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거(Duggar) 가족은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가족 중 하나다. 재벌가도 정치 명문가도 아닌 이들이 유명해진 것은, 2008년 '더거 부부와 17명의 아이들'이라는 프로그램이 방송되면서부터다. 이 프로그램은 가족의 실생활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는 리얼리티 쇼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더거 부부는 자녀를 17명이나 낳았다.

해가 지나고 시즌이 거듭되는 과정에서 아빠 짐 밥(Jim Bob)과 엄마 미셸(Michelle)은 두 명의 아이를 더 낳았다. 쇼가 시작할 당시 17명이었던 자녀들은 현재 19명이 되었다. 그 사이 더거 부부의 큰아들 조시(Josh)가 결혼해서 세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고 큰딸 질(Jill)도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쇼는 큰 인기를 끌었다. 특히 미국 남부의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더거 부부를 극찬했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순종해 피임이나 낙태 없이 19명이나 되는 아이를 낳았다는 이유에서였다.

더거 부부가 처음부터 많은 자녀를 원했던 것은 아니다. 결혼 초에 피임약을 복용하던 미셸은 아들 조시를 낳은 후 유산의 아픔을 겪었다. 유산이 피임약을 복용한 죄 때문이라고 생각한 더거 부부는 생각을 바꿨다. 자녀는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기에 아이가 생기면 감사한 마음으로 낳았다고 했다.

▲ 미국에서 더거 가족은 유명 인사다. 아빠 짐 밥(Jim Bob)과 엄마 미셸(Michelle)은 무려 19명의 자녀를 낳았다. 이들은 2008년부터 가족이 생활하는 모습 그대로를 보여 주는 '더거 부부와 19명의 아이들'이라는 TV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독실한 침례교인인 더거 부부는 성서를 토대로 엄격한 생활양식을 고수하며 공교육을 거부하고 자녀 전부를 홈스쿨링으로 교육했다. ('19 kids and counting' 페이스북 페이지 갈무리)

19라는 숫자와 더불어 더거 부부의 생활양식도 시청자의 이목을 끌었다. 이들은 독실한 침례교 신자로 자녀의 옷차림과 생활 방식도 성서를 토대로 정한 룰에 따라 엄격하게 제어했다. 여자 아이들은 머리를 짧게 잘라서는 안 되고, 허벅지를 드러내는 옷을 입을 수 없었다. 남자 아이는 머리카락과 수염 기르는 것을 금지했다. 해변이나 공공 수영장에서 수영하는 것도 금했다. 다른 사람들을 미혹한다는 이유였다. 또 공교육 대신에 성경에 기초한 홈스쿨링을 주장하며 모든 아이들을 집에서 교육했다.

더거 부부를 향한 미국인들의 긍정적인 시선은 지난주를 기점으로 바뀌었다. 5월 21일, <인터치>라는 주간지는 더거 부부의 큰 아들 조시가 십대 시절 5명의 소녀를 성추행했다고 보도했다. 이 잡지는 과거 작성된 경찰 조사 보고서를 입수해 당시의 모든 기록을 공개했다. 보고서는 조시가 2002년부터 소녀들을 추행하기 시작했는데, 주로 소녀들이 자고 있는 틈을 타서 신체 주요 부위를 만졌다고 했다.

조시는 성추행을 처음 저지른 후 이 사실을 아버지에게 털어놨지만, 더거 부부는 경찰에 알리지 않았다. 이들은 모든 일을 철저하게 비밀에 부쳤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조시에게 성추행을 당한 소녀는 5명으로 늘어났다. 몇 명인지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중에는 조시의 어린 여동생들도 있었다.

2006년, 더거 부부는 자녀들을 데리고 오프라 윈프리 쇼에 출연할 기회를 얻었다. 방송 녹화 전, 더거 부부와 관련한 이메일 한 통이 제작사 스튜디오에 도착했다. 익명으로 도착한 투서에는 조시가 과거 미성년자를 성추행한 사실과 더거 부부가 이것을 알고도 경찰에 알리지 않은 점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제작사는 이 사실을 아동 학대 기관에 알렸고 더거 가족의 오프라 윈프리 쇼 출연은 무산됐다. 같은 해, 경찰은 더거 부부와 아들 조시를 수사하기 시작했다.

수사 과정에서 그동안 숨겨진 이야기들이 드러났다. 아들 조시가 자신의 잘못을 고백한 그 해에 아버지 짐 밥은 경찰을 찾지 않고, 다니던 교회 장로들과 아들 문제를 상의했다. 장로들이 제시한 해결책은 성적 충동을 억제하는 카운슬링을 받는 것이었다. 부부는 이 제안을 수용해 몸을 쓰고, 정신 상담을 받는 캠프에 조시를 보냈다고 했다. 그러나 경찰 조사 결과 더거 부부가 조시를 보낸 곳은 단순한 여름 성경 캠프라는 것이 밝혀졌다.

