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 <개신교 신학 입문> / 칼 바르트 지음 / 신준호 옮김 / 복있는사람 펴냄 / 232쪽 / 1만 2000원

본인은 신학생이다. 다사다난한 이 대한민국 땅에서, 세월호 참극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 저주받은 땅에서, 아니 분단이라는 원초적인 죄를 해결하지 못한 이 땅에서 신학을 공부하는 신학생이다. 그뿐인가? 한국교회는 절망의 끝자락으로 내몰리고 있다. 절망의 끝자락으로 내몰리는 한국교회의 현실, 바로 그 현실 위에서 본인은 신학을 공부하고 있다.

단순히 이러한 구조적이고 사회적인 불의뿐일까? 개인적으로도 죄와 사망의 세력하에서 날마다 스스로에게 낙심하며, 돈과 권력과 섹스에 날마다 굴복하며 살아가는, 그러면서도 그 위에서 신학생이라며, 전도사라는 이유로 낯짝 두껍게 하나님의 이름을,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외치는, 아이러니한 삶을 영유하며 구조적이며, 사회적이고도, 개인적이고, 내밀한 흑암에 쌓여 매번 들리지 않는 신음을 토해 내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온갖 흑암이 몰려오는 이 지점에서 칼 바르트의 <개신교 신학 입문>을 탐독하게 되었다. 이해가 안 되는 내용이 많아 2회 정도를 정독했고, 또 다시 1회를 속독했다. 아니, 정정하자. 이해가 안 된다기보다는 칼 바르트 고유가 담지하고 있는 깊은 사유의 세계를 따라잡기가 버거웠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꾸역꾸역 따라잡아 가던 칼 바르트의 진술은, 한 편의 찬송과 같았다. 로마서 7장에서 8장으로 넘어가는 그 지점에서 터져 나오는 한 편의 고결한 찬송이었으며, 또 한편으로는 '내 영혼이 은총 입어'를 듣는 것만 같았다. 이제 본 책으로부터 그의 찬송 소리를, 아니 그의 논지를 한번 찬찬히 따라가 보자.

먼저 <개신교 신학 입문>은 총 열일곱 챕터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챕터에서는 '개신교 신학'의 정의를 짚어 낸다. 이후에 열여섯 챕터는 각 네 챕터씩 한 단위로 묶여서 총 네 단위를 구성하고 있다. 먼저는 신학을 하는 고유한 자리에 대한 서술이, 이어서는 신학을 진행하는 신학자 고유 실존에 대한 진술이 담겨 있다. 다음에는 신학을 진행하고 있는 신학자가 맞이하는 실존적 위기에 대하여, 그리고 그러한 신학 작업의 내용에 대하여 진술하고 있다. 한번 칼 바르트의 고유한 진술들을 따라가 보자.

개신교 신학이란 무엇인가

칼 바르트가 말하는 개신교 신학은 자유주의 신학과 대척점에 있는 신학이다. 이는 칼 바르트가 배워 온 자유주의 신학과의 결별이며, 또 한편으로는 당대의 그의 동료이자, 경쟁자라고 볼 수 있는 불트만의 신학, 틸리히의 신학과도 조금은 다른 길을 걷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칼 바르트는 자신의 신학의 고유한 방법론, 고유한 지향점을 설명해야 하는데, 이를 첫 번째 챕터에서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칼 바르트의 설명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자신만의 신학을 갖고 있다. 또한 일반적으로 지금까지의 신학은 이러한 유사 기타 신학에 비견하여 자신이 갖고 있는 신학의 정당성, 우월성을 확보하려는 작업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칼 바르트는 그런 유의 신학과는 다른 신학을 시작하려 한다. 특별히 그가 추구하는 신학은 개신교 신학 혹은 복음주의 신학이라 불릴 수 있는 신학이다.

