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호흡기증후군 메르스(Middle East Respiratory Syndrome) 때문에 나라가 온통 골머리를 앓고 있죠. 하루 속히 진정되길 바라지만, 서울과 경기에 이어 대전과 부산도, 그리고 보성도 뚫렸다고 전하죠. 나라 안팎이 어지러운 때에 책임 공방도 가열되고 있습니다. 과연 누굴 탓할 수 있겠습니까?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은 법이죠. 나라의 지도자와 종교 지도자들도 문제인데, 누굴 나무랄 수 있을까요? 세월호 사건 때도 그랬지만 이번 메르스 감염 때도 '컨트롤 타워'가 대두됐었죠. 더욱이 그 특유의 유체 이탈 화법도 어김없이 터져 나왔죠. 그런데도 청와대는 6월 4일 날 본관 출입구에 열 감지기를 설치했다고 하죠. 국민은 안중에도 없이 '나 혼자 살면 된다'는 생각에서 취한 조치였다면 정말로 큰일이겠죠. 물론 그럴 리는 없을 것입니다.

요즘 새벽에 여호수아서 7장과 8장을 읽어 나갔는데 지도자의 책임이 얼마나 막중한지 다시금 깨닫게 되었습니다. 1장에선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하라"(수 1:6, 7,9)고 하나님께서 격려하는데, 그것은 모세가 죽고 난 후 그에게 힘을 북돋아 주기 위함도 있었지만 군중심리에 도취돼 좌우로 치우치지 말고 오직 여호와의 언약을 좇아 가나안 땅을 정복토록 하기 위한 격려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2장에선 여리고 성읍에 정탐꾼을 보내는데 40년 전 모세가 12명을 보낼 때와는 달리 이번엔 단 2명만 보냈죠. 사분오열되지 않고 한뜻으로 모으기 위함이었겠죠. 미드라쉬에선 그 둘을 비느하스와 갈렙으로 여긴다고 하는데1), 그들은 기생 라합의 믿음과 재치로 목숨을 건졌습니다. 3장에선 요단강을 건너는데 마치 홍해를 건널 때와 똑같았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내신 길이었는데, 그 역사를 목격하도록 법궤를 맨 제사장들과 일반 백성들 사이를 '이천 규빗'(수 3:4) 약 1km의 간격을 두게 했죠. 그 역사적인 사건을 자자손손 기념토록 하기 위해 4장에선 요단강 속의 돌 12개를 취해 길갈에 기념비를 세우게 하죠.

5장에선 가나안 땅의 정복 전쟁에 앞서 할례와 유월절 의식을 거행케 하죠. 그때 하나님의 군대 장관이 나타나 여호수아에게 신발을 벗도록 합니다. 그것은 일종의 제의(祭儀)와 정결례였습니다. 모세가 미디안에서 애굽으로 가는 길목에서 그 아들들에게 행한 할례 의식과도 같고, 광야로 나갈 때 행한 유월절 의식과도 같은 격이죠. 더욱이 모세도 호렙산에서 신발을 벗었는데 여호수아도 똑같이 신발을 벗게 했죠. 가나안 정복 전쟁은 인간의 탐욕이 아닌 하나님의 언약을 좇아 순종할 때 승리케 된다는 걸 알려 주고자 한 예식이었죠.

6~8장은 이제 가나안의 중부 지역을 점령하는 모습입니다. 6장에선 여리고 성읍을 함락시키고, 7장에선 그 여세를 몰아 아이 성을 점령코자 하는데 패배하죠. 그 원인을 깨달은 후에 8장에서 다시 전투에 나서서 승리하는 과정을 담고 있죠.

여리고 성읍의 함락은 순전히 하나님께서 행하신 방법이었죠. 법궤를 멘 제사장들이 앞장서고 백성들은 뒤를 따라 6일 동안 한 바퀴씩 돌게 했고, 일곱째 날엔 일곱 바퀴를 돌고 7개의 양각 나팔을 맨 제사장들이 그걸 불 때 온 백성들도 함께 소리를 지르게 해서 무너뜨린 전략이었죠.

그토록 희귀한 하나님의 전술에 놀라운 과학적 사실이 숨어 있다고 합니다. 진동에 의한 '공명'과 '지진'으로 무너진 게 그것이라고 하죠. 강철이나 콘크리트 물체는 저마다 고유한 진동수를 갖고 있는데, 외부에서 가하는 진동수와 일치하면 걷잡을 수 없는 진폭이 일어나고, 그런 '공명' 속에서 균열과 파괴가 일어난다는 거죠. 1831년 영국의 맨체스터 근교의 브로스턴 교가 붕괴된 것도 당시 캘버리 부대의 행진 때문이었고, 여성 성악가의 목소리에 크리스털 컵이 깨지는 것도 그런 원리라고 하죠.

