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2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90주년 기념 토론회가 한국기독교회관에서 열렸습니다. '흔들리는 교회, 다시 광야로' 주제의 토론회에서 한신대 이혜영, 감신대 박창현 교수와 YMCA전국연맹 이윤희 사무국장이 발제자로 나섰습니다. 본 글은 박창현 교수의 발제문입니다. 허락을 받아 요약 게재합니다. - 편집자 주 

1. 한국교회의 선교의 현실과 전망

70년대까지 한국 개신교회의 선교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균형 잡힌 모범적인 모습, 즉 한국교회의 선교는 물질 위주가 아닌 종교적 영성이 강조되어 일반 사회, 정치·문화적인 면에서도 세계 선교의 역사 속에서 특별히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었다.

한국교회는 선교 초기 나라가 일제의 식민지 찬탈로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영적인 부흥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종교적인 만족만을 준 것이 아니었다. 네비우스 선교 정책처럼 처음 선교의 대상을 가난한 하층민이나 여자들로 결정을 한 것이나, 한글로 만든 성경으로 한글을 보급하여 평민들이 쉽게 읽도록 한 것, 3·1운동 등에서의 거국적인 역할을 해낸 것, 병원과 학교 등의 건립으로 근대화에 이바지한 것, 선교사들이 정치적으로 중립적 내지는 독립운동을 협조해 준 일, 해방 후와 6.25전후에 전국적인 조직망으로 재건 사업에 힘쓴 일, 또는 70년대의 민중신학의 태동 등이 국민들에게 개신교를 선택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 주었다. 초기의 개신교의 선교는 변화하는 현실의 상황과 국가 위기에 능동적이며 융통성 있게 교회가 잘 대처하며 기독교 문화의 창출에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반응을 유발하였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선교에서 긍정적인 요인들은 한국교회가 세계 교회의 선교사에서 가장 빨리 성장하는 교회, 초대형 교회의 등장 등으로 빠른 시간에 경이할 만한 수적 증가를 이루어 주목받는 교회로 만들었다. 한국교회는 1994년에 통계에서 전 국민의 30%를 기독교화하였다고 하는데, 이 숫자는 전체 아시아인의 2%가 기독교인인 것에 비하면 엄청난 것으로서, 아시아의 기독교인의 7명 중에 한 명이 한국 사람이라는 것을 뜻하였다. 한국의 개신교의 성장을 "선교의 기적" 또는 "교회의 기적"이라고 부르게까지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교회와 그 선교는 어떠한가? 최근 한국교회의 선교의 상황을 위기라고 표현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한 주장을 하는 이들의 근거 가운데 중요한 것은 교인의 수가 80년대 후반기부터 정체를 나타내더니 이제 그 정도를 지나 감소 추세로 장기화·고착화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으로, 전에는 간단한 초청만 해도 교회로 찾아오던 사람들이 교회가 온갖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여도 교회로 오지 않으려고 하고, 그뿐만이 아니라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보다 교회 밖으로 나가는 사람들이 오히려 많아졌다. 한 시대의 국가 종교로서 굳건한 위치를 지켰던 고려시대의 불교와 조선시대의 유교도 국민들로부터 외면을 당했던 것을 기억한다면 개신교회의 위기는 생각보다 심각할 수 있다.

과연 한국교회는 "한국 개신교회 선교와 성장의 최대 걸림돌은 사회에서 공신력을 잃어버린 교회 자신이다"라는 말을 인정해야 하는 단계에 와 있는가? 선교의 기적이라고 놀라던 한국 개신교회의 빠른 성장이 1885년에서 1980년 초기까지의 100년간이었다면, 교회가 무너지는 속도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빠르다. 거의 30년 만에 한국교회의 성도 수는 반으로 줄어드는 현상이기에 교회의 존재 자체에 대한 염려마저 갖게 되는 상황이다.