그 신학은 복음의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신학이라는 점에서, 다른 신학들과는 근원적으로 다르다. 복음의 하나님, 그분께서 개신교 신학 혹은 복음주의 신학의 시작점이요, 출발점이 되신다. 바로 거기에서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은폐되었다가, 신약성경의 저자들에 의해 구술된, 또한 종교개혁 속에서 다시 한 번 발견된, 복음의 하나님이 드러난다. 어떠한 가치와 이념 속에 스스로 갇혀 계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분 고유의 자유로써 인간을 만나시고, 불러내시며, 오늘날 칼 바르트가 작업하고 있는 개신교 신학을 가능케 하시는 바로 복음의 하나님 말이다. 이처럼 칼 바르트의 신학 방법론은 '복음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며, '찬양' 그 자체이다.

신학의 자리

그렇다면 그러한 독특한, 칼 바르트가 진술하고 있는 '개신교 신학'의 자리는 어디인가? 칼 바르트는 이러한 자리로서 말씀, 증인들, 공동체, 성령을 제시한다. 이러한 자리로부터 신학을 시작하기에, 그의 신학은 단순한 신에 대한, 성경에 대한 철학적 진술이 아닌, 하나님께 대한 신앙고백이요, 찬송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 한번 천천히 따라가 보자.

먼저 신학의 자리는 '말씀'이다. 이는 단순한 성경 텍스트가 아니다. 오히려 성경 텍스트 속에 숨어 있는 더 원초적인 어떤 것, 모든 인간을 향해 말하셨고, 말하시고, 말하실 것인 그 어떤 하나님의 '행동', 인간에게 다가오는 그 어떤 '사건', 그것이 바로 '말씀'이다. 이러한 '말씀'은 신학의 연구자인 우리 모두를 사로잡아 '신학함'으로 이끌어 낸다. 바로 여기서, 여기서 신학이 시작하는 것이다.

또한 신학의 자리는 '증인들'이다. '증인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인하여 특정한 시공간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원초적으로 경험한 목격자들인 선지자와 사도들이다. 그들은 특정한 시공간 속에서 말씀을 듣는 자인 동시에, 그들의 기록인 성경을 통해서 모든 인류를 향해 말하는 자이기도 하다.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신학을 시작한다. 원초적 경험자인 '증인들'의 증언에 대하여 대단히 진지하고, 겸허한 자세로 귀를 기울이며.

이러한 증인들의 증언은, 또한 말씀의 행위는 '공동체'를 만들어 낸다. 바로 교회의 이야기다. 이러한 교회는 증인들의 증언으로, 말씀의 행위로 말미암아 창출되었기에, 끝없는 진리질문을 요구받고 있다. 그들이 경험한 말씀은 무엇인가? 또한 그들이 경험한 증인들의 증언은 무엇인가? 또한 그로 말미암아 교회에 대하여, 세상에 대하여 그들이 증언해야 할 증언은 또 무엇인가? 바로 진리에 대한 궁극적 물음이 발생하는 이 고유하고도, 특수한 자리, 여기서도 신학이 시작된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한 것들은 스스로 신학을 시작하게끔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말씀을 말씀되게 만드는 무엇인가가, 증인들을 증인들이 되게 만드는 무엇인가가, 공동체를 공동체로 만드는 무엇인가가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 그런 것이 있지 않고는 사실상 순환 논법에 머물고 만다. 말씀, 증인, 공동체로부터 신학을 가능케 하는 권능, 또한 그곳에 생명을 불어넣는 힘, 그것이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 바로 성령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끝없이 신학의 대상에게 붙잡히게 된다. 그리고 대상의 말씀을 듣는다. 또한 대상의 증언을 듣게 되고, 대상의 진리를 진술하게 된다. 그렇다, 이 '성령'이야말로 원초적이고, 궁극적인 신학의 자리다. 따라서 이런 자리 위에서 하는 신학함이, 어찌 찬송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신학적 실존