더욱이 지질학자들은 요단 계곡이 거대한 단층으로 이뤄졌다는 사실을 밝혀 낸 바 있는데, 그 성읍 근처의 땅들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2개의 판구조 사이에 끼여 있는 지진 다발 지역이라고 하죠. 지금의 리히터 규모 6.0 지진이 그 당시에 발생해서 그 성읍이 붕괴됐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죠.

적어도 100만여 명의 이스라엘 군사들이 여리고 성을 하루에 한 바퀴씩 엿새 돌 때 그 성읍의 지반은 반복적인 공명으로 차츰 약해졌을 것이고, 일곱째 날엔 제사장들의 나팔 소리와 백성들의 함성 소리에 그 공명이 극에 달해 지반이 갈라지는 지진 속에서 무너졌다는 설명이죠.2) 물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그걸 내다보지 않을 리 없었겠죠.

그런데 그토록 희귀한 전술 속에서 '땅 밟기 기도'를 선교 전략으로 삼는 교회와 단체, 목회자와 선교사들이 있다고 하죠. 그렇지만 그 행위는 하늘과 땅의 모든 만물을 통치하는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는 행위이고, 마귀를 하나님과 동등한 관계로 놓는 일이고, 과거 우리나라의 지신밟기와 같은 유사 행위로서 무속적인 신앙 행위에 지나지 않는 일이라고 하죠.3)

더욱이 그런 행위는 단순한 퍼포먼스와 허공을 치는 기도에 불과할 뿐입니다. 십자가를 만들어 어깨에 짊어지고 지역을 돈다고 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도 아니죠.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우주적인 통치 영역에 속해 있는 것이니 말이죠.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외적인 퍼포먼스에 치중할 게 아니라 각자의 영역 속에서 공의로운 삶을 추구하는 게 옳은 일이죠. 부패한 정치권에 들어가 의로운 정치를 펼치고, 자본의 논리에 소외당하는 노동 권리를 되찾고, 교육의 현장에 생명의 가치관을 불어넣고, 탄식하는 피조 세계에 환경 파괴를 막는 일들 말이죠.4)

1900년대 초 전 국민의 1%에도 못 미치는 그리스도인들이 민족 계몽 운동과 3·1운동 같은 역사적인 일들을 주도해 나갔습니다. 현재 28%에 달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영향력을 펼치지 못하고 있죠. 되레 제국주의 문화 흐름에 깊숙이 빠져든 형국이죠. 바울 사도가 보여 준 선교 전략엔 그 어떤 '땅 밟기 기도'나 이색적인 선포 행위가 없었죠. 오히려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하는 삶의 고백적인 복음 전파 행위였죠. 더욱이 가는 곳마다 승리자의 모습보다 실패자의 모습이 더 많았죠. 하지만 그 속에서도 하나님은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자라게 해 주셨죠. 인간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에 기인한 선교임을 보여 주고자 한 일이었죠.

여호수아서 7장과 8장에선 드러나지 않는 지도자의 책임감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여리고 성읍을 무너뜨린 기세를 몰아 작은 아이 성까지 정복코자 정탐꾼을 보내죠. 그들은 '이삼천 명만'(수 7:4) 올라가도 충분할 것으로 보고하죠. 그때 3,000명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그 성을 멸하고자 하죠. 하지만 그 전투에 대패하고, 36명의 병사들도 죽어 났죠.

그 전투의 패배 원인을 7장 1절에선 '아간(עָכָן)의 범죄'로 아예 못 박아 두고 시작하죠. 지극히 작은 개인이 하나님께 바쳐진 '헤렘'(חֵרֶם)을 훔친 게 큰 화근(trouble maker)이었죠. 헤렘은 일반 사람이 접촉해서도 안 되고 사용해서도 안 될 것이었죠. 모세오경 속엔 그 헤렘이 '당위적인 헤렘'(출 22:20, 신 7:2, 13:15, 20:17)과 '자발적인 헤렘'(레 27:28-29, 민 18:14)으로 구분된다고 하죠.5) 자발적인 헤렘이란 성전에서 섬기는 제사장들의 몫으로 구별한 것을, 당위적인 헤렘이란 가나안 일곱 족속의 죄악에 대한 완전한 진멸을 일컫는 것이죠. 아간은 지극히 개인적인 탐욕과 그 가족의 방조로 인해 당위적인 헤렘에 욕심을 품은 것이었죠.

