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치 네이선(Rich Nathan) 빈야드콜럼버스교회 담임목사가 교회 주보에 쓴 칼럼들을 번역해 연재한다. 그는 종교학, 역사학, 법학을 전공한 후 변호사이자 오하이오주립대학교의 교수로 재직하던 중 부르심을 받아 1987년부터 빈야드콜럼버스교회 담임목사로 있다. 현재 빈야드콜럼버스 교회는 네 개의 위성 교회를 가진 교회로 성장했다. 리치 네이선 목사는 복음 전도와 사회정의라는 복음주의 교회의 사명을 완수하여 복음의 온전성이 드러나도록 하기 위해 애써 왔다. 해외 선교와 아울러 노숙자와 이민자들을 섬기는 사역에 주력해 왔다. 그는 미국에서 대내외적으로 유명한 강연자이며 많은 사람들이 지역 방송을 통해 그의 설교를 듣고 있다. - 역자 주

오늘날 미국에 사는 성인들은, 테러리스트들이 두 대의 여객기를 몰고 세계무역센터 트윈타워로 돌진함으로써 3,000여 명이 죽임을 당했을 때, 자신들이 어디에 있었는지 거의 대부분 기억할 것입니다. 나는 메인 주에서 엄청난 충격과 공포 가운데 그 타워가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2년 전, 한 젊은이가 총을 들고 샌디훅초등학교에 들어가서 20명의 어린이들을 죽였을 때, 온 나라가 슬픔에 잠겼습니다. 

그보다 몇 년 전에, 아내 말린과 나는 폴란드에 있는 아우슈비츠강제수용소를 방문했습니다. 나는 가스실이 있는 어둠 속에 홀로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전 지구적인 비극이나 개인적인 고난이 우리에게 덮칠 때 항상 묻게 되는 질문을 하나님께 던졌습니다. "아버지, 이 사람들이 죽을 때, 당신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아버지, 왜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내버려 두셨습니까? 이다지도 엄청난 비극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고통이나 고난이 지적이고 철학적인 주제는 물론 아닙니다.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입니다. 고난이 닥칠 때마다 우리는 어떤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느끼고, 그에 대한 해답을 찾아 헤매기를 되풀이합니다. 마치 새로운 상처가 생길 때마다 새롭게 고통을 경험하게 되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정통 기독교인들이 씨름해야 할 문제는 단순합니다. 다음 세 가지 명제를 명확히 해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선하시다.
둘째,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셋째, 악은 실재한다.

오늘날 리처드 도킨스와 같은 '새로운 무신론자' 중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부정합니다. 도킨스는 하나님에 대해 "질투심이 많고, 그것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는 소인배, 부당하고, 용서하지 않고 조종하기 좋아하는 괴물, 보복적인 소수민족 살해자, 동성애 혐오자, 인종주의자, 유아 살해자, 사악한 협박자"라고 묘사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긍정하지만 (특히 유신론자들 가운데)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왜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까 >라는 책으로 유명한 쿠쉬너(Harold S. Kushiner)라는 랍비는 책에서, 하나님은 나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막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고 싶어도, 그렇게 하지 못하신다고 말입니다. 힌두교나 불교와 같은 동양 종교에서는 악이 실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다만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기독교인들에게 악은 실재하는 것입니다. 악은 단순히 마음의 상태가 아닙니다. 

악에 대한 기독교적 시각

정통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서 태초에 악을 만들지 않으셨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들이 좋았습니다. 악은 인간이나 천사가 자유의지를 남용한 결과로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악은 실체가 아니며 다만 부정에 불과한 것이라고 아우구스티누스가 일깨워 줍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표현에 따르면, '악은 선의 부재'입니다. 흔히 악은 어둠에 비유됩니다. 어둠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빛이 없는 상태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어둠을 선택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빛을 꺼 버리는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고난과 죄는 단순한 관계가 아닙니다

자연재해가 있을 때마다 자신이 하나님과 '대화 채널'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주장하는 건방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마치 자신들이 그 재앙의 의미를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곤 합니다. 예를 들면, 주제 넘게 어떤 사람들은, 허리케인 카트리나는 뉴올리언즈 지역 주민들이 지은 죄악에 대한 처벌로 보낸 것이 명백하다고 말합니다. 이 같은 주장은 다음의 사실을 알게 되면 유지하기 어렵게 됩니다. 제방이 무너졌을 때, 악명 높은 버본 거리는 허리케인이 가져온 최악의 피해 범위에서 벗어나고 오히려 저지대 지역에 사는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휩쓸려 가 버렸다는 사실입니다.

욥기서는 성경의 중간에 아주 적절하게 자리 잡고 있는데, 죄와 고난에 관한 단순 방정식에 대하여 웅변적으로 대응하는 책입니다. 이 타락한 세상은 우리가 얼마나 악한가에 따라 고난을 할당하지 않습니다. 또한 선에 비례해서 형통하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언젠가 그 저울이 완벽하게 균형을 이룰 때가 있을 것이지만, 오늘날 완벽한 정의를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 왕국에 주님의 왕국이 아직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악을 허락하지만, 고난을 선으로 변화시킵니다

요셉은 창세기 50장 20절에서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라고 합니다. 요셉의 형제들은 그를 해치려고 불의하게 행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악한 행동을 사용하셔서 그들이 원래 의도한 것과는 완전히 반대의 목적이 이루어지도록 하셨습니다.

1963년에 네 명의 소녀가 교회에서 일어난 폭발 사고(백인우월주의자들이 앨라배마 주 버밍햄의 흑인 교회에서 일으킨 폭발 테러로 인해, 네 명의 소녀가 희생되었으나, 오히려 이로 인해 흑백 인종 분리 제도가 철폐되는 결과를 가져온 사건-역자 주)로 죽었을 때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설교에서 이 점을 분명히 언급하였습니다. 당시 추도식에서 킹 박사가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악에서 선을 비틀어 짜내는 방법을 쓰고 계십니다." 기독교 신앙은 인간적인 기대가 완전히 꺾여 버리고 가망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을 하나님께서 변화시킬 능력이 있다는 믿음을 붙잡는 것입니다. 온갖 고초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최악의 상황에서 축복과 기쁨을 짜내어 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9장 20절에서 선포하셨듯이, "사람에게는 불가능하나,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고난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모델

하나님과 고난이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모델을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결코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극도의 고난이 닥쳐 왔다 해도 우리는 하나님을 끊임없이 믿어야 합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인간의 고난에 독특하게 참여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고통을 직접 당하셨습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에서 명료하게 언급된 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고난에 참여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고난을 단지 긍휼히 여기시지만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악과 고난을 이기시고 없이 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과 창조물들에게 나타나게 될 영광의 첫 열매가 되십니다.

악과 고난에 대한 기독인들의 자세

악과 고난을 당면하게 될 때, 기독교인들은 슬퍼하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로마서 12장 15절 말씀은 믿는 자들에게 "기뻐하는 자들과 함께 기뻐하고 통곡하는 자들과 함께 통곡하라"고 가르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오빠인 나사로가 죽었을 때, 마리아와 함께 슬퍼하셨습니다.

기독교인들에 대한 두 번째 부르심은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치유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정의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을 더욱더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고난에 대해서 중보하는 제사장들과 같은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이 상처 입은 세상에 치유와 정의를 가져오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슬퍼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슬픔과 기도는 반드시 이 세상의 고통을 덜어 주는 행동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 25:35-36).

강희정 / 번역

*이 글의 저작권은 리치 네이선 목사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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