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글

▲ <인간이란 무엇인가> / 손희영 지음 / 복있는사람 펴냄 / 348쪽 / 1만 3000원

세월호 사건 이후 단식 투쟁을 벌이는 김영오 씨, 그의 단식은 날마다 신문 지면에 오르고 있으며, 다양한 사람들의 말들 속에서 이슈의 중심이 되고 있다. 다양한 견해들이 있을 수 있지만 단순하게 이분법으로 구분하자면, '세월호 사태의 진상을 밝히려는 고결한 단식 투쟁'이라는 프레임과 또 한편으로는 '보상금을 받아 내기 위한 저열한 단식 투쟁'이라는 프레임으로 나뉜다. 이러한 프레임 전쟁의 이면에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숨어 있다. 인간은 무엇을 향해, 그리고 무엇을 위해 달려가는 것일까? 누군가는 분명 '돈'이라고 말하는 것 같고, 누군가는 '고결한 그 무엇'을 말하는 것 같다.(이를테면 사건의 진상 규명이랄지, 혹은 딸에 대한 도리 준수랄지)

그러고 보면 사실상 기독교의 복음이란, 그리고 기독교의 신학이란 인간학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단순히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인가에 대해 다양한 이야기를 통해, 그리고 언명들을 통해 그려 냄으로써 세상은 어떤 세상이며, 또한 인간은 어떠한 존재인지를 말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 위에서 우리네 기독교 복음이 뜬구름 잡듯이 공허하며, 또 때로는 감히 입에 올리기 힘들 만큼 천박한 언행들로 자리매김하는 이유는 바로 기독교의 복음, 혹은 신학에 대한 잘못된 이해이며, 이는 결국 세상과 인간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 이어지기 때문은 아닐까?

오늘 소개할 책, 손희영 목사의 설교집인 <인간이란 무엇인가?>는 이러한 인간에 대한, 그리고 세계에 대한 인식이 흐릿해져 기독교 복음마저 천박해지는 현실 속에서 기독교 복음이라는 큰 그림을 오롯이 그려 내기 위한, 일종의 밑그림인 '인간'에 대해서 설교한 설교들의 모음집이다. 그의 설교는 전통적인 설교의 향취를 뛰면서도, 기존 개신교 목회자들의 설교 속에서 찾아보기 힘든 히브리적 인간관을 기반으로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인간에 대하여, 그리고 세계에 대하여,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에 대하여 그려 내고 있다.

특별히 그는 세 가지의 점층적 방식을 통해 인간에 대한 포괄적 그림을 그려 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먼저는 히브리적 구도로 전체적인 밑그림을 그려 낸다. 이어서 기존의 이야기들을 밑그림 위에다가 차근차근 배열해 낸다. 마지막으로는 그렇게 그려 낸 그림으로써 포괄적인 인간과 세계,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완성된 그림을 보여 준다. 한번 <인간이란 무엇인가?>의 논지에 따라 그려진 그림들을 따라가 보자.

인간에 대한 밑그림, 히브리적 구도로 다시 그려 내다

신, 그리고 세상, 인간에 대하여 생각하는 기독교 전통에는 크게 양 갈래가 있다. 하나는 그리스인들의 철학을 배경으로 한 헬라적 구도이다. 사실상 기독교를 세상 속에서 변증해 오고, 그 진리들을 오롯이 그려 내 온 사상의 배경이 '헬라적' 구도인 그리스 세계관이기에, 사실 우리게 익숙한 구도이자 배경이기도 하다.(사실 우리나라가 터한 동양적 배경과는 살짝 다른 맥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테면 선과 악을 이분법으로 구분 짓고, 육체와 영혼을 이분법으로 구분 짓는 우리들의 흔한 사고방식의 이면에는 이러한 헬라적 구도가 존재한다.