칼 바르트는 앞에서 말씀, 증인들, 공동체, 성령에 대해서 다루면서 신학의 시작점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이어서 칼 바르트는 신학의 시작점에서 시작하는 신학자들에게로 눈을 돌린다. 이러한 신학의 자리로 부름 받아서, 신학 작업을 수행하는 독특한 신학자들의 실존에 대해서 말이다. 이러한 실존으로도 칼 바르트는 네 가지를 제시한다. 놀람, 당황, 의무, 그리고 믿음에 대한 이야기다. 칼 바르트는 이러한 진술을 통해서 개신교 신학 혹은 복음주의 신학이라 불리는 신앙고백이요, 찬송을 부르는 이들이 맞이하는 고유한 실존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신학자들은 사실 모두가 '기적'을 경험한 자들이다. 따라서 '기적'을 단순한 신화적 언어로, 혹은 역사적 사실로만 치부하려는 모든 시도는 '기적'이 담지하고 있는 의미를 훼손시킨다. '기적'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 등장하는 사건이다. 새로운 사건이며, 새로운 언어이며, 새로운 경적으로서 등장한 '기적'은 한 신학자를 '놀람'이라는 감정에 사로잡히게 만든다. 고로 기적으로부터 발생한 '놀람'으로 인하여, 신학자는 신학이라는 고유한 자리에 얽매이게 된다.

이렇게 발생한 '놀람'은 거기서 멈추질 않고 '당황'을 창출해 낸다. 신학자는 주체로서 대상인 하나님을 탐구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단순히 피동적인 대상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주체인 신학자를 사로잡고, 습격하고, 체포하며, 지배한다. 대상과 주체가 전복되며, 이로 말미암아 생기는 세상의, 공동체의, 개인의 실존의 괴리 속에서 '당황'이 발생한다. 따라서 신학자는 필경 '당황'한 존재이다.

대상인 하나님의 주체인 신학자를 향한 습격은 한 발자국 더 나아간다. 대상은 주체인 신학자를 일으켜 세우며, 자유를 부여한다. 그리고 이 자유를 사용하라고 명령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신학자는 자유를 사용할 의무를 부여받는다. 성경적 증언들의 다층성에도 불구하고, 다층성을 훼손하지 않은 채로 그 모든 것들을 종합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귀결시켜야 할 의무, 인간적이거나 시대적인 개념을 넘어선 대상의 진리를 자유롭게 추구해야 할 의무, 우리를 향한 심판, 율법, 죽음과 같은 '아니요'로부터 구원, 복음, 생명과 같은 '예'를 향한 신학의 올바른 방향을 정초해야 할 의무. 그 의무를 통해 신학자는 신학자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이 모든 '놀람', '당황', '의무' 들도 이것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바로 '믿음'의 이야기다. 이러한 믿음은 물론 어떠한 교리, 명제에 대한 무조건적 신뢰이거나, 우리 내면에 있는 심리적 상태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발생하는, 그리하여 우리를 신학자로 내세워 버리는 '사건' 그 자체가 바로 '믿음'이다. 물론 이러한 '믿음'은 우리가 항상 부여할 수 있는 어떤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신앙'과 '불신앙'의 경계 선상 위에서 신비롭게 탄생되고, 주어지는 '믿음'이다. 이 '믿음'으로 인하여 신학자들은 신학자로 부름 받는다.

놀람, 당황, 의무, 그리고 믿음의 이야기들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신학자는 필경 스스로가 신학을 시작하는 존재가 아니요, 오히려 대상에 의해서 신학을 시작하도록 부름 받은 존재라는 것을 칼 바르트는 증언하고 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신학의 자리로 부름 받은 신학도들은, 필경 대상인 하나님에 의해 규정지어진다. 시작이 하나님에 의한 시작인데, 응당 마침도 하나님에 의한 시작이어야 할 테다. 고로, 칼 바르트의 진술에 따르자면 신학도들의 시작에서 마침까지 이르는 신학 작업의 길은 송의 순례길이라고 할 수 있다.

