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교 사역 도중 현지인 학생을 구하다 사망한 김수석 선교사의 묘. ⓒ뉴스앤조이 송인선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 감비아에서 단기 선교 사역을 하던 23살의 한국인 청년이 현지인 학생을 구하다 세상을 떠났다. 고 김수석 선교사의 이야기다. 김 선교사는 선교 단체 컴미션 소속으로, NGO 단체인 WAM(West Africa Misson)에서 활동했다. 그는 지난 5월 파송되었고 오는 12월 한국으로 돌아올 예정이었다.

김 선교사는 휴일이었던 7월 11일, 동료 사역자들과 자신이 가르치던 현지인 학생들과 함께 감비아 서부 해안가인 카통 해변에서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중 10대 여학생 두 명이 수심이 깊은 곳까지 들어갔고 이내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 이를 본 김 선교사는 바다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김 선교사는 파도에 휩쓸렸고, 한 명만 구한 채 유명을 달리했다. 불과 3~4분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동료들에 의해 뭍으로 나온 김 선교사는 눈을 뜨며 정신을 차리는 듯하더니 숨을 거두고 말았다.

절체절명의 상황, 김수석 선교사는 어떻게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물에 뛰어들 수 있었을까. 지난 8월 5일, 아버지 김경후 집사와 김 선교사가 다니던 논산 강경중앙교회 이승남 목사를 만났다. 사고 당시 상황은 어떠했는지, 고인의 생전 성품은 어떠했는지 묻고 답했다. 아버지 김 집사는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말이 끝날 때마다 깊은 한숨을 쉬었다.

▲ 김수석 선교사는 어릴 적부터 부모님을 보면서 신앙인의 모범을 자연스레 체득했다. 사진은 동생 김시온 양이 만든 추모 영상의 한 장면. 앳된 김 선교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추모 영상 갈무리)  

김수석 선교사는 4대째 기독교 신앙을 지켜 온 가정에서 자랐다. 아버지 김경후 집사는 흔들림 없는 신앙의 본이 되었고, 어머니 김미정 집사는 강경중앙교회 부속 지역아동센터 복지사로 불우한 환경에 처한 아이들을 돕는 섬김의 본이 되었다.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김 선교사는 어릴 적부터 부모님을 보면서 신앙인의 모범을 자연스레 체득했다.

김 선교사는 번거로운 일을 도맡아 할 줄 아는 성실한 사람이었다. 대전신학대학교 신학과 11학번으로 입학했던 김 선교사는 학내 지인들에게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특별히 그의 지도 교수였던 임채광 교수는 김 선교사의 발인이 있던 7월 25일, 조사(弔詞)를 읊었다.

"조용하고 부드러운 성격이었지만 늘 긍정적인 모습이 참 보기 좋았네. 모든 일에 솔선수범했을 뿐 아니라, 학과 일을 위해서는 기꺼이 희생하곤 했었지. (중략) '추억록'을 만들어 보자고 내가 제안했을 때, 그 번거로운 일을 싫은 기색 하나 않고 동료 임원들과 학년 모든 학우들의 동조를 얻어 수고 끝에 멋진 소책자로 만들어 내던 생각이 아직도 생생하네. (중략) 모두들 김수석 학우 그대를 좋아했고, 늘 기도하고, 사랑으로 교제하는 그대의 영성에 매료되었지."

▲ 김수석 선교사에게 있어 환경의 어려움은 복음 전파의 장애물이 되지 않았다. 가족들은 슬픔 가운데서도 이런 김 선교사를 자랑스러워 했다. (추모 영상 갈무리)

김수석 선교사는 선교에 대한 열정이 있었다. 군에 입대하기 전인 2013년, 김 선교사는 컴미션에서 주최한 '요나선교학교'에 참가했다. 그곳에서 아프리카, 특별히 감비아에 대한 비전을 품었다. 그는 단기 선교에 필요한 비용을 준비하기 위해 군대에서 나오는 적은 월급을 꼬박꼬박 저축했다.

김 선교사를 어린 시절부터 보아 온 이승남 목사는, "어느 날 수석이가 단기 선교를 가겠다고 했다. 돈이 있느냐고 묻자, 군대에서 받은 급여를 쓰지 않고 모았다고 했다. 어린 친구가 고된 훈련 중에 맛있는 걸 사먹고 싶었을 텐데도 월급을 모아 온 걸 보니 참으로 기특했다"고 회상했다.