그렇다면 지도자인 여호수아에겐 책임이 없었을까요?6) 있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침묵하죠. 물론 아이 성의 두 전투를 대조하면 손쉽게 책임을 규명할 수 있죠. 그는 7장 중반부와 8장 전체를 통해 이전과는 다른 전투 양상을 보이죠. 첫 전투 때 없던 '법궤 앞에서의 기도'(7:6-9)나 '하나님의 사인'(8:1-2), '하나님의 명령을 받드는 모습'(8:1-3), 첫 전투에선 용사 3,000이 자발적으로 출전했지만 두 번째 전투 땐 '용사 3만 명을 직접 뽑아 진두지휘한 것'(8:3-9), 첫 전투엔 없었던 '군사들과의 야영과 아침 일찍 점호하는 모습'(8:10), '치밀한 복병전'(8:11-17), 그리고 '전투에 승리할 때까지 단창을 들어 올린 모습'(8:18-29)들이 그렇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내가 정말 하나님을 이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점점 사라집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거나 신뢰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 반대로, 인생을 살아가면서 내 사랑과 신뢰는 점점 깊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거나 허락하시는 일로 고민하고 그것과 씨름하는 것도 점점 더 깊어집니다."

크리스토퍼 라이트의 〈성경의 핵심 난제들에 답하다〉(새물결플러스)의 서문에 쓰인 글귀입니다. 악, 가나안 정복, 십자가, 종말이라는 네 가지 주제를 통해 하나님께 질문을 던지는데, 이해 가능한 신앙적인 답보다 그 너머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신뢰케 하는 길을 모색하는 책이죠. 이 책도 가나안 정복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하지만 여호수아의 책임론에 대해선 언급돼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여호수아 7~8장을 한 장으로 놓고 보면, 지극히 작은 개인이 저지른 아간의 죄도 크지만 이스라엘의 대표 지도자인 여호수아의 책임은 더 크다는 생각을 아무리 해도 지을 수가 없습니다. 마치 영감의 갑절을 받은 엘리사가 '대머리여 대머리여'하며 자기를 놀려 대던 42명의 아이들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여 암곰 둘이 찢어 죽이게 한(왕하 2:23-24) 그 책임론도 그렇죠. 바울과 바나바가 행한 1차 선교 여행 때 선교지를 이탈한 요한 마가를 두고 바울은 2차 선교 여행 때 바나바에게 그의 행동에 따른 책임론을 제기하지만 실은 할례파(골 4:10-11)였던 그의 신학적 풍토를 통 큰 마음으로 품지 못한 바울의 성품도 문제였습니다. 물론 엘리사나 바울의 책임론에 대해 성경은 함구하죠.

메르스에 대해서도 국민들 절반 이상이 그렇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나라의 대통령은 그에 대해 책임질 위치에 서 있지 않다고 말이죠. 그 일은 지극히 작은 개인의 미숙한 행동 때문에 붉어진 일이라고 말이죠.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그에 대한 책임감을 뒤늦게라도 통감했는지 미국 순방길도 미루면서 메르스 차단에 주력코자 하고 있습니다. 국민 여론에 떠밀려서 행한 결단으로 평가하는 이들도 없지 않지만, 지극히 책임감 있는 모습입니다.

아무쪼록 이 땅의 크리스천들이 여리고 성 전투와 아이 성 전투를 통해 깊이 깨달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신실한 크리스천이라면 무속적인 신앙 행위의 '땅 밟기 기도'보다 자신의 삶으로 하나님나라를 보여 주는 선교 전략을 구사했으면 합니다. 크리스천들이 나라 곳곳의 지도자의 자리에 앉아 있다면 공의로운 삶에 더욱 매진하면 좋겠습니다. 물론 책임질 일이 있으면 그걸 감추려고 애쓰기보다 성실하게 책임지는 모습도 보여 주면 더욱 좋겠습니다. 그것만이 환골탈퇴하는 길이요, 그것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올곧게 세울 수 있는 길이니 말입니다. 샬롬.

각주)
1) www.chabad.org/library/bible_cdo/aid/15786#showrashi=true
2) ydch.or.kr/index.php?document_srl=456&mid=bible
3) repress.kr/archives/962
4) www.newspower.co.kr/sub_read.html?uid=16492&section=sc4
5) iktinos.org/seminar/upfile/070322%EB%B0%95%ED%98%95%EB%8C%80.pdf
6) 김상래, "아이 성 정복 실패가 진정 아간 때문만인가?", <구약논단 제18권 4호>(통권46집)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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