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츤데레'라는 단어를 들어 보았는가? 아마 한국어 어휘 중에서 그나마 이 의미와 근접한 단어 중 하나는 '새침데기'일 것이다. 비록 결말이 비극이긴 하지만, 학교 교과서에도 실린 소설 <소나기>는 새침데기가 무엇인지 잘 보여 주는 소설이다. 10년 전에 <소나기>를 보고 '츤데레다!'라고 생각할 사람은 많지 않았겠지만, 지금 '츤데레'는 나름 대중화한 용어가 되었다.

그럼 이 '츤데레'라는 단어는 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멀리 갈 필요 없이, 영문 위키피디아에서 'Tsundere' 항목을 보면 이런 설명이 있다.

"The term was made popular in the visual novel Kimi ga Nozomu Eien."

그리고 일본어 위키피디아의 'ツンデレ'(츤데레) 항목을 보면 이런 설명이 있다.

"最初期の用例(최초의 사례는)として2002年8月29日の『あやしいわーるど@暫定』における投稿に、『君が望む永遠』(그대가 바라는 영원)の大空寺あゆについて「ツンツンデレデレが良い、(츤츤데레데레가 좋다)…."

예시로 등장한 게임 '그대가 바라는 영원'은 2001년 출시된 '비주얼 노벨'이자 '에로게'이다. '비주얼 노벨'은 간단히 말해 게임을 하며 일러스트를 보고 텍스트를 읽는 것이 위주인 게임 장르이며, '에로게'가 무엇이냐 하면 '에로' + '게임', 즉 노골적인 성적 묘사가 나오는 게임이다. 저 말이 옳다면 우리가 쓰는 '츤데레'라는 용어는 사실 어느 일본 서브컬처(subculture) 인터넷 사이트, 그것도 음란함이 가득한 게시판에서 탄생된 용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흔히 쓰게 된 단어 '츤데레'는 우리에게 정작 잘 알려지지 않은 '어둠의 세계'에서 왔다는 이야기다. 

일본 문화 개방 전까지만 해도 일본 대중문화는 저질 문화로 취급받아 규제의 대상이었다. 일본 문화 개방은 1998년부터 2004년까지 점진적으로 이루어졌지만, 그 이전에 일본 애니메이션 등을 향유하는 행위는 암암리에 이루어졌다. 문화 개방이 이루어지면서 일본에서는 한참 전에 나온 여러 만화나 애니메이션이 우리나라에 정식으로 수입되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지금은 일본 애니메이션, 그중에서도 구매력이 있는 '오타쿠' 층을 겨냥한 애니메이션을 전문적으로 방영하는 케이블 채널까지 우리나라에 등장했다. 그뿐만인가, 이제 우리나라의 웬만한 대형 서점에는 일본 서브컬처에서 출발한 독특한 소설 양식인 '라이트 노벨'을 따로 모아 놓은 코너까지 생겼다. 일본에서 나온 라이트 노벨의 번역판뿐만 아니라, 국내 작가들이 쓴 라이트 노벨도 꾸준히 나오고 있다. 그 유명한 '에반게리온' 시리즈의 신 극장판은 지금까지 개봉한 3편이 각각 6만 명 이상의 관객을 불러 모으기도 했다. 그것뿐인가, 웹툰 중에는 일본의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1인칭 시점에서 가상의 미소녀 캐릭터들과 상호작용하며 호감도를 올려 캐릭터와 연애하는 게임) 형식을 본떠 만든 '러브슬립'이란 작품도 있을 정도다. 이제 우리나라에서 일본 대중문화의 영향력을 그저 미미하다고 치부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서브컬처를 즐기는 오타쿠 계층, 이른바 '덕후'들에 대한 시선은 전혀 곱지 못하다. 한 케이블 방송에서, 일본 애니메이션의 미소녀 캐릭터에 푹 빠진 사람을 '십덕후', '이십덕후'라고 이름 붙인 것이 인터넷상에서 비하적인 뉘앙스로 퍼지기도 했다. 이에서도 알 수 있듯이, '덕후'라 하면 일단 '일본 만화 속 미소녀 캐릭터에 열광하여 현실과 분리된 비정상인' 정도로 인식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비록 이제는 일상생활에서 자기가 무엇인가에 푹 빠져서 '덕질'을 한다는 용어는 널리 퍼졌지만, 그 '덕후'의 원류라고 할 수 있는 서브컬처의 향유자들에 대해서는 여전히 시선이 곱지 않다.

