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메가처치를 넘어서> / 신광은 지음 / 포이에마 펴냄 / 484쪽 / 1만 8,000원

나는 가나안 신자다. 가나안은 '안 나가'의 거꾸로 읽기다. 가나안 신자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찾지 못해 광야를 헤매는 방랑객이다. 대형 스크린과 웅장한 음향효과, 이미지화된 설교와 운집한 대중의 피상적 하나 됨이 광기를 자아내는 예배 현장은 그저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그의 실존에 견디기 힘든 폭력을 가한다.

구원과 심판을 사후로 던져 놓은 예수 천당은 그에게 현실 도피의 기만적 자기만족을 주는 마약에 불과하다. 진정한 복음은 존재의 피라미드 아래에서 자신을 상품화해야 하는 비참한 노예들을 두드려 깨워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매트릭스가 주는 달콤한 환상에서 벗어나 비루한 현실을 목도하게 하는 빨간 약이다. 그것은 달콤한 사탕이 아니라 짜디짠 소금이다.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온갖 부조리와 폭력, 교회가 세상에 대한 침묵을 넘어서 시대착오적인 특정 이데올로기와 무한정한 탐욕 추구에 신앙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교회가 더 이상 진리를 담지하지 못한다는 결정적 증거가 된다.

하여 그는 그리스도인이지만 교회인이기를 거부한다. 그는 신 앞에 선 단독자임을 자처한다. 하나 그는 고독에 몸부림치는 외로운 단독자다. 끊임없이 간섭하려는 외부의 시선을 물리치는 그의 날카로운 가시는 그에게 다가오려는 이들도 함께 밀어낸다. 그는 고슴도치다.

이런 그에게 있어서 교회 개혁은 목숨 바쳐 이뤄내야 할 무엇이 될 수 없다. 하지만 머리 둘 곳이 없는 그에게 교회 개혁은 두 다리 뻗을 집을 짓는 일이다. 누군가 대신 좀 해 주면 좋겠다. 하하…

자타 공인 메가처치 현상의 대부인 지은이 신광은 목사는 그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까? 한번 들어 보자.

저자에 따르면 이 모든 부조리의 이면에는 메가처치를 강력하게 추동하는 교회론적 개인주의가 자리하고 있으며 그 대안은 공동체성과 공교회성의 회복이란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그는 메가처치 현상을 넘어서 근대의 개인주의-자유주의, 창조와 타락, 그리고 삼위일체론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에 의하면 근대 자유주의의 기본 전제인 원자화된 개인은 그저 환상에 불과하단다. 그것은 타락 이후 사귐을 잃고 파편화된 개별 인간의 실존에 대한 진단에 불과하다.

온전한 사귐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페리코레시스(상호 침투, 상호 내주, 상호 관통)에서 엿볼 수 있으며, 사귐을 통해서만 인간이 온전해질 수 있고 또한 독립성과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다. 자유는 서로가 서로에게 주는 선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실존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온전한 사귐에 동참하는 것이며, 그것은 동료 그리스도인과의 사귐을 통해 실체가 된다. 개신자 간의 사귐, 개신자와 개교회의 사귐, 개교회와 공교회의 사귐,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현현인 교회와 세상의 사귐을 통해 그리스도는 이 땅에 재성육신한다.

선악과를 따먹고 자기 세계의 심판자가 된 인간에게 자유의 극단적 추구는 역설적으로 자유의 상실을 불러온다. 타락한 피조 세계에서 약육강식의 자연법칙과 보이지 않는 손이 지배하는 시장 질서는 그들의 왕이었던 인간을 도리어 지배한다. 개교회 중심주의에 대한 추구로 공교회성이 무너지자 메가처치와 잠재적 메가처치들 간의 사투가 벌어진다. 바야흐로 모든 교회에 대한 모든 교회의 투쟁이다. 이로 인해 교회는 시장 질서에 의해 동질화되고 자율권을 상실한다. 이는 정확히 공중권세 잡은 자의 통치 질서다. 그렇다면 가톨릭과 같은 제도적 통일이 대안인가? 저자에 의하면 지배와 복종으로 구현되는 강제적 하나 됨은 반역적 제국주의의 교회적 버전에 다름이 아니다. 사귐은 지배가 될 수 없다. 저자는 통일성, 거룩성, 사도성, 공교회성의 창조적 회복을 통해 삼위일체적 교회론을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또한 공동체성의 회복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이는 각각 공교회 안에서 개교회간의 사귐, 개교회 안에서 개신자 간의 사귐에 대응된다. 창세 이전부터 하나님은 우리(we)로서 존재하셨으며 창조된 순간부터 인간은 남자와 여자(마주 보고 돕는 배필)로서 존재했다. 개인을 초월한 공동체는 있을 수 없고 공동체를 벗어난 개인도 존재하지 않는다. 김춘수 시인의 말처럼 너는 나를 통해 꽃이 되고 나는 너로 인해 꽃이 된다. 따라서 개인의 자유는 내재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내주는 것이다.

교회는 전체주의적 권위나 제도, 건물, 신적 카리스마를 지닌 목사가 아니라 거듭난 신자들의 거룩한 사귐 속에 임재하는 그리스도의 몸이자 그러한 사귐을 가능하게 하는 성육신이다. 그리스도를 매개하지 않는 사귐은 에로스의 소유욕과 지배욕에 다름이 아니다. 공동체성의 회복을 위해 저자는 하나와 다수의 균형,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면서 동시에 교회의 공동체성을 잃지 않는 방향의 모색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자발적 언약, 관계 속의 자유, 상호 복종을 위한 자유, 나와 너가 만나 우리가 되는 코이노니아, 관계적 차원의 칭의, 공동체적 성서 해석,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평등한 직무신학, 인격적 사귐을 위한 규모의 제한 등이 조명되어야 한다.

"영(spirit)은 오직 교회, 공동체의 영이다. 그리고 교회가 있기 전에는 성령의 감동을 받은 개인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존재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오직 그의 공동체 안에서만 존재한다. 따라서 오직 교회 안에서만 하나님과의 교제가 존재한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개인주의적 교회 개념은 모두 무너진다." - 디트리히 본회퍼

공동체성이라는 화두는 나 같은 가나안 신자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너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몸을 단련한다? 게임을 하고 TV를 보고 전자의 공간에서 전자화된 타인을 만난다? 컴퓨터와 광고와 단편적 정보의 홍수에 둘러싸인 나는 주체적 개인인가 파도에 흔들리는 나무토막인가? 아니면 전자 공간에서 타인과의 공감을 갈구하는 고립된 세포 조각인가? 나의 공간에서 창조된 세계는 진짜 세계인가? 관계 밖에서 나의 일상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은 단순히 환상인가? 공동체를 벗어난 개인이 존재하는가? 가나안 신자의 신앙과 그의 신앙생활은 관계를 떠나서 존재할 수 있는가?

이 책은 교회가 무너진 냉혹한 들판을 외로이 견뎌야 하는 가나안 신자에게 이렇게 묻고 있는 것 같다. "와서 집 짓기에 동참하지 않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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