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12일 교황청으로 사도좌 정기 방문(Ad Limina Apostolorum)한 한국천주교주교단에게 프란치스코 교황은 "사제들이 안락함을 추구하고 신자 위에 군림하는 경향이 있다. 한국교회는 평신도로부터 시작됐고, 사제들은 한국교회에 맨 마지막에 도착한 자들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교황의 언급은 한국교회사를 한마디로 정리한 것이지만, 동시에 한국교회의 개혁이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하는가를 명확히 지적한 것이다. 지난 방한 때 주교단과의 만남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를 주문하면서 "교회의 예언자적 구조에서 가난한 이들을 제거하려는 유혹에 빠지지 마십시오"라는 경고와 더불어 권위주의적인 한국교회를 향한 서릿발 같은 죽비 소리였다.

꽃동네 비리 공론화해 성무 정지당한 작은예수회 박성구 신부

작은예수회 사건을 지켜보면서 교도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요즘이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에서 지난해 8월 22일 자 교령 '성무 집행 정지와 인사 발령에 관한 후속 조치'를 통해 작은예수회 총원장 박성구 신부에게 '휴직, 곧 정직 제재의 교정 벌'을 부과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는 교도권이 교회 권력의 한 수단이 된 것은 아닌가 싶어 실망스러웠다.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이 끝나자마자 그 조치가 전격적으로 단행된 시점도 문제지만, 집행 과정에 있어 사목적 배려를 찾아볼 수 없었다. 더욱이 그 조치가 교회 권력에 닿아 있는 꽃동네 문제를 공론화시킨 '괘씸죄'라는 것이 공공연하게 드러났을 때는 못내 씁쓸하기조차 했다.

물론 교도권이 절대 권력이고 상명하복의 갑을관계가 당연시되는 교회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작은예수회가 교도권의 조치 그 부당함을 <진실의소리> 신문을 창간하면서까지 공개적으로 표명한 경우는 한국교회사에 이례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갈등조차도 섬김과 나눔의 그리스도 사랑의 마음으로 풀어낸다면, 무엇보다 교정 벌 철회에 대한 청원을 교도권이 받아들여 희년의 복음 정신에 걸맞게 화해와 일치의 해피 엔딩으로 마무리된다면 오히려 이번 사태가 한국교회의 고질적 문제로 비판받는 권위주의를 극복하고 복음 공동체로 거듭나게 만드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것으로 본다.

거룩하나 죄인들의 교회, 회심의 과정은 교회도 필요하다

그럴지라도 이번 사태 앞에서 지난 이천 년 교회사에서 교도권이 성숙된 자세로 대처하지 못해 파생시켰던 갖가지 사례들이 클로즈업되면서 한없는 아픔을 느꼈다. 인류 역사에서 그리스도교라는 기둥은 우주목(宇宙木)에 비겨도 무방할 정도로 대단하다. 세상 끝날까지라는 시간적 의미나 세계 최대 종교라는 공간적 의미에서뿐 아니라, 종교학자 오토(Rudolf Otto)가 말한 누멘(Numen)적 요소의 현현적 실체로서 마치 잃어버린 신화시대의 거인이 다시 나타난 것만 같게도 느껴진다. 하지만 교도권, 교회 곳곳에 그토록 철저하고 수많은 안전장치를 마련해 놓고도 어찌 그리도 무수히 잘못을 거듭했던가.

지난 2,000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성베드로대성당에서 봉헌된 '용서의 날' 미사를 통해 <회상과 화해: 교회의 과거 범죄에 대한 정화 의식>이라는 제목의 문헌을 발표해 그리스도교가 이천 년 역사를 통해 예수의 이름으로 인류에게 저지른 일곱 가지 과오를 공식 인정하고 참회하며 용서를 빌었다. 거기에는 나치 정권의 유대인 강제 연행과 홀로코스트에 대한 묵시적 동조, 피로 점철된 십자군 원정과 그리스도교 세계의 분열, 갈릴레오 갈릴레이에 대한 심문을 비롯한 중세의 이단 심문과 고문형이 난무한 종교재판, 신대륙 원주민 학살 방조, 다른 종교와의 반목, 여성에 대한 억압, 1·2차 세계대전 방관 등의 역사적인 과오가 언급되었다.