조시는 자신의 문제가 보도된 직후 사과문을 발표했다. 자신이 과거에 저지른 잘못으로 사랑하는 가족과 지인들에게 상처를 준 점에 대해 용서를 구한다고 했다. 또 자신은 예수님 안에서 용서받았고, 현재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고 있는 것에 감사하다고 했다.

사과문을 발표한 조시는 2013년부터 근무하던 가족연구위원회(Family Research Council·FRC)에도 사표를 냈다. FRC는 가장 보수적인 성향을 띄는 기독교 단체로 낙태를 반대하고, 어떤 형태로든 동성 간의 결합을 반대한다.

같은 날, 더거 부부도 성명서를 발표했다. 더거 부부는 자신들이 TV에 나오는 것처럼 "완벽한 가족은 아니다"고 했다. 그러면서 "조시가 어렸을 때 아주 나쁜 실수를 저질렀다. 우리는 그를 잘못된 길에서 돌이키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어두운 과거가 우리를 더 하나님께 매달리게 했다"고 밝혔다.

▲ 조시(왼쪽)는 더거 가족의 장남이다. 20대 초반에 결혼해 벌써 세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 5월 21일, 미국의 한 주간지는 조시가 십대 때 여러 소녀들을 성추행한 사실을 보도했다. 보도 직후 더거 부부, 조시와 그의 아내 애나는 각각 사과문을 발표했다. 이 사과문에서 지난날의 실수로 가족들에게 상처를 준 점은 미안하다고 했지만, 피해자들에게 용서를 구하는 내용은 없었다. 조시는 평소 공화당의 거물 정치인들과 친분을 과시하기도 했다. 사진 오른쪽은 공화당 차기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선 테드 크루즈(Ted Cruz) 텍사스 주 상원 의원. (조시 더거 페이스북 페이지 갈무리)

평소 이들을 지지하던 기독교인들은 더거 가족이 모두 사과했으니 조시를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분위기다. 한 예로 공화당 내에서 차기 대선 후보로 유력한 마이크 허커비(Mike Huckabee)는 "조시가 어린 날에 저지른 잘못은 그 스스로 규정했듯이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용서받지 못하는' 일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선한 사람들도 때로 잘못을 범하고 후회할 행동을 하며 심지어 역겨운 짓도 할 수 있다"고 조시를 두둔했다.

일부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더거 가족을 지지하지만 여론은 그렇지 않다. 올해 초부터 "더거 부부와 19명의 아이들" 열 번째 시즌을 방송하고 있던 TLC 방송국은 이번 주부터 해당 프로그램을 중단하기로 했다.

조시가 발표한 사과문의 진정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워싱턴포스트>는 조시가 발표한 사과문에는 피해자에게 사죄하는 부분이 없다는 것을 꼬집었다. 조시가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하는 대신 예수님과 하나님을 언급한 것은 문제의 본질을 흐리고 기독교인의 동정심을 유발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어떤 이들은 이번 사건이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의 이중적인 도덕성을 보여 주는 단적인 예라고 했다. 여성주의 블로거 어맨다 마콧(Amanda Marcotte)은 <슬레이트>에 쓴 글에서 이들이 겉으로는 엄격한 성 규범을 강조하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의 삶을 살고 있는 경우도 분명히 있다고 지적했다.

2014년, 더거 부부와 친분이 있는 더그 필립스(Doug Phillips) 비전 포럼 대표는 섹스 스캔들로 대표직을 사퇴했다. 더거 가족의 멘토를 자처하던 빌 가써드(Bill Gothard) 목사도 같은 해, 자신이 대표를 맡고 있던 단체의 여직원 여러 명을 성추행한 혐의로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필립스와 가써드는 더거 부부처럼 기독교 가부장제를 주장하는 근본주의 기독교인이다. 자녀를 많이 낳아 대가족을 만들고, 성경이 기반이 된 홈스쿨링으로 자녀들을 교육하며, 보수적인 옷차림을 주장했다.

더거 부부가 아들을 돕겠다고 만나고 다닌 사람도 도마에 올랐다. 짐 밥은 교인 중에 주 경찰관이 있어서 그에게 문제를 털어놨지만, 그는 모든 이야기를 듣고도 관계 기관에 신고하지 않았다. <인터치>는 현재 그가 아동 포르노 제작 혐의로 56년 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복역 중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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