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한일 월드컵이 한창이던 그해 6월, 전주 태평교회 전도사로 섬길 때 그곳의 성지순례팀에 합류해 이스라엘 땅을 둘러봤어요. 첫날과 둘째 날에 이집트를 거쳐 셋째 날 예루살렘 시내에 들어가 호텔에 투숙했죠. 그날은 유대인들이 여왕을 맞이하듯 준비한다는 안식일 저녁이었죠. 많은 유대인들이 그 호텔에 모여 음식을 먹으면서 이야기하는 모습이 보였죠. 마침 국제전화 카드가 있었는데, 그걸 사용할 줄 몰라, 어느 유대인에게 '전화 좀 걸어 달라'고 요청을 했죠. 하지만 그는 전혀 도와주려고 하지 않았죠. 이번에는 호텔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무거운 가방 몇 개를 들고 있는데 다른 유대인에게 부탁해도 그 역시 엘리베이터 벨을 눌러 주지 않았죠.

눈치 빠른 나는 얼마 되지 않아 그들의 행동을 곧잘 알아차렸죠.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누구든지 반드시 죽일지니라."(출31:15) 이른바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모세오경의 율법을 굳게 지켜야 한다는 명분 때문이었죠. 그 사실을 알아차린 나는 그들의 이중인격적인 행태를 꼬집었죠.

'당신들은 안식일에 일하지 말고 처소에서도 나오지 말라고(출 31:15, 출 16:29) 했는데 왜 이 호텔에 꾸역꾸역 몰려드는 건데? 안식일에 너희 모든 처소에서 불도 피우지 말라(출 35:3)고 했는데, 왜 지금 호텔 불로 요리한 빵과 고기까지 먹고 있는데?' 물론 속으로 터트린 분노였지만 내 딴에는 꽤나 똑똑한 율법사와 같은 질문이다 싶었죠. 하지만 최근 새벽 시간에 출애굽기와 레위기를 살펴보면서 그게 얼마나 우스꽝스런 질문이었는지 새삼 알게 되었죠.

정통 유대인들은 지금도 구약의 39권만을 성경으로 간주하죠. 더욱이 그들은 구약의 39권을 세 권으로 나누죠.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한권의 율법서라 하여 '토라'로 부르고, 선지자들이 쓴 예언서를 '네비임'이라 부르고, 역사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책들을 '케투빔'이라 부르죠. 그 세 권의 머리글자를 따서 그들의 성경을 '타나크'라고 부르죠.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생선을 잡수실 때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눅 24:44) 말씀하면서 그 세 권을 언급하기도 했죠.

물론 그들은 모세오경의 '기록된 토라' 이외에 '구전 토라'를 따로 갖고 있죠. '기록된 토라'야 모세가 시내 산에서 받은 구약성경의 다섯 권을 말하는 것이지만, 입에서 입으로 전달된 '구전 토라'는 유대 민족이 바벨론 제국에 의해 멸망해 포로로 끌려간 뒤 70년 만에 다시 고국으로 돌아왔을 때 맨 먼저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한 것과 더불어 모세오경의 토라를 에스라 선지자가 강독한 일이 있었죠. 그때로부터 주후 7세기경까지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온 구전 토라를 책으로 집대성한 게 바로 '구전 토라'죠. 그들의 용어로는 '미슈나'라고 부르죠.

그 미슈나는 여섯 개 조항으로 나뉘는데, 첫째 '씨앗' 부분에서 농경과 관련된 종교적인 의무를 다루고 있고, 둘째 '절기' 부분에서는 안식일을 비롯한 종교적인 절기들을, 셋째 '여자' 부분에서는 혼인, 이혼, 간통, 서원 등의 문제를, 넷째 '손해' 부분에서는 민형사상의 문제를, 다섯째 '성물' 부분에서 희생 및 동물의 문제를, 여섯째 '정결' 부분에서는 사람이나 물건의 깨끗한 여부를 다루고 있죠. 이른바 그 미슈나는 모세오경, 곧 토라에 대한 유권 해설집인 셈이죠. 그 미슈나에 대한 주석집이 주후 3~6세기에 나온 '탈무드'이고, 그 뒤 구약 39권을 따로 주석한 설교집이 '미드라시'죠.

