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안 성도'란 교회를 안 나가는 성도를 의미하는 신조어입니다. 이는 '안 나가'를 거꾸로 한 용어에서 유래한다고 합니다. 현재 가나안 성도가 얼마나 되는지는 정확한 자료가 없습니다. 다만 지난 20여 년간의 급격한 교인 감소세를 고려한다면 대략 100만 명은 넘으리라는 추산이 가능하며 앞으로도 계속 증가할 것이라는 우려가 매우 큰 상황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가나안 성도의 원조는 서구 교회의 성도들입니다. 이분들은 교회에 등록이 되어 있고 분명히 신앙고백도 하고 있는데, 교회는 거의 출석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다 성탄절이나 부활절 또는 감사절에만 간간히 출석하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래도 어쩌다 이들이 교회에 나타나면 대부분의 목사님은 섭섭한 내색이 없이 도리어 동지섣달 꽃 본듯이 반기십니다. 그러니 이젠 거의 서구 교회의 독특한 문화가 된 셈입니다.

그런데 서구 교회와 한국의 가나안 성도들은 서로 좀 다릅니다. 여러 가지 분석이 가능하겠지만, 가장 결정적 차이는 교회를 향한 충성도에서 크게 다릅니다. 전자는 충성도가 부족해서 교회에 안 나오는 경우가 많지만, 후자는 충성도가 높은데도 불구하고 교회를 떠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국 교인들의 교회를 향한 열심은 아마 세계 최고 수준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가나안 성도들을 살펴보면 교회 생활을 오래 하신 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역으로 말하자면 오랜 교회 생활이 성도를 너무 실망시키거나 지치게 하고 낙심케 한 것입니다. 또는 '불편한 진실'을 너무 많이 알게 되어서일 수 있습니다.

교회를 떠나는 이유

그분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는 교인들에 대한 실망, 목회자에 대한 불만, 독선적 교회 운영, 직분자들의 부정과 비리, 헌금 또는 십일조 강요, 예배 강요, 구복주의, 성장주의, 성직주의, 지나친 간섭, 신앙 갈등, 사생활 침해, 세속적 유혹, 틀에 박힌 교회 활동 등 매우 다양합니다. 물론 이것이 전부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개인에 따라 별도의 절실한 사유들이 더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한국교회가 단기간 내에 가나안 성도를 이처럼 많이 양산한 데에는 어느 정도 일반적이며 공통적인 원인이 있습니다.

우선은 지도자의 품성과 자질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경건하고 진실한 목회자를 갈수록 보기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거기에 가장 기여한 것이 각 교단의 무분별한 성장 의욕으로 인한 신학교의 난립과 확장입니다. 게다가 군소 교단마다 무인가 신학교들이 넘쳐나고 소위 말하는 '묻지 마 목사 안수'가 성행하고 있습니다. 개나 소나 신학교로 달려가는 것을 아무도 못 말리는 어지러운 현실이 된 것입니다.

과연 한국교회보다 더 저급한 목회자가 많은 나라가 얼마나 있는지 한번 살펴보십시오. 아직도 대부분의 국가에서 개신교 목사는 지역의 종교 지도자로서 여전히 사회적 존중을 받고 있습니다. 반면에 요즘 한국에서 뜨고 있는 횡령 목사, 표절 목사, 성추행 목사, 세습 목사, 그리고 은근히 이들을 편드는 기회주의 목사들을 보자면 한마디로 안면 몰수에 후안무치입니다. 인간의 기본 양심마저 포기한 '영적 졸부'들이 온갖 고상한 미사여구를 늘어놓으며 위선을 떨고 있습니다. 강단에선 멀쩡한 목사이나 내려오면 슬며시 '먹사'로 변신하는 놀라운 능력을 지닌 분들이지요.

더구나 단일 국가에 등록된 장로교 교단만 해도 대략 200개가 넘고, 비등록 교단까지 합치면 무려 400여 개로 추산되는 이런 비정상적인 교회가 결코 정상적인 사역을 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아마 장로교 창시자인 칼뱅도 이런 기가 막힌 상황은 상상조차 못 했을 것입니다.

누가 무슨 변명을 하든 한국교회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지도자 문제입니다. 교회 문제가 교권 남용, 공금 유용, 재정 비리, 성추행, 교회 세습, 그리고 교회 사유화 등 여러 모습으로 복잡하게 표출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실제 그 근원을 추적하면 결국은 목회자의 자질이라는 뿌리에서 만나게 됩니다.