그래서 본인은 38년간 인도에서 선교를 마치고 자기를 파송하였던 고국, 영국에 돌아와서 세계를 향하여 "선교하는 교회"에서 "선교지보다도 더 이교적인 교회"가 되어 무너져 내리는 위기 앞에 선 영국 교회의 현실을 염려하며 그 대안을 제시한 영국의 선교신학자 레슬리 뉴비긴으로부터 시작해 현재 전세계적으로 선교에 대한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있는 '선교적 교회론'을 소개하고, 한국교회 선교의 모범적인 시대라고 일컫어지는 한국 초기 선교의 형태를 분석하여 성서와 역사 그리고 선교신학에 근거해 한국교회의 상황에 맞게 생기를 불러들일 수 있는 가능성들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2. '선교적 교회론'의 이해

선교적 교회론이란 무엇인가? 이 개념을 이야기한 뉴비긴은 현재적이고 가시적이며 그러나 불완전한 공동체를 인정하면서도 하나 되는 미래적이고 종말론적이며 완전을 지향하는 교회론을 추구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교회 간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기 위해 연합하려고 노력하며 선교적 현실을 사는 종말을 향한 공동체가 '선교적 교회론'이다.

뉴비긴은 이러한 공동체를 1)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자가 모인 곳, 2) 사도의 가르침과 성도간의 교제가 있는 곳, 3) 함께 거하고 떡을 떼며 기도하는 '가시적인 모임'으로 제시한다. 오늘날 그러한 공동체는 구체적으로 1)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영입되고 2) 역사적 연속성을 가진 교회에서 성례에 참여함으로 영입되고 3) 성령을 받고 그 안에 거함으로 영입된다 고 밝히고 있다.

선교적 교회론을 정리하면, 1) 선교의 경험에서 잘못을 시인하는 것이고 2) 성서적이고 역사적이며 상황에 맞는 분명한 교회론에 근거한 선교의 본질을 찾는 노력이고 3) 선교란 이미 오신 예수와 다시 오실 예수 사이에 존재하는 교회의 의무로서 교회 안이 아니라 교회 밖, 세상에 대한 관심이고 4) 불완전한 가시적이고 현실적인 다양한 교회들의 연합에서 완전한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종말적이고 보편적이며 우주적인 하나의 교회를 지향하는 것이고 5) 말씀의 선포와 성례의 전통의 준수 그리고 성령의 역동적인 경험이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하여 드러나는 균형 잡힌 교회론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국내 선교와 국외 선교를 구분하지 않고 현재 교회 안에서 안주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현 교회들의 경계를 넘어 교회 밖을 향하여 진군하며 땅끝까지 이르러 그리스도의 삶의 증인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기독교의 본질로서 선교적 교회는 대표를 정해 세상에 파견하는 것이 아닌 그 자체로 참여하고 변혁하는 것을 말한다.

3. 선교적 교회론에 의한 한국교회 초기 대 부흥 운동(1903-1907년)의 재평가

앞에서 본인은 한국교회의 선교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선교신학적 해결책으로서 뉴비긴으로부터 제시된 '선교적 교회론'을 살펴보았다.

여기서는 이러한 선교적 교회론의 입장에서 실제로 한국교회가 행한 선교적 행위에 대한 해석으로서 구체적인 선교를 돌아보고 하나의 긍정적인 선교의 모델로서 세계 교회에 기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한국교회가 초기에, 특별히 1903-1907년에 원산으로부터 시작하여 전국적으로 확산된 '대각성 운동'을 통하여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 왔지만 그러나 지금은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는 사실에 입각하여, 이러한 현상을 선교적 교회론으로 재평가하여 한편으로는 한국교회의 선교에 대한 평가와 함께 한국교회의 위기에 대한 미래의 대안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먼저 한국교회 초기 선교의 현상을 다시 정리해 보기로 하자. 이덕주는 한국 개신교회 부흥 100년을 정리하는 논문에서 한국 초대 교회의 성공적 선교에 대한 이유를 다음 세 가지로 이야기 한다. 1) 복음이 한국 민족의 종교 문화와의 만남에서 이 민족이 가지고 있던 것과 잘 어우러져 어색하지 않게 토착화가 잘 이뤄졌고 2) 서구의 교회가 한국 민족의 불행한 삶의 정황, 즉 일제의 포악한 식민 정치 속에서 고통을 함께 분담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하게 해 주었고 3) 특별히 이러한 것이 종교적으로 이뤄지기 위한 복음적 신앙 전통으로 회개와 중생 그리고 성화로 이어지는 기독교의 본질적인 요소가 성도들의 삶을 통하여 분명하게 드러났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건으로 한국교회의 '대각성 운동', 1903년 원산 부흥 운동과 1907년 평양 부흥 운동을 이야기할 수 있겠다.