하지만 한국 교회가 전해야 하는, 화평케 하는 예수님의 복음에 있어 이 땅의 '덕후'들이 예외가 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기에 필자가 알고 있는 지식의 조각들을 모아 '덕후'와 '복음'을 조화해 보려는 시도를 여기서 서툴게나마 시작해 보고자 한다.

▲ 게임 '장애소녀'의 한 장면. 플레이어가 고르는 선택지에 따라 공략하는 미소녀, 그리고 이야기가 달라진다. 여기서 게임의 진행 상황을 저장하면 다음에 공략하지 않았던 다른 미소녀를 공략할 수 있어 다양한 이야기와 미소녀 캐릭터를 즐길 수 있다.

우선, '서브컬처'에 대해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서브컬처에 대한 정의를 <옥스퍼드영어사전>에서 찾아보면 "A cultural group within a larger culture, often having beliefs or interests at variance with those of the larger culture"라고 정의되어 있다. 번역하면 "어떠한 더 큰 문화 내에서 그 문화와는 다른 믿음이나 관심사를 가진 문화 집단"이다. 정의만 놓고 생각해 보면, 일본 애니메이션 등을 향유하는 계층만을 가지고 '덕질'에 대해 논한다는 것은 매우 좁은 정의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팬을 자처하는 인기 SF 시리즈 '스타 트렉'의 경우, 초기 팬들에 대한 묘사를 살펴보면 그에 대한 묘사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오덕후'에 대한 고정관념과 놀랍도록 비슷하다. 1975년 언론에는 '스타 트렉' 마니아를 가리키는 '트레키'가 "smelling of assembly-line junk food, hugely consumed; the look is of people who consume it, habitually and at length; overfed and undernourished, eruptive of skin and flaccid of form, from the merely soft to the grotesquely obese"라고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오바마는 저렇게 생기지 않았다. 영국 밴드 '블러'의 리더인 데이먼 알반이 만화가 제이미 휴렛과 손잡고 만든 가상 4인조 밴드 '고릴라즈'의 경우, 음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가상 밴드의 각 멤버들에 대한 독특한 설정으로 수많은 팬을 끌어모았다. 팬들에 의해 각 멤버 캐릭터들에 대한 창작물도 많이 만들어진 것을 보면, '덕질'이 일본에만 국한된 현상은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인가, 영미권에는 이런 '덕후'들을 지칭하는 'fanboy'나 'fangirl'이라는 용어도 있다.

우리나라도 여기서 빠질 수 없다. 당장에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수많은 아이돌 팬덤을 떠올려 보자. 우리나라 음반 판매량의 상당 부분은 아이돌 음반에서 나오고 있다. 또한, 이들 팬덤은 그저 그들만의 모임에 그치지 않고 아이돌 그룹 멤버에 대한 팬심에서 옥외광고를 직접 내는 등 한국 사회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팬덤을 단순히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소년·소녀들의 미성숙한 문화'라고 매도하는 것은 불가능한데, 이는 한 시사 주간지에 '누나 팬'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칼럼에서 잘 드러난다. 숨죽여 '덕질'을 하는 아이돌 '덕후'들의 모습은 하드 속에 감춰진 애니메이션과 비주얼 노벨을 함부로 들키고 싶지 않은 일본 서브컬처 '덕후'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쯤 되면 '덕후는 당신의 가족, 친구, 이웃일 수도 있습니다'는 별로 놀랍지 않은 명제다. 그렇다면 이런 문화의 생명력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래서 일본 서브컬처 담론을 가져와 보고자 한다. 

우선 아즈마 히로키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그는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 오타쿠를 통해 본 일본 사회>(문학동네)에서 오타쿠들이 미소녀 캐릭터들을 소비하는 것을 '데이터베이스적 소비'라고 설명한다. 일본 서브컬처 속의 미소녀 캐릭터들은 '모에'로 대표되는 기호 요소들의 집합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 이는 캐릭터의 성격, 외모, 주변 상황 등의 다양한 방면을 포괄한다. 앞서 예로 든 '츤데레'의 경우 성격 모에의 대표격이며, 이외에도 머리카락과 눈의 색, 신체 치수, 가정 환경 등 다양한 모에들이 존재한다. 이제 '모에'는 일본의 서브컬처를 설명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한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비주얼 노벨 게임 또한 캐릭터들이 구성되는 방법과 비슷하게 구성된다. 비주얼 노벨 게임, 특히 연애 요소가 있는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의 경우 다양한 캐릭터를 공략하기 위한 다양한 이야기가 한 게임 내에 존재한다. 각 이야기에서 공략하게 되는 캐릭터가 달라진다 해도, 이야기의 진행이 갈라지는 지점에서 게임의 진행 상황을 저장한다면 플레이어는 각 캐릭터와 연애하는 이야기를 모두 편히 즐길 수 있다.

