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사회와 직장에 첫발을 딛는 순간 행복하다고 느낀 사람은 얼마나 될까?

이러려고 다른 즐거움 다 포기하고 공부만 한 게 아닌데, 이러려고 비전을 품고 꿈을 꾼 게 아닌데, 이러려고 쉼 없이 달려온 게 아닌데… 하나님 앞에 섰을 때는 내가 참 가진 게 많고, 특별한 줄 알았지만, 사회와 직장이 나에게 요구하는 건 단 하나다. 직장에 이익을 낼 수 있는 요소 하나로만 내가 규정되고, 나 또한 그 기준으로 사람을 대해야 한다. 그리고 시간이 가면서 나의 원대한 꿈과 비전은 축소되고 축소되어 결국 한 가지만 남는다. 그곳에서 살아남는 것, 그것뿐이다.

▲ 누군가 인생은 바둑과 같다고 했다. 바둑에서 언제든 먹힐 수도 있는 미완성의 집을 '미생'이라 부른다. 자본주의 경쟁 사회에서 내가 자리를 차지하려면 나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 미생이 살아남는, 바둑돌이 서로의 색을 받아들여 회색 돌이 되어 다 같이 사는 새로운 바둑판 인생은 불가능할까. 사진은 '미생'의 대표 이미지. (사진 출처 tvN)

바둑돌 하나가 판 위에 놓이고, 이 돌은 361칸 중의 하나를 차지한다. 자리를 차지했다고 해서 결코 안심할 수 없다. 이 돌 하나가 자기 집을 짓고 살아남을지 혹은 상대방에게 잡아먹힐 돌일지 게임이 끝날 때까지 아무도 모른다.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서 나와 다른 색깔을 내 주변에 허락하면 안 된다. 나와 다른 색을 가진 돌에 둘러싸이면 죽는다. 죽지 않으려면 같은 색깔의 바둑돌을 이어 두 개 이상의 공간(집)을 마련해야 한다. 두 개 이상의 집이 생겨 상대방이 죽일 수 없는 집이 되면 그 집을 '완생'이라고 부르고, 그리고 완생할 여지를 남기고 있지만, 언제든 먹힐 수도 있는 미완성의 집을 '미생'이라 부른다.

미생이라는 드라마가 요즘 한참 인기다. 드라마에는 톱스타도 없고, 별에서 온 외계인도 없고, 출생의 비밀도 없다. 그 흔한 애틋한 남녀 간의 사랑도 없다. 숨 막히는 우리의 현실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불쌍한 신입 사원 장그래가 있다. 검정고시 고졸 출신에 요즘 개나 소나 다 가지고 있는 컴활(컴퓨터활용능력 자격증) 하나 있는 장그래가 믿을 수 있는 것은 남들과 차별 있는 노력뿐이다. 그나마 하나 있는 드라마적 판타지는 정직과 성실만으로 장그래가 성공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다.

누군가 인생은 바둑과 같다고 했다. 더 엄밀히 보면 자본주의의 생리와 바둑의 비교가 더 정확한 말일 것이다. 경쟁 사회에서 내가 자리를 차지하려면 나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 내 사업이 잘된다는 건 경쟁 업체가 힘들어진다는 뜻이고, 경쟁 업체가 잘된다는 소식은 내 이익이 줄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영업이익을 내려면 사원들에게 더 가혹한 폭언을 퍼부어야 하고, 출산휴가를 바라는 여성들에게는 눈치를 줘야 한다.

자신이 살아남으려면 때로는 옳지 않은 것을 보고 침묵해야 하고, '갑' 앞에서 굽실거려야 하는 '을'의 자존심 따위는 하루빨리 털어 버려야 한다. 나와 나의 이익이 되는 존재는 흰색이고, 그 외에 사람들은 또렷한 흑색이다. 그 외에 어떤 칼라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와 그리고 적이 있을 뿐이다. 어떤 과정을 통해 바둑을 두는지, 나와 상대가 얼마큼의 차이가 있는지 따지지 않는다. 승자와 패자, 성공과 실패로만 내가 규정된다. 살아남기 위해서 속임과 꼼수도 있어야 하고, 큰집을 위해 작은 집을 내주기도 하는 바둑은 인생의 축소판이다.

오늘 한 독거노인의 자살 소식이 있었다. 자신의 시신을 수습해 줄 사람들에게 남긴 수고비 10만 원과 밀린 공과금도 함께 있었다. 봉투에는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답지 않게 "고맙습니다. 국밥이나 한 그릇 하시죠"라는 여유로운 인사말이 적혀 있었다.

지난번 충격을 준 세 모녀 자살 사건도 그랬다. 치료비가 없고 당장 먹고 살길이 없어 죽는 마당에 그들이 죽기 전 유일하게 마련한 건 밀린 공과금이었다. 먹고, 먹히는 자본주의 사회와 어울리지 않는 대표적인 '예스맨'들이다. 정해진 사회구조를 바꿀 생각을 못 하고, 나에게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다 결국 그 속에서 낙오되었을 때는 자기 탓만 하는 사람들….

매번 '그래(YES)'로 화답하는 장그래를 보는 시선이 불편한 건 그 탓이다. 우리가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바둑의 룰을 좀 더 바꿔 볼 순 없는 걸까? 내 이익의 많은 부분을 세금으로 공유해서 어제 나의 적이었던 실패한 이웃들에게 나눠 주면 어떨까? 나도 까만색을 조금씩 받아들이고, 상대방도 하얀색을 조금씩 받아들여 회색으로 인생의 바둑판을 두는 건 어떨까? 그 누구도 죽지 않고 내 집이 너희 집이 되고, 다 같이 살 수 있는 우리 집이 되는 건 이 땅에서 불가능한 낙원일까.

이신근 / 희년함께 협동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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