신학의 위기

지금까지 칼 바르트는 신학의 시작점을 기술한 이후에, 거기서 시작되는 신학자의 독특한 실존에 대해서 서술했다. 이어서 칼 바르트는 신학자의 고유한 신학 작업이 맞게 되는 위기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또한 네 가지로 분류되는데 고독, 의심, 시험이며, 그 모든 위기의 위기가 되는, 그럼으로 위기를 극복하는 희망에 대한 이야기다. 이와 같은 이야기는 대상인 하나님에 의해 신학 작업을 시작했지만, 그러한 작업의 길에서 만나는 환난이요, 고난이요, 광야 길과 같다. 칼 바르트는 이와 같은 진술을 통해 오히려 신학 작업이라는 찬송의 순례 길이 평탄하지만은 않음을, 오히려 그렇기에 고결한 찬송으로 울려 퍼진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신학 작업을 수행한다는 것은 결국 '고독'이라는 위기에 빠진다는 것과 동의어다. 우리의 신학적 관심사들이, 신학적 과제와 노력들이 세상의 문제와는 전혀 고립된 문제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틸리히의 경우에는 신학과 철학의 통합을 통해서, 신학 스스로가 세상의 문제에 대해 가치 있음을 입증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하지만, 이는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신학하는 우리는, 또한 고독을 경험하는 우리는, 아직 낙원에 있지 않다. 오히려 낙원을 향해 나아가는 도상 위에 있다. 따라서 이 고독은 참고 견디는 것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

또한 신학 작업은 필연적으로 '의심'을 내포하고 있다. 끝없는 진리에의 질문이기에 그러하며,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도상 위에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 우리는 현실 속에 있는 세계의 문제 속에서, 공동체의 문제 속에서 끝없이 '의심'하게 된다. 전혀 하나님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우리의 신학 작업과는 괴리된 그 현실 속에서 말이다. 이에 대해 칼 바르트는 다음을 조언한다. 의심하고 있는 자신의 숙명을 받아들일 것을, 또한 의심하고 있는 것만으로 인해 자신을 고결한 존재라고 착각하지 않고, 오히려 그 사실로 부끄러워 할 것을, 그럼으로써 참고 견디며, 결국 우리가 도달할 낙원을 희망하라고.

그뿐만 아니라 일련의 신학 작업들은 우리의 대상이라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시험'과도 직면하게 된다. 우리는 주체인 척하며 대상인 하나님을 탐구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주체여야 하기에, 우리는 단순히 주체의 '목소리'여야 하기에 그렇다. 이러한 하나님의 '시험'은 신학 작업들을 무위로 만들어 버린다. 연단의 재단 위에 우리의 작업들을 올려놓고 우리의 대상은 끝없는 불을 지피신다. 그 속에서 대상인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경박한 언변들이, 또한 신학 작업 이면에 있는 온갖 허영심들이 정화된다. 바로 그 '시험'의 지점에서 신학 작업은 비로소 하나님과 이웃에 봉사할 수 있는 구원되어 정결케 된 신학 작업으로 자리매김한다.

하지만 이 모든 신학 작업에서의 위기들, 고독과 의심과 시험을 참고 견딜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있다. 바로 '희망'이다. 우리의 신학 작업은 철저히 대상에 의해 부름 받고, 대상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신학 작업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신학 작업이 대상인 그분께 인정받기 위하여 담대하게, 그리고 참고 견뎌 냄으로, 그 부정의 길을 걸어간다. 그 고난의 길, 심판의 길, 멸망의 길 속을 참고 견뎌 냄으로 걸어갈 때에, 그곳에는 영광이 펼쳐지고, 구원이 펼쳐지고, 은혜가 펼쳐지며, 참된 신학의 생명이 불어넣어진다. 바로 그곳에서, 우리의 신학 작업은 비로소 신학이 될 수 있다.

칼 바르트는 고독, 의심, 시험, 희망이라는 이야기를 통해서 신학자들이 걷는 신학 작업의 길을 조금 더 면밀히 그려내고 있다. 이러한 길에 대한 묘사는, 앞으로 있을 복음주의 신학 혹은 개신교 신학이라는 우리들의 찬송과 신앙고백을 더욱 고결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그렇기에 칼 바르트는 마치 신학 작업을 하고 있는 모든 신학도들을 격려하는 것처럼 보인다. 조금만 힘을 더 내면, 힘을 더 내면, 그 찬송을, 그 아름다운 찬송을 부를 수 있을 것이라고.