다소 생뚱맞는 것 같은 그 미슈나 이야기를 왜 하는 걸까요? 그 호텔에서 유대인들의 이중 행태에 대해 꼬집었던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이 미슈나 속에 들어 있기 때문이죠. 이른바 "안식일에 모든 처소에서 불을 피우지 말라"(출 35:3)고 명령했는데, 그 유권 해설집과 같은 미슈나에서는 "안식일이 시작되기 전 곧 금요일 해지기 전에 피운 불은 토요일 해지기 전까지 그대로 피워 놓아도 된다"고 밝혀 놓고 있죠. 그것은 집도, 병원도, 회사도, 호텔도 동일하게 적용하고 있죠. 그렇게 하면 안식일에 불을 피워 놓아도 안식일법에 저촉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안식일에 아무도 처소에서 나오지 말라"(출 16:29)고 명령하지만, 그 유권 해설집인 미슈나에선 '처소'를 개인의 집을 넘어 마을 동네까지로 규정하고 있죠.

그러니 그 호텔은 금요일 저녁 해가 질 무렵 전부터 이미 불을 다 켜 놓았을 것이고, 빵과 음료와 고기들까지도 그 전부터 미리 준비해 놓았겠죠. 그러니 그들은 결코 안식일을 어긴 게 아니었던 셈이죠. 물론 쟁기질, 씨뿌리기, 추수 타작, 도리깨질, 방아질, 반죽, 빵 굽기, 양털 깎기, 염색, 천 짜기, 도살, 가죽 벗기기, 자르기, 쓰기, 지우기, 짓기, 망치질, 공공장소에서의 운반 행위 등 총 39가지의 활동은 미슈나에서 일로 규정하고 있죠. 내가 전화를 걸어 달라고, 엘리베이터 벨을 눌러 달라고 부탁한 걸 매몰차게 거절한 이유는 그것만큼은 그들에게 일이 되었기 때문인 셈이죠.

그렇다면 그런 율법이 과연 오늘날에도 필요한 걸까요? 그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을까요? 한때 그런 질문이 기독교 사회에 뜨거운 감자였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을 통해 영생을 얻은 자들도 율법을 지켜야만 하는지 말이죠. 그런 논쟁이 촉발된 중심에는 요한복음의 말씀도 한몫을 했겠죠. 이른바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마암아 온 것이라"(요 1:17)는 말씀 말이죠. 이 말씀을 두고서 율법은 모세로부터 주어진 것이니, 그 율법의 유효기간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한 세례요한의 때까지만 지키면 된다고 못을 박았겠죠.

틀린 말은 아니겠죠. 율법 가운데 제사법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심과 더불어 폐하였기 때문에 말이죠. 더욱이 사도바울도 로마서 10장 4절을 통해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하고 증언했기 때문에 율법의 마침이 되신 주님 앞에 무슨 율법을 지킬 필요가 있을까요? 그런데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할 때의 '마침'은 헬라어 '텔로스'(τέλος)인데 그 뜻은 '끝'(end)도 되지만 '목적'(purpose)과 '목표'(aim)를 의미하는 말이기도 하죠. 다시 말해 율법의 목적, 율법의 목표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의를 완성하기 위함이라는 뜻풀이가 되죠. 그것은 예수님께서 친히 명령하신 부분과도 일치하죠.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17-20)

그만큼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하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라 완전케 하려고 오셨다는 것이죠. 예수님은 율법의 목적인 선한 일을 행하도록 촉구하기 위해서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보다 더 의로운 삶을 살도록 촉구하셨던 것이죠. 그와 같은 말씀은 다른 데서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죠.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3)

그렇다면 율법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하나님의 친자녀가 된 우리들은 '모세로부터 주어진 율법'을 모두 지켜야만 될까요? 사실 모세오경의 토라도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신 게 아니죠. 그들에게 십계명과 '토라'를 주신 건 출애굽한 뒤 시내 산에서 언약을 맺으실 때 처음 주신 것이었죠.