반면 손희영 목사의 저서 <인간이란 무엇인가?>에서는 이러한 헬라적 구도를 지양하고, 유대인들의 일반적 세계관인 히브리적 구도를 지향하고 있다. 이를테면 첫 번째 설교인 '인간존재, 생명력 그리고 복'에서는 네페쉬, 레브, 바라크와 같은 히브리어들의 간략한 해설들을 통해서 도대체 유대인들이 어떤 방식으로 인간을 사유했는지를 그려 낸다. 물론 일반 성도들을 향한 설교집이기에 히브리어 해설 부분이 그렇게 어렵지 않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구하는 것만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만이 최고의 복이며, 그것이야말로 인간 존재의 본연의 모습임을 그려 낸다. 사실 이러한 히브리적 인간관을 바탕으로 볼 때에 우리는 사변적인 교리 논쟁에서 벗어나,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구원 역사의 내밀한 깊이 속으로 치고 들어갈 수 있다.

이를테면 '죄'라는 개념, 그리고 '구원'이라는 개념은 우리가 흔히들 착각하는 개념이다. 이를테면 '죄=하나님을 떠남'이라고 공식처럼 달달 외면서도 실질적으로 우리가 죄를 생각할 때는 개인적이고, 도덕적인 사사로운 일탈들의 목록들을 떠올리게 된다.(그것이 죄가 아니란 말은 아니다. 다만 핵심과는 동떨어지게 된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그러면서 응당 구원은 그러한 사사로운 일탈로부터 떠나서 하나님만을 섬기는 것이 되는 것이고, 그러한 개념은 결국 내세의 구원인 천국행으로 그려지고, 이에 따른 구원받은 자의 자기 확인의 욕망은 결국 예배에의 몰입, 수련회에의 몰입과 같은 종교적인 것으로 치우친다. 응당 김영오 씨의 단식과 같은 이야기, 또한 주변에 있는 온갖 가난한 자와 고통당한 자들의 모습은 우리네 신앙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유로 격하되기 마련이다.(혹은 '복음 전도'라는 측면에서 예화로, 혹은 교회 등록을 위한 접촉점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지점에서도 손희영 목사의 설교들은 강점을 발휘한다. 첫 번째 설교에서 적용한 히브리적 인간관을 바탕으로 죄라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떠난 인류의 전반적 상태이며, 이를 궁극적으로는 '아담적 인류'라는 언어로 정의하며, 이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행위로서의 언약 맺음을, 그리고 하나님과의 궁극적 관계 회복을 이야기한다. 이러한 밑그림이 탄탄하기에 이어서 그려지는 악의 실제와 같은 큰 그림이랄지, 그러한 악의 실제에 대해서 큰 승리를 거두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과 같은 큰 그림들이 제자리를 잡는다. 손희영 목사의 설교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우리가 가져 온 모든 신앙 논리들의 여백과 공백들은 그의 차분하고도 쉬운 해설들로 채워지며, 어느새 우리는 이렇게 고백하게 된다. '아하, 우리가 가진 구원이 이렇게 신비한 것이구나!'라고 말이다. 바로 밑그림이 제대로 그려졌기에 터져 나오는 고백들이다.

기존의 이야기들, 밑그림 위에 다시 그려 내다

처음 전반부의 설교들이 기존의 우리네 흔한 개념인 헬라적 구도로 보는 이분법적 인간관을 깨뜨리는 유의 설교였다면, 그래서 상당히 신선하고 또 한편으로는 전복적인 설교였다면, 설교의 회차를 거듭할수록 그의 설교는 우리가 흔히 들어왔던 이야기를 향한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히브리적 구도로 밑그림이 다시 그려졌기에 이전과는 새로운 방식으로 들리게 된다. 이를테면 그는 다섯 번째 설교인 '아, 원수였던 나를'에서는 동일하게 용서와, 십자가, 그리고 소속의 변화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생각해 왔던 수련회에서의 개인적이고 도덕적인 잘못으로 인해 눈물과 콧물을 쏟아내었던 고전적 그림과는 전혀 다르게 들리게 된다. 이는 죄의 거대한 세력 가운데 포로로 사로잡힌 우리네 실존에 대한 이야기로, 또한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네 소속이 죄와, 사탄과 악의 세력과의 연대성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의 연대성, 생명과 성령의 법과의 연대성으로 변혁되었다는 우주적 이야기로 들리운다. 한마디로 우리가 흔히들 들어 왔던, 그래서 감명은 했지만 논리적 공백이 무수히 많았던 이야기들이 어느새 새로운 밑그림 위에서 제자리를 잡아 가게 되는 것이다.