가나안 성도를 만드는 또 다른 원인은 교인들에게도 있습니다. 이는 교회 내에서 빈부나 직업에 따른 차별, 험담, 방종, 부도덕한 사회생활, 사업 실패, 가정불화, 건강 악화, 그리고 신앙적 갈등 등 교역자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이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입니다. 가나안 현상은 목사만의 일방적인 책임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런 사실이 교회에 면죄부를 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고, 목사가 목사답지 못해서 교회를 떠나는 분들이 가장 많기 때문입니다.

기득권의 꿀맛

1990년대를 기점으로 하여 한국교회의 성장세는 급격하게 둔화하더니 급기야는 감소세로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제도권 교회들이 문을 닫고 목회자들이 실직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교인 수는 별로 늘지 못하는데, 교회 수와 목회자 수를 과도하게 늘린 결과입니다. 심지어 앞으로는 더욱 악화하여 한 세대 안에 개신교 교인 수가 아예 반 토막이 날 것이라는 비관적 예측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같이 심한 감소세는 단순히 수요 공급의 경제학적 문제만은 아님을 이해해야 합니다. 한국 가톨릭은 같은 기간 성당이나 사제의 공급과 상관이 없이 오히려 급격한 성장을 이루었으니까요.

이런 현실은 결국 개신교가 이제는 어떤 한계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시사해 줍니다. 그 원인이 무엇이든, 기존의 사각형 교회만으로는 그 사역의 임계점에 도달한 것이 아닌가 하는 강한 의구심을 던져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많은 성도들이 교회를 떠나는 시대를 맞고 있습니다. 세상이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변하고 있는데도 교회당 속에 안주한 목회자들의 삶과 설교는 과거보다 별반 나아진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흔히 하는 말이 있습니다. "목사님이 나가서 한번 그렇게 살아 보세요!"

이래도 전처럼 계속 교회 건축에나 열을 올리며 교인 수와 헌금액만 세고 있어야 할까요. 아니면 기득권은 꿀맛이니 변화는 싫습니까. 여기서 논하는 기득권이란 그리 난해한 말이 아닙니다. 이미 확보한 과도한 교권과 인맥과 학맥을 최대한 이용하여 불의하게 소유한 종교적 이권을 의미합니다. 때로는 목사에게 주어진 독점적 설교권, 영구직 당회장권, 재정 간섭권, 교역자 인사권, 그리고 교인 치리권 등이 여기에 포함됩니다.

외견상으론 교회가 당회와 제직회와 공동의회를 통하여 제법 민주적 절차를 따르는 듯 보이나, 실제론 담임목사 개인의 입김에 따라 변칙적으로 운영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말로는 모든 사역자가 동역하는 교회라고 흔히 주장하지만, 사실상 대부분은 '공동 목회'를 적극 기피하고 '담임 목회'만 고집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분명한 점은 지금 이대로는 곤란하다는 사실입니다. 교권과 돈의 단맛에 중독된 현재의 모습으로는 교회가 새 시대의 새로운 도전에 바른 대응을 할 수 없습니다. 중세 교회는 온 세상이 변하고 있는데도 유독 '자기 변화'를 거부하다가 망한 교회입니다.

요즘 한국교회가 아주 비슷한 모습입니다. 세상은 부패 정치 근절을 위해 칼을 들고 있는데, 교회 정치는 뇌물을 뿌리며 여전히 썩어 가고 있습니다. 세상 지도자들은 권위주의를 버리고 있는데, 교회는 아직도 유대교의 바리새적 제사장 놀음을 방조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나누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교회는 오히려 더 갖기 위해 욕심을 부립니다. 양들은 세상에서 말라가고 있는데, 교회는 만날 몸집만 키우려 합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들을 보면 십자가의 도를 따르는 기독교 정신은 희미해지고, 중세적 '무사태평'과 '만수무강'이 시대정신이 되어 버렸습니다.

교회가 달라져야 합니다. 더 이상 '건물 교회'만이 거룩한 교회라고 고집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교회는 시대에 따라 달라졌습니다. 처음 초대교회는 가정 교회, 그 다음 박해 시대엔 카타콤 지하 교회, 중세 시대에는 통일된 가톨릭교회, 그리고 현재는 분화된 사각형 교회 시대입니다, 이제 앞으로는 어떤 교회를 이루어야 할까요?

아세라 목상처럼 요지부동

우리는 교회가 허욕을 버리고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는 초대교회를 따라 모두 외형상 가정 교회로 돌아가자는 말이 아닙니다. 순수한 복음만을 들고 사역하던 초기 '사도들의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의미입니다.

