잠자고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있었다. 책을 읽다가 지친 몸으로 돌아와서 그들이 잠자고 있는 모습을 보면 정말 행복했다. 기러기 생활을 하면서 필라델피아에 혼자 있을 때는 정말 힘든 기간을 보냈던 것 같다. 물론 그 기간이 삶에서 전혀 무가치한 시간인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처럼 그때의 경험은 내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우리가 가족으로서 더욱 사랑하고 아끼며 살아갈 수 있는 자산이 되기도 했다.

얼마 전 추석날 지인으로부터 전화를 한 통 받았다. 미국에 가족을 남겨 두고, 홀로 한국 신학교에 부임하여 열심히 제자를 가르치고 있는 후배 목사였다. 이제는 이런 기러기 생활을 접어야 할 것 같다며,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을 위해 함께 기도해 줄 것을 내게 요청했다. 전화통을 붙들고 한참 이야기했던 것 같다. 당연할 수 있는 결정이라 축복해 주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놓고 기도했다.

예전에 어떤 연세 많으신 집사님이 병원에 입원해서 심방한 적이 있었다. 그때 온 집안 식구들이 총출동하여 할머니의 쾌유를 바라며 뒷바라지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여러 명의 손자 손녀들이 할머니 손을 꼭 붙잡고 할머니가 건강하게 다시 일어날 것을 간절히 비는 모습을 보았다. 그들은 할머니가 아무것도 할 수 없어도 할머니가 너무 좋은 것이었다. 그저 자신들을 향해서 따뜻한 사랑의 눈웃음을 보여 주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게 느끼는 것이었다. 경제적으로 이제는 아무런 기여를 할 수 없는데도 말이다. 이제는 죽는 게 낫겠다고? 이처럼 어리석고 사탄적인 생각도 없다. 그것은 돈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우상숭배적 사상이다.

자신의 사명과 역할을 과소평가하지 말자. 우리는 이 모습 이대로 하나님께서 독특하게 창조하신 하나님의 걸작품이다(엡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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