'저장-로드'라는 간단한 장치를 통해 한 게임 내에서 자신이 욕망하는 캐릭터와 이야기를 마음껏 소비하는 '데이터베이스적 소비'의 기저에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요 특징인 '대서사의 붕괴'가 자리하고 있다. 현대 일본의 급속한 고도 경제성장이 끝나 가며 사회 전체를 유지했던 국가적인 '거대한 이야기'가 힘을 잃었고, 이 빈자리를 컴퓨터의 발전에 힘입어 데이터베이스에서 조합되어 나온 수많은 '작은 이야기'들이 대체한 것이다. 현시대의 오타쿠들은 이를 소비하는 주체가 되었으며, 이는 곧 욕망을 즉각적으로 채우고자 하는 '포스트모던적 동물'의 등장을 의미한다. 

이러한 분석은 단지 일본 서브컬처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잘 생각해 보면, '데이터베이스적 소비'는 아이돌 문화에도 잘 들어맞는 개념이다. 모에로 '가공'된 미소녀 캐릭터에 열광하는 것과 기획사에 의해 '가공'된 아이돌 그룹 멤버에 열광하는 것, 이 둘에서 '누군가를 소유하고 싶다'는 욕망을 동시에 읽을 수 있다. 또한, 미소녀 캐릭터들을 가지고 창작된 수많은 '작은 이야기'를 소비하는 것과 아이돌 그룹 멤버들을 엮은 '팬픽'을 소비하는 것, 이 둘은 모두 개인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이야기 소비가 아니던가? 게다가, 우리가 즐겨 보는 예능 프로그램도 결국 출연하는 연예인들의 캐릭터 성에 크게 의존하여 이야기를 진행해 나가며, 그렇게 만들어진 '작은 이야기들'은 TV를 보는 우리의 욕망을 충족시켜 준다. 우리가 음지의 문화로만 알고 있던 '덕후'들의 문화는 사실 우리가 늘 소비하는 대중문화와 크게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넘치는 대중문화를 소비하며 개인의 욕망을 즉각적으로 충족해 나가는, '덕후'가 대중화한 사회에 사는 것이다.

그래서, 대체 서브컬처가 교회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포스트모더니즘과 성경적 세계관이 동치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포스트모더니즘이 성경을 완전히 배격한다고도 볼 수 없다. 필자가 교회와 '포스트모던적'인 서브컬처를 연결하는 이유는 그 둘 다 '주변성'의 정신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 드러나는 하나님나라의 이야기는 주류와는 거리가 있는 '주변적'인 이야기다. 출애굽 사건부터가 이집트라는 제국의 주류 지배 체제에 대항한 행동이었으며, 사사 시대의 이스라엘 또한 왕권에 바탕을 둔 주변 국가와는 체제를 달리한 비주류적인 나라였다. 주일학교에서 많이 들리는 다니엘과 세 친구 이야기도 바벨론 제국이라는 주류 중의 주류에 저항한 용기 있는 이야기이며, 느헤미야 또한 자신의 '주류'적인 삶을 버리고 성전 재건에 헌신하였다. 성육신하여 고향이 아닌 곳에서 미혼모에게서 태어나 이집트로 도망가는 삶부터, 유대인과 로마 지배층 모두로부터 버림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님의 삶은 비주류 그 자체다. 열두 사도들은 세리와 어부 등 그 시대에 주류라고 하기 힘든 출신이었으며, 초대교회 또한 갖은 음해와 갈등 속에서도 떡을 떼고 가진 것을 나누는 세상과 구별된 공동체였다. 이방인의 사도 바울 또한 유대인 출신으로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서 그 진정성을 의심받은 주변인이었으나 초대교회 선교에 크나큰 역할을 했다. 이렇게 성경의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주류의 획일성을 거부하는 비주류적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성경의 비주류성과 포스트모더니즘은 '획일성에 대한 거부'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모더니즘의 진보에 대한 확신은 세계대전을 2번 겪으며 붕괴하였고, 그러한 낙관주의는 베트남 전쟁, 냉전 해체 등을 통해 계속하여 해체되어 갔다. 서구 열강을 중심으로 형성된 사상의 균열을 포스트모더니즘은 기존의 규범에 대한 의심과 도전으로 표현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고도 경제성장의 종료와 장기 불황, 우리나라에서는 IMF와 기성세대에 대한 젊은 층의 불신 등이 무너져 가는 모더니즘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의 도전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기존의 중심 가치 체계는 힘을 잃고, 이제 그 빈자리를 또 다른 '중심적' 체계가 아닌 대안적인 '비중심적' 가치 체계로 채워 가는 것이다. 서브컬처에서 나타나는 수많은 '작은 이야기'들은 획일적인 가치에 지친 인간의 갈망을 채우기 위해 그러한 비중심성을 간직하고 있다.