성도들이 교회를 떠나는 가장 큰 이유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향기를 잃고 상한 고등어처럼 변질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교회는 세상보다 더 세속적입니다. 중세 영주처럼 교회가 가난한 이들은 외면하면서 너무나 많은 권력과 금력을 쥐고 있습니다. 세상은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건만 막강한 교권과 이권을 지닌 목사님과 교회는 아세라 목상처럼 요지부동입니다. 그러니 할 수 없이 힘없는 교인이 떠날 수밖에요.

축도 한 번 하고 300만 원을, 설교 한 번 하고 500만 원을 태연하게 주고받은 교회도 있습니다. 굳이 이 정도는 아니더라도 외부 강사로 설교 한두 번 하고 50만 원 또는 100만 원씩 당당하게 퍼 가는 교회들은 아주 부지기수로 많습니다. 말로는 늘 거룩한 교회라고 떠들지만 세상 비즈니스도 이렇게 비열한 비즈니스는 없습니다. 이들이 목사 집단인지 장사 집단인지 참으로 헷갈릴 정도입니다.

세련된 예배로 신도 동원에는 열심이지만 공의를 위한 희생은 기피하고 가난한 이들을 별로 돌보지 않는 교회, 강단을 긴 옷 입은 삯꾼들에게 내주고 맹신적 아멘만 복창하는 교회, 부패한 비리 목사는 보호하면서 양심적 성도를 무더기로 고소하는 교회, 예수님의 복음을 철 지난 십일조 율법의 껍데기로 가포장하여 돈만 분주히 걷는 교회, 그리고 교회 장부는 죽기 살기로 숨기면서 땅끝까지 전도하자고 열 내는 교회, 이게 우리들의 슬픈 자화상은 아닌지요.

특히 최근 무차별로 성도를 고소하는 일부 목사들을 보노라면 거의 막장 드라마 수준으로 느껴집니다. 목사가 단 한마디만 말하거나, 또는 재정 장부나 서류 한 장만 공개해도 간단히 해소될 의혹들을 굳이 엉뚱한 '명예훼손죄'로 자기 교인들을 고소까지 하며 버텨야만 하는 그 절박한 사연이 과연 뭘까요. 하여간에 그 잘난 명예를 거론하며 세상 법정으로 달려가는 목사들 중에 제대로 된 위인을 본 기억은 별로 없습니다. 이러니 '강도의 소굴'이 따로 없다는 탄식이 절로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지적들이 지나친 과장이라고 생각하십니까. 20여 년 전 어느 작은 도시에서 한 가나안 성도를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이야기가 너무 슬펐습니다. 그 도시의 교회들을 거의 다 다녀보았는데 모두 도토리 키 재기로 돈만 밝히더랍니다.

물론 아직도 신실한 목회자들과 건강한 교회들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또한 유형 교회 중에 흠이 없이 완벽한 교회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흠도 흠 나름입니다. 그 정도가 너무 심하다면 떠나는 성도들을 결코 비난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물론 어떤 경우든 교회를 떠나라고 권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또한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가나안 성도가 되는 분도 매우 드뭅니다. 그들 대부분이 참고 또 참다가 더 이상 견디기 괴로워 떠나는 것이지요. 어찌 보면 성도들이 교회를 떠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지역 교회가 먼저 맘몬과 짝하여 그 순결을 상실하고 그들을 버린 것은 아닐까요. 설마 이 대목에서도 또 중세적 '교회 무오설'을 주장하시는 분은 없겠지요.

교회는 본질을 추구해야

새로운 시대에는 교회도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래서 떠나간 성도들을 다시 품을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가나안 성도들을 마치 '버릇없는 자식'이나 '집 나간 탕자'처럼 일방적으로 매도하면 곤란합니다. 오히려 바람난 어미 '고멜'처럼 그동안 교회가 먼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미리 사죄하고 회개해야 옳을 것입니다.