이런 맥락 속에서 부활은 우주적인 죄와 사탄의 세력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라는 거대한 구도 속에서의 하나님의 신비로운 승리로서 제자리를 잡게 되고, 그 이후에야 비로소 성도가 당하는 실질적인 문제, 그러니까 인간이 당하는 본연의 고난의 문제는 새로운 해석을 맞이하게 된다.(사실상 재해석이라 말하기도 힘든 것이, 원래 성경은 계속 그렇게 말해 오고 있었다.) 부활로 말미암아 맞이한 죄와 사탄의 세력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 새 시대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탄의 통치가 만연한 예전 시대의 중첩을 살아 내는 우리네 성도들은 응당 '고난'이라는 현실과 마주선다. 이는 성도가 십일조를 안 냈기 때문도 아니요, 제대로 된 구원을 못 받았기 때문도 아니요, 평소에 기도와 성경 읽기와 같은 경건 생활 포인트를 쌓지 않았기 때문도 아닌, 옛 시대와 새 시대의 교차점에 살아가는 새 시대의 상속자, 즉 그리스도인의 일반적 징표이다.

또한 우리네가 흔히들 들어왔던 심판, 둘째 사망, 죽음과 같은 일반적인 내세 지향적 신앙관의 언어들 또한 새롭게 자리를 잡는다. 앞서서 히브리적 인간관이라는 밑그림을 통해 손희영 목사는 인간의 인간 됨이란 하나님과의 연대이며, 하나님의 생명이 풍성하게 부어지는 것을 강변했기에, 이러한 개념의 연장선상에서 사망, 둘째 사망, 영원한 죽음과 같은 그림언어들은 하나님과의 완전한 분리로 자리매김한다. 기초적인 히브리적 인간관에 대한 밑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면 이와 같은 기존의 이야기들을 읽어 내면서, "왜 그것이 영원한 형벌입니까? 왜 그것이 지옥입니까?"라고 항변했겠지만 앞서 이야기해 왔던 히브리적 인간관의 밑그림 위에서 이런 이야기를 듣는다면 어느새 우리는 끄덕이게 된다. '아, 하나님과의 영원한 분리야말로 우리게는 최악의 저주구나.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인간 되지 못하게 하는 최악의 저주구나.' 그렇다, 손희영 목사의 설교들을 하나하나 천천히 곱씹다 보면 너무나도 전통적이고, 흔히들 들어 왔던 이야기들이 어느새 우리네 통념에 따른 잘못된 자리에서 벗어나, 원래의 제 자리를 찾아가는 신비를 접하게 된다.(사실 그가 강변하는 구원의 신비, 인간의 신비도 이와 같다. 잘못되었기에 어색한 자리를 벗어나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드디어 완성된 인간이라는 성경적 그림을 음미하다