오타쿠 문화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가지고 이야기해 보자. 주인공 이카리 신지는 뜬금없이 거대 병기 에반게리온에 탑승하여 미지의 적 '사도'와 싸우라는 명령을 받는다. 연약한 사춘기 소년이 그가 감당하기 어려운 '인류를 지킨다'는 책임을 지게 되는, 누가 봐도 비정상적인 이 이야기 속에서 '에반게리온'은 수많은 해석의 여지를 준다. 어떠한 당위성도 없이 미지의 적과 싸워야 하는 이카리 신지의 모습에서 우리는 경제 불황으로 인한 불확실성이 가득한 세상에 내몰린 청년 세대를 볼 수 있으며, 그 이카리 신지의 보호자가 되는 불완전한 어른 카츠라기 미사토의 모습에서는 '어른이 되어 간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라는 불편한 질문에 도달한다. 그 외의 어딘가 깨져 있는 등장인물들의 갈등과 폭주를 다루며 '에반게리온'은 그 비현실성과 불완전성에도 우리의 삶에 있어서 현실성을 획득한다. 팬들의 성원에 힘입어 높은 예매율의 극장판으로 유명해진 '러브라이브!'는 또 어떠한가. 위기에 빠진 학교를 구하기 위해 꾸려진 스쿨 아이돌 그룹의 좌충우돌과 성장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레 우리는 이들을 응원하고 지지하게 된다. 아무것도 아니었던 평범한 여고생들이 뭉쳐 학교를 구하고 자아를 실현해 나가는 모습은 삶에 지친 우리에게 청량음료와 같은 시원함을 선사한다. 

비록 이러한 이야기들이 성경의 하나님나라 내러티브와 일치하지 않는다 해도, 이러한 이야기들이 창작되고 소비되는 양상은 기독인들에게 있어 중요한 시사점을 가진다. 오쓰카 에이지는 그의 저서 <이야기 체조>의 후기에서 '나 자신을 형성해 나가는 과정'을 위한 이야기 작법의 필요성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나를 알려야 한다'는 자기 계발적 메시지의 홍수 속에 시달리고 있지만, 정작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는 제대로 답하지 못하고 있다. 그 질문에 획일화한 세상은 각자에게 맞지 않는 답을 제공하고 있고, 그 대안을 찾아 '덕후'들은 만화나 애니메이션 등의 비중심적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세상을 '구원'했다는 복음을 들고 있는 한국교회는 성경의 내러티브를 우리 삶 속에 효과적으로 적용해 내야 하는 임무를 띠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만연한 이 시대는 복음의 진리를 위협하는 위기일 수도 있지만, 성경 말씀이 가진 그 '주변성'을 생각하면 오히려 이 시대는 '가난한 자가 복이 있는' 역설적인 하나님나라 복음이 가장 효과적으로 적용될 기회가 주어진 시대이기도 하다. '덕후'들이 가지고 있는 비주류성이 오히려 교회에 있어서 소중한 재원이 될 수도 있다.

'덕후' 문화가 사실 지금 우리의 대중문화와 맞닿아 있음을, 그리고 그 '덕후' 문화 속에 진심 어린 갈망이 녹아 있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단순히 즉각적인 욕망 충족의 측면만 보고 서브컬처를 하나님나라와 대적하는 것으로만 생각한다면 교회 안에 '덕후'들이 설 자리는 없을 것 같은데, 그게 정답은 아닌 것 같다.

한국교회 내에서의 서브컬처 담론은 없다고 봐도 된다. 아마 한국교회 내 일본 서브컬처 향유자들에게 가장 유명한 글은 이 글이 아닐까 싶다. 그 정도로 교회를 다니는 '덕후'들이 이야기할 장이 없다. 자신의 정체를 속 편히 드러낼 수 없기에, '덕후'들은 교회에서도 주변인이다.