신학적 작업

지금까지 칼 바르트는 신학의 자리에 대하여, 그리고 신학의 자리로 부름 받은 신학자들의 실존에 대하여, 그리고 그들이 맞이하는 위기에 대하여 서술해 왔다. 이어서 그는 신학적 작업 그 자체의 향방에 대해서 서술한다. 이 또한 네 가지로써 기도, 연구, 봉사,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완성시켜 줄 사랑이다. 이는 마치 그의 신학 작업의 사중주와 같다. 기도, 연구, 봉사, 사랑은 서로 얽히고설켜 신학도들이 서 있는 고유한 실존의 자리에서, 그 어두컴컴한 광야 길에서 아름다운 신학 작업의 찬송 소리가 울려 퍼지게 만들어 준다. 사중주에서 울려 퍼지우는 각각의 소리에 대한 칼 바르트의 진술을 들어보자.

신학 작업은 본디 위로부터 선사되는 그 빛이 아니고서는 존재할 수 없다. 또한 우리의 신학 작업의 대상인 그분은 위로부터 아래를 향해 운동하시며, 그 운동으로써 말씀을 건네신다. 말씀은 그러한 운동이 발생하는 사건이며, 이와 관련된 인간의 모든 고백과 진술들은 사건에 대한 반응일 뿐이다. 따라서 신학 작업에서 하나님은 1인칭이며, 우리는 2인칭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신학 작업을 진행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끝없이 기도한다. 아니 우리의 신학 작업은 기도이며, 그 기도야말로 신학 작업이다. 우리는 끝없이 하나님께 당신을 들려 달라고, 당신을 보여 달라고 기도하며, 또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의 눈과 마음을, 그리고 이해력을 열어 달라고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 그것이야말로 신학 작업이기에.

기도가 이러한 수직적 영의 운동이라면, 연구는 외적이며 수평적인, 인간의 정신, 그리고 영혼과 몸의 운동이라 할 수 있다. 연구는 앎의 과제를 추구하며, 진지하고 열정적으로 열심히 활동하는 노력이다. 하지만 이러한 신학의 연구는 일반적인 철학, 역사, 심리학의 연구와는 맥이 다르다. 우리는 그들과는 달리 선생과 직접 대면한다. 바로 구원사의 직접적 증인이라 할 수 있는 선지자와 사도들이다. 우리는 성경 안에서, 그들의 학교로 부름 받아, 거기서 연구를 배우고, 연구를 시작한다. 또한 우리는 성서적, 주석적 과제를 통해 성경 이면에 감춰져 있는 원초적 하나님의 말씀 사건을 탐독하고, 교회사 연구를 통해 선진들의 신학적 착상을 따라가며 진리로 이끌어 가시는 성령의 선하신 궤적을 탐독한다. 그뿐만 아니라 실천 신학을 통해 이러한 신비와 말씀을 오늘날의 '언어'로 구술해 내는 법을 배운다. 이를 통해 수직적 기도와 수평적 연구라는 각각의 소리는, 서로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하지만 이런 만남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러한 신학 작업이라는 찬송은 수직적 기도의 소리, 수평적 연구의 소리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봉사의 소리 또한 함께 불려야 한다. 만약 신학 작업이 특수한 방식으로 공동체의 가난한 자를, 병든 자를 방기한다면 그것이 어찌 신학 작업이라 할 수 있겠는가? 신학의 목적은 신학의 대상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봉사, 그뿐이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현존하는 말씀의 역동성에 대하여 봉사하기 위해 신학 작업을 한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를 향해 힘껏 외친다. 교회 공동체 또한 말씀 앞에 복종해야 하기에. 따라서 우리는 교회를 말씀의 역동성 앞에, 말씀의 역사 앞에 복종하게 만든다. 그것이 우리가 말씀에 대하여 감행하는, 신학 작업의 귀결인 '섬김'이다. 이러한 섬김의 봉사 소리가 은은하게 깔릴 때에, 우리가 부르는 신학 작업의 찬송은 더욱 고결하게 들리운다.