3.1. 원산 부흥회의 선교적 평가
한국 개신교회의 영적 부흥을 불러온 첫 출발점으로 인정되는 원산 부흥은 1903년 8월 24일부터 30일까지 1주일 동안 원산에서 성경공부와 기도 모임을 가진 것을 계기로 시작된 부흥 운동을 말한다. 이 모임을 인도한 남감리회 선교사 하디는 한국 교인들 앞에 자기의 부덕함과 부족함을 솔직히 고백했는데 바로 이것이 조선 교인들의 마음에 감동으로 다가왔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은혜를 체험하게 된 사람들이 원산 부흥 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이것은 선교사가 먼저 자신이 영적으로 구원받고 구원의 확신을 가질 때에만 선교지의 사람들과 진정한 영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사건이다. 단순히 교리의 선포나 설교를 통하여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의 구체적인 문제 속에서 선교사의 삶을 통한 해답을 경험하게 될 때 쉽게 일어난 것이다. 즉 '성육신 선교 모델'을 실천하는 선교사의 모습이 선교지의 사람들과의 감성적인 소통이 쉽게 일어났다.

이러한 선교적 현상은 개성으로, 강원도 동부 지방으로 그리고 서울의 배화여학교로, 정동교회로 평양으로 이어졌다. 고백적 회개는 결단하는 선교적 행동으로 결실을 맺었다. 그런가 하면 원산의 부흥 운동은 초교파 운동의 틀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1905년 9월 조직된 '한국 복음주의 연합공의회'에서 사경회 등의 모임을 감리교-장로교회가 연합해 개최했다.

3.2. 평양 부흥 운동
1906년 8월, 1주일간의 감리교와 장로교 선교사들의 연합 기도회가 열렸는데 여기서도 하디가 인도하였다. 여기 참석한 선교사들은 깊은 감동을 받고 평양 부흥의 준비를 마련하였다. 집회는 특히 장로교회에 큰 영향을 주었고 특히 장대현교회의 길선주 목사에게까지 영향을 주어 장로교 중심의 평양 대부흥회의 불씨로 작용하였다. 이 때 한국 교회의 신앙의 중요한 틀로 여겨지는 통회자복과 통성 기도의 대표적인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특징적인 것은 이러한 공개적 죄 고백이 아주 구체적이었다는 사실과 서로 알만한 가까운 사람 사이의 간음, 미움, 거짓말, 심지어는 선교비를 횡령한 사실까지를 거침 없이 고백한 부분이다.

4. 한국교회 초기 선교의 현상에 대한 선교학적 평가

1) 한국교회는 처음부터 선교적이었다
한국교회는 교회의 본질인 선교를 처음부터 중요한 현상으로 간직하고 있다. 한국 개신교가 처음 공식적으로 출발한 1885년 이후 줄곧 한국 개신교회는 선교적인 모습을 보여 왔지만 특별히 1903-1907년으로 이어진 대 각성 부흥 운동은 곧바로 개인과 교회 그리고 전체 교회의 연합적인(에큐메니칼) 전도 운동으로 이어지는 특징을 보여 준다.