이미 미국에서는 많은 가나안 성도들이 가정 교회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오고 있습니다. 이제는 한국교회도 다양한 모습의 교회 모델을 연구하고 이를 실천해야 할 때입니다. 이는 단지 방법론의 문제만이 아니라, 근본적인 사고의 변혁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도자들이 부패한 시대에는 성도들이 나서야 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기존 제도권 교회를 무시하거나 거부하자는 것이 이 글의 의도는 절대로 아닙니다. 기존 교회도 바르게 개혁하면 정말 좋습니다. 따라서 가능하면 먼저 '바른 교회'를 찾아서 출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지역 교회를 더욱 견실하게 세우며 겸손히 섬기시기를 바랍니다. 필자는 언제나 '교회주의자'입니다. 교회를 사랑하고, 오직 교회만이 이 땅의 마지막 선지자라고 믿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교회의 정의를 보다 바르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도들 모아 놓고, 번듯한 건물 짓고, 예배하고, 선교하고, 구제하고, 그리고 봉사한다고 다 바른 교회가 아닙니다. 그런 좋은 명분을 빌미로 하여 도리어 성도를 율법으로 억압하고, 착취하고, 그리고 이용해 먹는 거짓되고 사악한 무리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젠 교회를 정말 교회답게 바꾸어야 합니다. 그 이름이 회복이든, 갱신이든, 또는 개혁이든 그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그 교회 형태가 기존의 사각형 교회이든, 가정 교회이든, 평신도 교회이든, 회중 교회이든, 또는 새로운 모습의 다른 공동체이든 다 좋습니다.

거대한 이슬람교가 단지 한 가정의 모임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잘 아실 것입니다. 하물며 진리이신 예수님을 소유한 한국교회가 바로 서기만 한다면 교회가 몇 명으로 시작하든, 또는 몇 명이 모이든 그 숫자가 무슨 장애가 되겠습니까. 그리고 가정이 교회가 되든, 지인들 모임이 교회가 되든, 친척 모임이 교회가 되든, 직장 모임이 교회가 되든, 또는 마을의 어떤 작은 공동체가 교회가 되든 뭐 어떻습니까.

사실상 신약의 초기 교회들은 거의 다 가정에서 모이던 '작은 교회'였습니다. 더구나 예수님께서 처음에 주도하신 그 공동체는 단지 12명뿐이었습니다. 거기엔 거창한 교회당도 없고, 장로도 없고, 성가대도 없고, 주일예배도 없고, 십일조도 없고, 그리고 주보도 없었습니다. 이는 저런 것들이 모두 중요하지 않거나 불필요하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들이 교회와 신앙의 본질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가나안 공동체'도 거룩한 교회이다

예수님의 복음을 가장 가로막던 자들은 로마의 이교도들이나 아덴의 무신론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소위 스스로 하나님을 제법 잘 섬긴다고 자족하던 당시 제도권 교회의 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기독교 진리를 가장 왜곡하는 자들은 '기독교 안티'가 아니라, 한국교회 내에서 불의한 교권을 장악하고 외형상 정통으로 행세하고 있는 위선적 지도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비밀과 하늘의 소망을 간직한 가나안 성도 여러분, 모두 힘내십시오. 제도권 교회들이 언제나 지상 유일의 교회는 아닙니다. 루터와 칼뱅과 웨슬리도 당시 제도권 교회인 중세 가톨릭과 영국성공회의 배척을 받던 성도였습니다. 물론 예수님과 사도들도 제도권 교회인 유대교의 핍박을 받으셨습니다.

따라서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임을 스스로 부인하지 않는 한 여러분은 결코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떠난 것이 아닙니다. 어찌 보면 '가나안 성도'라고 분류하는 일반적 기준조차 사실 제도권 교회들의 극히 일방적이며 오만한 시각일 수 있습니다. 마치 '건물 교회'만이 진정한 교회라는 착각이지요.

그러나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성도 자신이 교회입니다. 비록 건물이 없더라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성도들이 모인 곳이라면 그곳이 곧 교회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이미 가나안 공동체의 훌륭한 성도입니다. 그리고 거룩한 사역은 큰 교회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 로마 지하 교회의 성도들은 죽음의 박해도 이겨 냈습니다. 그에 비해 지금은 얼마나 자유로운 시대입니까.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망국적인 '성전주의'와 '성직주의'를 극복하고 바른 사역에 힘을 쏟을 때입니다. 따라서 주변에 건강한 교회가 없다고 너무 낙심하거나, 또는 전처럼 '영적 노숙자'가 되어 이 교회 저 교회를 떠돌며 세월을 허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느니 차라리 소수라도 주님 안에서 서로 합심하여 모이고, 비록 높은 종탑이 없더라도 구태의연한 '종교적 공동체'를 청산하고, 우리 가정이나 이웃을 직접 '성경적 공동체'로 가꾸어 보면 어떨까요. 그래서 예수님의 작은 제자로서 '바른 교회'를 향한 노력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사랑이 식어진 곳 거기에 주님이 계십니다.

샬롬!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애 5:21)."

신성남 / 집사·<어쩔까나 한국교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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