하지만 이 모든 소리들을 단순한 화음을 넘어, 음악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있다. 이는 바로 사랑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랑을 떠올릴 때는 에로스를 떠올린다. 에로스는 타자를 획득하고, 타자를 취하고, 타자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사랑이다. 바로 자신을 위하여. 이는 연구에서도 마찬가지다. 대상을 취하고, 획득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 그것이 에로스적 연구이다. 하지만 신학 작업에서는 전혀 다른 사랑, 바로 아가페가 작동해야 한다. 아가페는 에로스와는 반대의 방향을 지닌다. 아가페는 타자를 향한 자유이며, 타자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며, 실질적 타자만을 위한 사랑이다. 따라서 이 아가페는 신학 전반이 향하는 말씀의 근원적 힘이라 볼 수 있다.

신학의 대상인 궁극적 말씀, 예수 그리스도. 우리는 그 안에서 완전한 아가페의 사랑을 목도한다. 그 안에서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오시는 사랑을 발견하는 동시에, 아래로부터 위로 솟구치는 사랑을 발견한다. 우리의 신학 작업의 궁극적 대상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면, 또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신학 작업은 아가페여야 한다. 대상을 취하기보다, 내 것으로 삼기보다, 지배하기보다, 오히려 자신을 대상에게 내어주고, 대상만을 인하여 만족하며, 대상의 자유에 나를 위탁하는 그 사랑, 우리는 그 사랑 안에서 참된 앎을 얻을 수 있으며, 참된 신학 작업을 수행할 수 있다.

본 챕터에서 칼 바르트는 복음주의 신학이라는 찬송의 사중주를 해설하고 있다. 기도, 연구, 봉사, 그리고 사랑. 이러한 각각의 네 가지의 소리는 우리의 대상인 하나님에 의해 하나로 묶여지며, 또한 신학 작업을 하는 신학자들이 서 있는 고유의 지평 위에서 불릴 때, 진정 우리의 마음을 울린다. 그 이유는, 그 이유는 바로 칼 바르트가 서두에 설명했듯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고, 기초되어진, 그 신학이기에 그런 것이리라.

나가는 말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본인은 한 명의 신학도이면서 동시에 온갖 사회적이고, 구조적이며, 개인적인 불협화음의 신음들 속에서 그의 책 <개신교 신학입문>을 읽었다. 그의 진술들을 읽어 가면서, 개인적으로 그 모든 불협화음의 먹구름이 걷히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칼 바르트의 글은 그 누구보다도 불협화음의 신음을 치열하게 경험한 사람의 글이었으며, 그러한 절망과, 심판과, 고독과, 저주와, 죽음 속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탄성과, 구원과, 환희와, 생명을 맛본 자의 글이었다. 그랬기에 그의 글은 단순한 신학적 사변에 그치지 않고, 신학자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숨어 있는 온갖 내밀한 실존들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었다.

본 책은 모든 개신교 신학도들이 읽어야 할 책이다. 이 책을 읽어 가며 우리는 개신교 신학도들이 보편적으로 맞이하는 실존을, 그리고 그 안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의 찬란한 구원의 소식을 듣게 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의 아픔과 고통과 좌절 속에서 신음을 뱉는, 의심으로, 한탄으로, 절망으로, 죽음으로, 심판으로 부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읽어야 할 책이기도 하다. 읽어 내기에는 쉽지 않겠지만, 그의 진술을 따라가다 보면 이 세상 속에 산적한 수많은 '아니요'들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예'를 내포하고 있다는, 칼 바르트가 온 생애를 바쳐서 체득한 진리들의 찬송들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함께 그의 책을 펼쳐 들자. 그리고는 그의 신음 속에 터져 나오는 기쁨의 찬송소리를 들어 보자.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찬송가 438장)

홍동우 / 부산장신대학교 신학과 학부생. 학생과 전도사의 경계, 부산과 대구의 경계, 보수적 기독교와 진보적 기독교의 경계, 인문학과 신학의 경계 사이에서 양자와 서로 대화하며, 갈팡질팡 방황하는 한 평범한 청년 전도사이자 경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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