선교가 보내는 자와 직접 가는 자로 나눠지거나, 사람으로 못 가면 물질로라도 간다거나, 선교는 규모가 있는 교회가 해야 한다는 잘못된 선교적 이해를 한국교회 대부흥 운동에서는 볼 수가 없다. 이러한 선교적 이해가 '날연보(日捐補)'에 담겨 있다. 이는 '한국교회 특유의 토착적 신앙 양태'로서 은혜를 체험한 교인들이 물질 대신 시간을 하나님께 바치는 '연보 행위'를 일컬어 하는 말이다. 이에 대한 기록은 1904년 11월 평북 철산 지방 사경회에서 처음으로 '350일을 헌납하였고', 1주일 후 선천 사경회에서도 선천 교인들이 625일, 의주 교인들이 524일, 초산과 강계 교인들이 720일을 헌납하였다는 것으로 남아 있다. 날연보는 계속해서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어 불과 2년 사이에 전국 각지로 확산되어 초교파적으로 실시되었다.

모든 집회는 이런 '날연보'로 끝났고 1910년 1년간 전국에서 바쳐진 '날연보'는 10만 일이 넘었다. '날연보'를 한 사람은 무급 전도인으로 선교를 하였다. 이들 무급 전도인들은 선교사나 유급 전도인들의 발이 미치지 않은 시골 구석구석 '땅 끝'에 이르러 복음을 전하였다.

이것은 어찌면 지금까지 우리가 선교에 있어서 어려워하는 '돈이 곧 선교'라는 생각에 현지인들을 전도로 내몰며 거기에 해당되는 급여를 지불할 수 있어야 선교가 가능하다고 믿는 것에 경종을 울리는 일이라 하겠다. 즉 "성령을 받으면 권능을 얻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서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는 성경의 진술, 성도는 성령을 받아야 하고 그 성령받은 증거가 곧 선교하는 행동 변화라는 성경의 선교에 대한 핵심이 적어도 한국교회의 초기 부흥의 역사에서는 여실히 드러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 한국교회의 선교는 성도의 삶의 변화를 동반하였다
사경회에서는 조혼, 교육, 청결, 흡연 등과 같은 주제를 놓고 공개적으로 토론을 벌이는가 하면 기독교가 들어오기 이전에는 '죄 의식' 없이 행해지던 '봉건시대' 습관적 행위들(축첩과 조혼, 노비 제도, 술과 담배)이 새롭게 죄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교인들의 삶의 변화는 교육의 효과라고만 이야기할 수가 없다. 그들이 성령을 받자 그들이 일상 생활 중에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던 불의하고 부정한 일들을 스스로 깨닫고 돌이켜 바로잡았고, 그리스도 안에서 남자와 여자, 종과 주인이 없는 것을 교회 안에서 직접 피부로 경험하게 된 것이다.

3) 종말의 긴장을 잊지 않고 성령 안에서 교회 간의 협력을 중시하는 선교적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 초기 부흥 운동에 드러난 한국교회의 선교적 교회론적 특징으로 마지막 중요하게 언급 하여야 할 것은 한국교회는 ㄱ) 현실의 가시적인 교회와 교인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ㄴ) 그렇기에 성령을 받아야 함을 전제 조건으로 제시하였고 ㄷ) 교회들이 그리스도의 이름하에 서로 연합(에큐메니컬)을 위해 노력하였다는 것이다.

5. 나가는 말: 회복되어야 할 한국교회의 선교적 교회론에 근거한 선교적 교회

오늘 우리의 결론은 또 다른 사명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면서도 너무 멀리 떠나온 선교의 본질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고 있다. 마치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아밋대의 아들 요나가 그 순간부터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자기가 가야 할 곳의 정반대로 갔던 것처럼(욘 1:1-3) 한국교회는 지금 하나님의 선교의 명령을 받은 순간부터 하나님을 피하여 이동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즉 세상을 향하여 나가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고, 땅끝까지 나가서 선교하라는 선교 명령을 알고도 우리는 교회 안에서만 머물며, 우리만을 위한 빛으로, 그리고 교회의 문을 안에서 걸어 잠그고 우리들만의 축제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세상 속에서 세상을 위하여 살라고 하신 주의 명령을 어기고 교회만을 위하여 세상을 등지고 사는 모습인 것을 깨닫게 된다.