이를테면 400년 넘게 흑암과 사망의 땅인 애굽에서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유월절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집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게 하셔서 그들에게 자유를 주셨고, 그로부터 3개월이 지나는 동안 하나님께서 베푸신 온갖 능력과 사랑을 통해 이 세상 모든 상천하지(上天下地)의 주관자는 하나님밖에 없음을 그들의 눈으로 똑똑하게 목격하게 했죠. 그 다음에, 비로소 그들을 시내 산에 불러올려 하나님 백성으로 살겠다는 언약을 맺게 한 다음에 그 율법, 곧 토라를 주셨던 것이죠. 그렇기에 그 율법, 곧 토라를 주신 것은 그 이유 때문이었죠. 이후로는 하나님의 친밀한 백성, 하나님의 거룩한 친자녀답게 살아가도록 지침서 격으로 말이죠. 이른바 목적지에 바르게 도달할 수 있도록 하는 교통 안내 표지판과 같은 격이죠.

그것은 우리의 구원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똑같이 대입해도 마찬가지죠. 유월절 어린양 되신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거룩한 친자녀가 되었죠.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 모두도 하나님의 구별된 자녀로 살기 위해서는 기록된 토라를 지키며 사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죠. 그래야만 천국을 향하는 안내표지판과 같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바르게 살 수 있을 테니 말이죠.

물론 모세오경의 율법을 중세 시대의 유대 랍비이자 사상가인 마이모네데스(Maimonides, 1135-1204)는 613가지로 분류했죠. 적극적으로 해야 할 248개의 계명과 해서는 안 될 365개의 계명으로 분류한 게 그것이죠. 그런데 그 계명들은 세 가지로 분류되죠. 이른바 구약에 나온 제사법이 그 하나요, 정치·경제·사회·문화·인권 등의 도덕법이 그 둘이요, 마지막 하나는 음식법을 포함한 정결법이죠. 그중 제사법과 정결법은 더 이상 우리가 지킬 필요는 없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전환되었기 때문이죠. 남은 것이 있다면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전케 하려고 오셨다는 것,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아야 된다고 하신 것,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라고 하신 것, 바로 정치·경제·사회·문화·인권과 같은 도덕법을 두고 하신 것이죠.

그래서 구약의 율법에서는 사람을 죽여야만 살인에 해당되었지만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사람을 미워하는 것 자체를 살인으로 규정하셨죠. 또 구약의 율법에서는 음행을 저질러야만 간음이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 자체만으로도 간음한 자라고 말씀하셨죠. 그만큼 예수님께서는 구약시대의 소극적인 도덕법대로 살기보다 더욱더 적극적인 윤리와 도덕의 삶을 실천하며 살기를 바라셨던 것이죠. 자신을 선대하는 자들만 선대하며 살기보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이유도 그 때문이죠.

과연 어떻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윤리와 도덕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비록 정치·경제·사회·문화·인권과 같은 도덕법을 모두 알지 못한다 해도 가장 기본적인 삶을 살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이른바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듯, 그 마음과 자세 그대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며 사는 것 말이죠. 그 실례를 우리 주님께서 알려 주신 적이 있죠. 율법사 한 사람이 예수님께 찾아와 '영생'에 대해 물었을 때 주신 대답 말이죠. 그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완벽하게 율법을 암송한 사람이었죠. 그런 그가 예수님의 대답을 꼬투리 잡아 올무에 빠트릴 생각이었는데, 예수님은 그에게 되려 반문했죠.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하였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눅 10:26) 그때 율법사는 율법에 나와 있는 그대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면 된다고 했죠. 그때 주님은 "네 대답이 옳다. 가서 그대로 행하도록 하라. 그러면 영생을 얻을 것이다."(눅 10:28)고 말씀하셨죠. 이른바 율법의 앎의 단계를 뛰어넘어 두 손과 두 발로 그 삶을 살아가도록 강조하신 것이었죠. 그게 없으면 율법의 형식주의자와 다를 바가 없다는 뜻이었죠. 그때 누가 자기의 이웃인지 율법사가 물었을 때 예수님은 그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려주셨죠.

어떤가요? 613가지 율법은 비록 잘 몰라도 그중에 제사법과 정결법은 지키지 않아도 되겠죠. 하지만 정치·경제·사회·문화·인권과 관계된 도덕법은 모두가 잘 지켜야 하지 않을까요? 예수님께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다 적극적으로 지키길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말이죠. 물론 그것들을 다 모른다 해도 괜찮겠죠. 주님께서 요구하신 사랑의 삶을 실천하면,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면, 그것으로 충분할 테니까 말이죠.

권성권 / 〈100인의 책 마을〉 공동저자·목포 자유로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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