김 선교사는 감비아로 가지 않을 수도 있었다. 친밀한 사제 관계였던 임채광 교수가 김 선교사의 아프리카 파송을 반대했던 것이다. 임 교수는 아프리카 사역은 위험하니, 동유럽 지역에 있는 선교지에서 경험을 쌓는 게 어떠냐고 권면했다. 하지만 김 선교사는 감비아를 고집했다. "후에 목회를 하려면 어려운 곳에서 경험을 쌓는 게 좋지 않겠냐"고 했다. 임 교수는 그때 제자를 뜯어 말렸어야 했다면서 자책했다고 한다.

감비아로 떠나기 전날인 5월 4일, 김 선교사는 자신이 순교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부모님께 드리는 유서를 썼다.

"더 많은 하나님의 일을 하고 기쁨이 되는 삶, 영광 돌려드리는 삶을 살고 싶었는데, 하나님의 계획은 아무도 알 수 없기에 이 또한 하나님이 저를 천국으로 부르신 이유가 있을 거라 믿습니다. (중략) 어머니…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아낌없는 사랑으로, 신앙으로 양육시켜 주어서 감사했습니다. 우리 집에 가진 것이 없어서 미안해하는 마음으로 신앙밖에 남겨 줄 것이 없다고 한 그 말 덕분에 주의 길을 가는 자로서 살 수 있었습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 고 김수석 선교사의 아버지 김경후 집사를 만났다. 김 집사는 아들이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이 가슴 아프지만, 그 희생으로 선교의 열매가 맺히길 원한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송인선

아버지 김경후 집사는 아들이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난 것에 가슴 아파하면서도, 험한 곳을 마다하지 않고 좁은 길을 선택한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대부분 목회자들이 쉽고 편한 길만 찾아다니는 판국에 올바른 선택을 하지 않았느냐고 했다.

"어디서 들었는데, 목회자들이 가장 부르기 어려운 찬송이 '부름받아 나선 이 몸'이랍니다. 가사 중에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다'라는 내용이 있잖아요. 아골 골짝이 죽음이 가득한 곳 아닙니까. 요새 누가 그런 곳을 찾아가려 합니까. 청빙받을 때도 교회 성도가 몇 명인지 물어보고 간다고들 하던데.

솔직히 인간적인 마음으로는 수석이가 목사 안수까지 받고 좀 자리 잡은 뒤에 데려가셨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어요. 그렇지만 다 하나님의 뜻이 있지 않겠습니까. 어디서 나쁜 짓 하다 죽었으면 부끄러워 고개도 못 들고 다녔을 텐데, 의롭게 살다 하늘나라 갔으니 슬프긴 해도 자랑스럽습니다."

김 선교사를 파송했던 컴미션 대표 이재환 선교사는, 상중인 김경후 집사를 찾아왔다. 이 선교사는, 자신이 감비아에서 15년 사역하는 동안에도 어찌하지 못했던 감비아 사람들의 마음을 김 선교사가 단번에 변화시켰다고 말했다. 이슬람 국가인 감비아 현지에서는 김 선교사의 선행이 연일 화제가 된다고 했다. 이 말을 들은 김 집사는 위로를 받았다. 아들의 희생을 통해 선교의 열매가 맺힌다면 그것처럼 귀한 게 어디 있겠느냐고 했다.

김수석 선교사는 강경중앙교회가 관리하는 묘지에 안치되었다. 아담한 분봉 앞에는 '선교사·성도 김수석의 묘'라고 새겨진 묘비가 있다. 김 선교사의 생전 사진과 함께 그가 유서에 썼던 사도행전 20장 24절도 새겨져 있다. 김경후 집사는 이 묘비를 보는 사람들이 김 선교사를 떠올리며 그의 삶을 귀감으로 삼길 바란다고 했다.

현재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순교순직위원회는 이승남 목사의 요청에 따라 김 선교사의 순직 처리를 심사하는 중이다. 대전신학대학교도 2015년도 2학기 개강에 맞춰 김 선교사를 추모하는 채플을 드릴 예정이다.

▲ 김수석 선교사는 강경중앙교회가 관리하는 교회 묘지에 안치되었다. ⓒ뉴스앤조이 송인선
▲ 김수석 선교사가 선교를 떠나기 전 작성한 유서. (사진 제공 이승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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