기독교의 선교론은 예외 없이 예수에게서 비롯되었고 그 근거는 "성령을 받으면 권능을 얻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라(행 1:8)"는 말씀에 근거한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 삼으라(마 28:19-20)"는 예수의 승천하시기 전 마지막 말씀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의 말씀과 함께 교회의 선교적 본질을 분명하게 드러내 주고 있다. "땅 끝까지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선교인데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교회 안에 끼리끼리 모여서 자기들끼리만의 공동체를 만들어 놓고 세상과는 무관하게 심지어는 주님이 구원하라고 보낸 사람들을 적으로 만들어 놓고 살아가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교회를 지키라고 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하여 나가라고 하였다. 우리는 한국교회의 위기를 기회로 삼아 선교를 교회의 중심에 두는 교회론의 가장 분명한 모델이었던 한국 개신교회의 처음 출발점을 올바로 이해하고 이제는 잊혀져 가는 그 좋은 전통을 스스로 찾아 내어 그리고 우리의 몸으로 다 살아 세상에 하나님의 선교를 다시 회복하여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오늘날 교회의 선교는 선교의 주체들 안에서 성령의 임재를 스스로 경험하고 또 이것을 그들의 삶의 변화와 함께 공동체가 함께 사모하고 경험하도록 하는 종교성을 회복하는 공동체로 거듭나야 한다.

마지막으로 한국교회의 세계 선교의 기여는 여기서 언급하지 못한 100년이나 앞서서 이 땅에 들어와 민족의 구원의 돌파구를 마련하였던 천주교회의 선교 이야기와 함께 완성되어야 하는 과제가 있음을 밝히고자 한다. 천주교는 불평등한 신분 제도와 당파 싸움으로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에 꺼져 가는 등불과 같은 현실에서 광암 이벽과 정약용, 권신철과 같은 당대의 훌륭한 유학자들이 민족의 살 길을 외부의 학문과 기술로부터 찾아보고자 천주교로부터 전해진 성서와 교리를 읽으며 스스로 깨달아 도달한 종교이다. 이러한 선교는 1984년 교황 바오로 2세가 방문시 말했듯이 세계적으로 유일한 경우이다. 그러한 결과 위에 개신교회가 천주교의 도움을 받아 훨씬 유리한 조건에서 100년 후에 개신교 선교를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서양 개신교 선교사들의 입국보다 먼저 한글 성서를 번역하여 이 땅에 배포할 수 있었던 일은 1880년 일본 요코하마의 천주교 루미스 신부가 만들어 낸 <불한 사전>이 없이는 불가능했다. 그리고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선교사의 한글 어학 선생이었던 조성교와 송덕조는 천주교인들이었다는 사실이 개신교 선교에 천주교회가 얼마나 크게 관여하였는지 알 수 있다.

천주교와 개신교회는 신학의 차이를 들어 서로 반목하며 갈등을 가져온 안타까운 현실을 직시하고 미래에 다양하지만 하나님 안에서 하나 된 교회를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얼마 전 한국을 방문하였던 프란치스코 교황은 어쩌면 이러한 현실에 우리에게 새롭게 나가야 할 미래의 분명한 에큐메니칼 목표를 주고 있다. 그는 이 땅에 와서 신학적 논쟁에 불을 붙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자의 삶의 모범을 통한 하나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해 주었다. 그는 이 땅의 소외되고 가난한자, 억눌리고 장애를 입고 슬픔에 갇혀 있는 사람에게 찾아가 손을 잡아 주고 그들과 함께 울고 웃어 주었다.

그는 그렇게 평생을 살아왔고, 또 그렇게 이야기하였으며 또 그렇게 우리에게 보여 주고 갔다. 어쩌면 이제 한국교회가 세계 교회를 향하여 제시해야 할 중요한 선교적 과제는 신앙인들이 이러한 교황이 보여 준 그리스도의 영성에 근거한 삶의 변화와 실천을 통해 이룩해야 할 하나님 안에서의 하나의 교회 된 모습이 아닐까 한다.

박창현 / 감리교신학대학교 선교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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