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한국에서 나오는 기사들을 보니, 자신의 아들을 차로 치어 죽인 뺑소니 차량의 운전자를 용서하여 감동을 일으켰던 소위 '크림빵 아빠'의 아버지가, 오늘은 "하루 만에 분노"를 했다는 표제의 기사가 이곳저곳에 등장한다(관련 기사: 용서하겠다던 '크림빵 아빠' 父 하루 만에 분노한 이유 <연합뉴스>). 이 기사는 내게 참으로 어려운 물음, '용서란 무엇인가'와 다시 만나게 한다. '용서'에 대한 치열한 논의들이 종교 영역을 넘어서서 철학·정치학의 분야에서 '공적 담론'으로 눈에 띄게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세계 제2차대전 이후 나치가 행한 "인류에 대한 범죄"라고 규정된 유대인 학살, 성 소수자, 노숙자, 장애자들에 대한 학살이 드러난 이후이다. 그리고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소위 인종차별 정부가 무너지고 만델라가 대통령이 되면서 다시 세계적인 공적 담론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진정한 '용서'에 '전제 조건'이 있는가?

신문에 나온 기사에 따르면, 자신의 아들을 죽게 한 사람을 용서하고 그 사람의 가족까지 염려한 모습을 보임으로서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던 '크림빵 아빠'의 아버지가 '하루 만에 분노'를 한 이유가 무엇인가 보니, 그 뺑소니 차량의 운전자가 "진정으로 반성"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는 점이라고 한다. 물론 나는 이러한 기사의 표제어나 내용들이 그 아버지의 복합적인 내면적 감정들을 잘 드러내고 있는가에 대하여는 별로 신뢰하지는 못한다. 자신의 자식의 죽음 앞에 이 표제어처럼 그저 '단순하게' 용서와 분노의 축을 왔다 갔다 하는 것이 가능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다시 진지하게 성찰해 보아야 하는 물음은 "용서의 전제 조건이 있는가?"라는 것이다. 용서의 전제 조건으로 흔히 등장하는 것은 '가해자의 참회, 반성, 그리고 처벌'이다. 그런데 이러한 '전제 조건이 이미 설정된 용서'가 '진정한 용서'가 될 수 있는 것인가? 또한 용서는 '누가 누구에게' 해야 하는 것인가? 예를 들어서 나치의 유태인 학살에서 '용서를 받을 사람'과 '용서를 해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 더 나아가서 용서를 구하지 않았는데 일방적으로 용서를 하는 것은 가능한 것인가?

어찌 보면 단순한 듯한 이러한 물음들은 사실상 '용서'에 대한 종교적, 철학적, 정치적 논쟁의 중심에 있어 왔다. 한나 아렌트는 "처벌(punishment)이 용서의 공통적인 조건"이라고 하면서, 유태인 학살과 같은 범죄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로 전개되었을 때 "용서란 사실상 불가능"하며, 따라서 "용서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죽었다(Forgiveness died in the death camps)"고 한다. 즉 '용서의 가능성'은 '처벌의 가능성'이 전제되었을 때에 가능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미 전적인 희생자로서 사라진 사람들이 그 가해자에 대한 '처벌'이 불가능할 때, 이미 용서란 인간에게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아렌트의 용서에 대한 이해는 그 함축된 의미가 있지만, '용서'가 지닌 깊은 딜레마를 모두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누가', '누구에게', 그리고 '무엇'에 대한 용서를 하는가?

이러한 아렌트의 입장은 우리에게 또 다른 근원적인 물음을 제시한다. 용서란 누구에게 구하는 것인가?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구하는 것인가? 또는 신과 같은 절대자에게 구하는 것인가? '용서를 한다'는 행위는 '누구'에게 그리고 '무엇'에 대하여 용서한다는 것인가? 내가 이렇듯 '용서의 수수께끼'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용서'라는 참으로 고귀하고 중요한 개념이 다양한 방식으로 남용되고, 계산되고, 연기(perform)되는 개념으로 왜곡되는 것에 대한 경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일 관계, 남아공에서의 인종차별 정부, 또는 유태인 학살 등의 사건을 다루는 국제정치 영역에서 이 '용서의 왜곡과 남용'은 극치를 이룬다. 자크 데리다가 남아공에서 한 강연문에서 "용서의 극장(Theater of Forgiveness)"이라고 명명한 바, '용서'가 "정치적-경제적 계산에 의한 연기"의 무대로 오용되어 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늘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인간의 삶에서 참으로 중요한 실천적 개념인 '용서'가 남용되어 '값싼 연기'의 한 항목으로 왜곡되는 것을 조금이라도 방지할 수 있지 않을까.

용서의 가능성(조건성)과 불가능성(무조건성)의 두 축 사이에서

예수는 "'일곱 번'을 용서를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으로, "'일흔 번을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는 어찌 보면 매우 수수께끼 같은 답변을 한다(마 18:21-22). 도대체 이 답변의 저의는 무엇일까. 사실상 이 답변은 '용서'의 의미를 급진화하고 있다. '일흔 번을 일곱번'의 용서란, 사실상 '일곱 번'이라는 계산 가능한 '조건성의 용서'를 그 계산적 사유 방식을 홀연히 넘어서는 '무조건성의 용서'라는 매우 급진적인 용서 개념으로 돌연히 전이시킨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자크 데리다의 용서 개념은 매우 중요한 용서의 차원을 제시하고 있다.

▲ 강남순 교수. (사진 제공 강남순)

자크 데리다는 '용서의 윤리(ethics of forgiveness)'와 '용서의 정치(politics of forgiveness)'라는 두 축으로 용서의 범주를 나누면서, '무조건성의 용서(용서의 윤리)'와 '조건성의 용서(용서의 정치)'라는 두 축 사이에서 씨름해야 하는 인간의 삶의 현실을 들여다보면서, 용서의 심오한 차원을 드러낸다. 도대체 유한한 인간에게 진정한,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회개·참회'와 같은 그 어느 '전제 조건'도 내세우지 않는 '무조건성의 용서'란 가능한 것인가? 불가능하다면 이 '용서의 윤리, 불가능성의 용서, 무조건적 용서'에 대하여 성찰하고 기억하는 것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인가? 이 물음은 한 인간으로, 그리고 한 학자로서 내가 오랫동안 씨름하여 온 문제이기도 하다.

'무조건적 사랑'이나 '무조건적 용서'란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러한 '용서의 윤리'라는 '불가능성의 용서'에 대하여 끊임없이 성찰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이러한 '불가능성의 열정'은 우리에게 영원한 '참고 사항'이 되며, '사랑'이나 '용서'와 같은 우리 인간에게 참으로 소중한 개념들이, 현실에서 지독히 왜곡되고 남용되고 변질되는 것에 끊임없는 '경계등'의 역할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영구적인 참고서(reference)'로서의 '불가능성의 축'을 기억하는 한, 적어도 정의·사랑·용서와 같은 우리 세계의 소중한 개념들의 철저한 '몰락'을 조금이라도 약화하거나 막을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의미에서 내게 종교란, '불가능성에의 열정'이다. 

강남순 / 텍사스크리스천대학교 브라이트신학대(Texas Christian University, Brite Divinity School) 교수. 현재 'WOCATI: 세계신학교육기관협의회'의 회장이며, 최근 저서로는 <Cosmopolitan Theology>(2013)와 <Diasporic Feminist Theology>(2014) 등이 있다.

*이 글은 강남순 교수의 페이스북에 실린 글로 허락을 받아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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