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탄은 너무나도 재주가 좋아서 정말 선한 것이라 할지라도 악하게 바꾸어 버리고 악하게 사용할 수 있는 대단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아무리 선한 말이라 할지라도 악하게 사용되면 영혼을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어 있으며, 그것이 악한 줄도 모르고 대담해지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우리는 이러한 예를 가룟 유다에게서 발견하게 된다. 유월절이 이르기 엿새 전에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가셨을 때였다. 그 동네에서는 예수님을 위하여 잔치가 열렸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와 함께 식사 자리에 있을 때에,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인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렸다. 성경은 그때 부었던 향유의 가치가 대략 남자 장정의 1년치 연봉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들로서는 왜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이렇게 향유를 부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지만,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행위를 두둔하셨다. 이것은 예수님의 장례를 위하여 한 것이라고 말이다.

그때 가룟 유다가 나서서 참견했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요 12:5) 어쩌면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동의를 이끌 수 있는 한마디였을 것이다. 그렇다. 이 세상에 굶어 죽어 가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는데 1년치 연봉에 해당하는 것을 이렇게 낭비해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정도의 금액이면 수많은 사람들을 살리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고,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경건이기 때문이다(약 1:27).

그러나 이 말이 다른 사람이 아닌 가룟 유다의 입에서 나왔다는 것이 아이러니이다. 요한복음은 가룟 유다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했다.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요 12:6). 가룟 유다는 100% 정확한 하나님의 말씀을 한 것이지만, 그 말 뒤에는 그의 탐욕이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는 도둑이었는데 더 많은 돈을 훔쳐 가기 위해서 선한 말을 이용한 것이었다.

오늘날에도 현대판 가룟 유다들이 많이 있다. 이들의 공통된 특징은 가룟 유다처럼 선하고 좋은 말을 한다는 것이다. 선교를 한다고 말하고, 북한의 어린이들을 위한다고 말하고, 아프리카의 가난한 자들을 돕는다고 말하고, 우리나라 군인들에게 복음을 전한다고 말하고, 장애인들과 고아를 돕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선한 목적은 양의 탈을 쓴 이리들이 자신의 주머니를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될 때가 종종 있다. 선교를 한다고 하면서 남의 업적을 자신의 업적인 양 널리 홍보하면서 거두어들인 선교 헌금으로는 오로지 자신을 위해 사용하는 사람도 있고, 장애인들과 고아들을 학대하고 방치하면서 그들의 아픔을 이용해서 더 많은 후원금을 거두어들이는 사람도 있다. 그들이 악을 행하는 데 선한 말처럼 효과적인 것도 없다.

더 나아가 가룟 유다는 선한 말을 자신을 책망하고 돌아보는 데 사용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용도로 사용했다. 가난한 자들을 돌보아야 한다는 말은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외쳐야 하는 구호가 아니라, 사실 나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그렇게 삶을 살기 위해 자신을 채찍질하는 용도로 사용했어야 했다. 하지만 가룟 유다는 자신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을 비방하기 위한 목적으로만 이런 선한 말을 한 것이다. 그의 말은 100% 정확한 하나님의 말씀이었지만, 철저하게 악한 동기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현대판 가룟 유다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은 가룟 유다처럼 선하고 좋은 말을 주장한다. 선교를 해야 한다고 말하고, 복음을 전하여야 한다고 말하고,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자신의 주머니를 열어서 자신의 것을 직접 희생해 가면서 참여하는 일은 드물다. 선교와 부흥과 구제는 교회를 비판하고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자신이 직접 복음을 들고 전도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 몇몇 교회에서 그러는 것처럼 '교회의 부흥'이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담임목사를 축출해 내기 위한 명분일 뿐이지, 교회의 부흥을 위하여 직접 자신이 기도하는 일에 매진하거나 전도하는 일에 앞장서거나 예배나 기도회에 적극적으로 참석하여 교회 전체의 영적 분위기를 긍정적으로 바꾸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신학교도 마찬가지다. 개혁주의 신학이나 보수주의 신학이나 신본주의란 구호는 교수들을 통제하고 장악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기 쉽다. 그 옛날 가룟 유다처럼 자신의 사악한 이익을 최대화하기 위해서 선한 구호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며, 그리고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을 제거하고 비난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실제로 자기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할 생각은 전혀 없으면서 말이다. 성경에서 권고한 대로 차라리 손해를 당할 생각은 없고 성경에서 권고와는 정반대로 빈번하게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이 세상의 법정으로 달려가면서 개혁주의를 외치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현상은 우리 사회 전반에 널리 퍼져 있다. 정치에서도 경제에서도 선한 구호는 언제나 자신들의 탐욕을 정당화하고 이익을 담보하는 데 사용될 때가 많다. 안타깝게도 그러한 구호에 쉽게 속아 넘어가고 있다.

현대판 가룟 유다들은 어쩌면 계속 성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옛날 가룟 유다가 잠시 성공했던 것처럼 말이다. 심지어 예수님을 팔아 은 30을 손에 쥘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 세상의 마지막 심판은 하나님께서 하실 것이며 그때에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하는 판단을 받게 될 것이다.

사실 우리 모두는 가룟 유다와 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다. 나 자신을 포함해서 말이다. 입으로는 사랑해야 한다고 외치면서 실제로는 사랑받기만을 원하는 죄성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 입으로는 선한 말을 하면서 실제로는 악한 일을 도모하고 있는 모습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 우리는 사탄의 기묘한 재주에 쉽게 속아 넘어가서 오늘도 현대판 가룟 유다 짓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마 26:23)고 말씀하시며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에게 마지막 회개의 기회를 주셨던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성경을 통하여 또는 여러 가지 사건들을 통하여 우리의 양심의 문을 두드릴 때 애써 외면하지 말고 회개의 길로 나가야 한다. 그것이 살 길이다. 바로 그런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려 주신 것이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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