이정용의 <마지널리티 - 다문화 시대의 신학>은 대표적인 다민족, 다원주의 사회인 미국에서 아시아계-미국인으로 살았던 그의 경험을 바탕으로 '주변성'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이야기한다. 아시아계-미국인이 백인에 의해 주변화되고 차별받았던 역사는 "나는 미국인이기 때문에 아시아인 이상이며 아시아인이기에 미국인 이상"이라는 명제를 통해 극복된다. 양쪽 모두에 속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두 세계 사이에서" 그리고 "두 세계 모두"에 존재하기에 오히려 이원론적이고 억압적인 백인 중심의 지배 체계에 문제를 제기하고 변혁할 수 있다. 예수님 또한 유대인, 바리새인, 사두개인 등 지배 집단에게 모두 주변화되었지만, 오히려 그 주변화된 위치에서 사랑이라는 초월적인 계명을 선포하셨다.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은 실로 그 '주변화'의 굴레를 모두 이겨 낸 새 삶이다. 중심 체제에 의한 획일화가 아닌, 다름이 존중받는 교회 공동체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여기서 우리는 '덕후-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를 생각해 볼 수 있겠다. 덕후들 중에서 그리스도인이 소수고, 교회 내에는 덕후가 소수인 상황은 덕후-그리스도인을 양쪽 중심에서 주변화시킨다. 하지만 그렇기에 덕후-그리스도인들은 서브컬처가 창조성을 잃어 가는 작금의 현실에 대해 '주변인들의 창조성'이 가득한 성경의 내러티브를 제시할 수 있으며, 또한 교회 공동체가 교회 안에서만 모이는 '획일화' 현상에 대해 주변인의 통찰로 비판할 수 있다. "두 세계 사이에서" 그리고 "두 세계 모두"에 존재하기에, 필자는 덕후-그리스도인들의 존재를 한국교회가 직시하고 씨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위해서는 약자인 덕후-그리스도인들에게 상대적으로 강자인 교회 공동체가 먼저 양보하고 섬기는 것이 먼저가 아닐까?

누가복음 15장의 아흔아홉 마리 양과 한 마리 양의 비유를 떠올려 보자. 주님께 있어 아흔아홉 마리 양과 한 마리 양 모두 동등하게 소중한 것이었다. 하나님나라의 복음은 다수결이 아니다. 그가 누구인지와 관계없이 한 사람 한 사람을 동등하게 여긴다. 우리가 교회에서 늘 말하듯이, 구원은 어떠한 자격이 있어서 얻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창조된 그 자체로 소중하기 때문에 믿음으로 얻는 것이다. 비록 덕후-그리스도인이 소수고 별종일 수는 있어도, 우리가 그들보다 낫다고 주장할 근거는 전혀 없다. 겉으로 나타난 양상은 다를지 몰라도, 그들 또한 삶의 이유를 찾고자 하는 보편적인 갈망으로 그런 문화를 형성한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덕후-그리스도인이라는 낯선 존재를 통해, 한국교회가 그들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친구 되어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예수님이 걸어간 '주변성'의 길을 한국교회 또한 따라가야 한다는, 교회에서 자주 선포되는 그 말씀을 실천할 기회는 생각보다 가까이 있다.

[참고자료]

http://en.wikipedia.org/wiki/Tsundere 
http://ja.wikipedia.org/wiki/ツンデレ
http://ko.wikipedia.org/wiki/대한민국의_일본_대중문화_개방
http://bizn.khan.co.kr/khan_art_view.html?artid=200708301027401&code=900312&med=khan
http://www.oxforddictionaries.com/us/definition/american_english/subculture 
http://greenbee.co.kr/blog/341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 오타쿠를 통해 본 일본 사회>(문학동네) - 아즈마 히로키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 - 오타쿠 게임 라이트 노벨>(현실문화연구) - 아즈마 히로키
<이야기 체조 - 이야기를 만들기 위한 6가지 레슨>(북바이북) - 오쓰카 에이지
<오쓰카 에이지 순문학의 죽음, 오타쿠, 스토리텔링을 말하다>(북바이북) - 오쓰카 에이지, 선정우
<마지널리티 - 다문화 시대의 신학>(포이에마) - 이정용
<포스트모던 시대의 기독교 세계관>(살림) - 리차드 미들턴, 브라이언 왈시

박준우 / 대학원생. 전공은 화학이나 정작 대학 생활의 대부분을 선교단체와 학생 자치단체에서 보낸 탓에 대학원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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