그런데 일곱 가지 과오 모두가 교도권과 무관하지 않았다. 교도권의 미숙한 대처가 빚은 동방교회와 서방 교회의 분열, 영화 '미션'에서 보듯이 식민지 현실에 대한 제국주의 교회 지도층의 오판, 하물며 이단 심문과 종교재판에서의 오류야 굳이 언급할 필요조차 있을까.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이지만 사람들의 모임이기도 한 교회는 그렇게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거룩하나 죄인들의 교회, 겸손한 자세로 자신을 돌아보며 잘못은 흔쾌히 인정하며 새롭게 태어나는 회개가 신자 개인만이 아니라 교회 전체에도 요청받는 이유다. 그런 회심의 과정을 거듭 통과하면서 교회 역시 늘 새로워져야 할 것이다(Ecclesia semper Reformanda est).

▲ '희년'. 영국 화가 Henry Le Jeune 작품.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공용)

땅이 제자리로 돌아가듯, 교회 역시 제자리를 찾는 희년이 되기를

마침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폐막 50주년을 맞아 프란치스코 교황이 특별 희년(Jubilee of Mercy)을 선포했다. 몸소 깃발을 들고 흔들었던 교회 개혁의 화두를 교회 전체, 더 나아가 전 세계로 확산시키고 지속화하자는 의도로 읽혀진다. 교황 스스로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시작된 일을 교회가 계속하도록 상기하고자 한다"고 밝혔듯이,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반세기만에 재개되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무엇보다 이번 희년이 '50년간 가난을 이유로 팔린 사람과 땅이 제자리를 찾도록 하고, 빚을 탕감해 줌으로써 땅과 사람이 원래는 하느님의 것이었으며, 따라서 하느님에게로 돌려 드린다'는 구약시대의 전통 그 본연의 의미대로, 우리 교회의 모든 것이 제자리를 되찾아가는 계기가 되었으면 싶다.

사도좌 방문 교황 보고 자리에서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 김희중 대주교는 "교황의 방한 이후 한국교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지를 두고 고민했다"면서 "결론은 복음으로 돌아가 주교들이 먼저 '복음의 기쁨'을 살면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 즉 고통받는 이들과 연대하는 것이었다"고 밝혔는데, 지극히 옳은 사목 방향이라고 본다. 그렇게 섬김의 자세로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것에서 사목은 시작되어야 하며, 교도권 역시 단죄하고 심판하는 절대 권력의 자리에서 내려와 '시대의 징표'를 복음의 빛으로 밝혀 참되게 드러내 주고 그 시대의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 더할 수 없이 깊은 결합을 이루는 사목 본래의 역할을 다해야 할 것이다.

과연 인간은 구원되어야 하고 인간 사회는 쇄신되어야 한다. 따라서 '인간사의 전문가'인 교회는 사회의 제반 현실 곧 인간 문제에 대해 결코 무관심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교회는 그분의 실천적 모범에 따라 울타리 밖(눅 14:23) 소외받는 이들의 삶터로 자신을 내어주면서, 세상 구원을 위해 밀알로 썩혀지는 겸허한 교회,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이 선교의 중추적 원리로 자리 잡은 교회, 약자에 대한 배려와 소리 없는 이들의 목소리를 대신하는 교회, 삶의 전반에 공동선을 추구하는 의식이 뿌리내려 가장 보잘것없는 이가 가장 존중받는 교회, 그렇게 하여 가난한 이도 부유한 이도 없이 모두가 한마음 되었던 초대교회 복음공동체 구현에 힘써야 할 것이다. 언제나 교회가 돌아가야 할 희년의 자리는 이천 년 전 복음의 자리 바로 그곳이었다.

정중규 / 대구대학교 한국재활정보연구소 부소장, 정책 네트워크 내일장애인행복포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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