손희영 목사의 설교집 <인간이란 무엇인가?>는 처음에는 조금 신선한 개념으로 시작하지만 막바지에 이를수록 인간 고유의 모습에 대한 목회자 특유의 감성적인 색채들이 묻어난다. 이를테면 8번째 설교 '잃어버린 나를 찾아서'와 9번째 설교 '하나님의 인도와 우리의 선택'에서 다루는 주제들과 내용들은 성도들의 흔한 고민과 목회자로서의 따뜻하면서도 신학적인 조언들이 어우러진 느낌이다. 이를테면 목회 현장에서의 성도들은 지나친 경쟁 속에 매몰된다. 이를테면 돈을 향한 경쟁, 명예를 향한 경쟁, 아름다움을 향한 경쟁, 더군다나 교회 안에서의 권력 투쟁에 이르기까지. 손희영 목사는 이를 인간론적 관점에서 접근하여 '모든 인간은 '나'로서 이미 소중한 존재'임을 강변한다. 한마디로 자신이 소중한 존재임을,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존재임을 잊은 결과라고 진단하는 것이다. 또한 흔한 '잘못된 예정론에 대한 이해'에서 발생하는 피동적인 신앙이랄지, 혹은 그러한 피동적인 신앙 이해에 대한 반발로서 신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서 일갈하기도 한다. 이에 대하여 그는 '이율배반적인 진리'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우리네 인생들은 하나님의 100% 인도하심이며, 100% 우리네 자율적 선택과 책임이라고 해설하며 말이다. 이와 같은 설교들은 인간에 대한 학술적 이해는 아닐지라도, 목회 현장에서 흔히들 발견하는 성도들의 실존에 대한 인간 이해를 담아내고 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수록된 14편의 설교들은 일관적인 논리들을 가진다. 하나님과의 풍성한 관계를 누리는,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기로 작정한 구원받은 인간은 아이러니하게도 고난이라는 현장 속에서 만들어진다고 말한다. 앞서 말했듯이 이는 사탄의 지배가 박살난 새 시대와, 사탄의 지배가 아직도 현존하는 옛 시대 사이를 사는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면서, 또한 이러한 특권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인을 더욱 인간 되게 한다고 말한다. 무슨 말인가? 그가 앞서 말했듯이 인간이 가장 인간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풍성한 교제가 필요한데, 그러한 풍성한 교제를 위한 하나님께 대한 의존의 외침은 결국 삶에서의 결핍, 이른바 고난의 현장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타락한 인간은 끝없이 강함을 추구하고, 그 강함은 결국 인간의 참된 본질인 하나님을 배격하지만, 구원받은 인간은 끝없이 세상의 세태 앞에서 고난을 당하고, 그 고난이 초래하는 약함을 인간의 참된 본질인 하나님의 생명을 온몸으로 받아 낸다는 말이다. 이야말로 손희영 목사가 바라보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큰 그림이며, 이러한 그림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윤리 실천의 지향점 또한 은밀히 드러난다.

따라서 그는 힘과 권력을 추구하는 세상 법칙을 통해서는 이 세상의 불의와 악의 세력의 패배가 불가능하다고 본다. 오히려 '약함' 내지는 '마중물'로 대변되는 성경적 인간관의 키워드를 통해서 이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윤리 실천이 지향해야 한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십자가의 방식 외에는 이 세상을 변혁시킬 방식이 없으며, 십자가의 방식 외에는 이 세상에서 참된 인간으로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미련해 보이고, 덧없어 보일지라도 우물의 물들을 끌어올리는 마중물처럼, 하나님의 거대한 우주 펌프는 우리네 십자가 방식을 통해 이기심과 자기중심성에 찌든 인간 세계를 구원해 나가시고, 당신의 구원 행위를 추동케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손희영 목사는 너무도 나이브한 것 같아 보이지만, 하지만 그의 밑그림 속에서는 너무도 온갖 피와 땀이 서린 외침으로 본 책을 마무리한다. 바로 약함으로서, 마중물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라고 말이다. 그것이야말로 이 세상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미련한 방책이면서, 모든 인간들의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지혜로운 방식보다 더 지혜로운 방식이며, 그러한 인간의 지혜들보다 지혜로운 하나님의 미련한 방책을 따라 사는 것이야말로 참된 인간으로서의 삶임을.

나가는 글

손희영 목사는 <구원이란 무엇인가?>, <교회란 무엇인가?>를 통해 우리게 알려진 목회자이다. 그런데 사실 꼼꼼히 따져 보면 인간, 그리고 구원, 교회는 서로 잇대어져 있다. 그 어느 것도 서로를 배제하고 말할 수 없고, 공통된 영역이 너무도 많다. 실제 그의 저서 <인간이란 무엇인가?>에는 교회에 대한, 그리고 구원에 대한 그의 빛난 통찰이 곳곳에 은은히 묻어나고 있었다.

본 책은 학술 서적이라든가, 혹은 개념을 서술한 책이 아니다. 설교집이다. 그러면서도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에 대하여 포괄적으로 설교한 14편의 설교를 담아낸 설교집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와 같은 질문의 무게가 점점 무거워지는 이 어려운 세태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충분히 읽어 볼 만한 내용들을, 목회자 관점에서 쉽고, 또 평이하게, 그러면서도 기존의 개념을 잘 살려 낼 수 있도록 풀어냈다. 또한 후배 목회자, 혹은 후배 신학도의 입장에서도 설교는 어떻게 하는 것이며, 어떻게 개념을 담아내야 하는 것인지, 또 설교자로서 어떤 지향점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많은 통찰력을 얻을 수 있는 책이다.

단지 아쉬움이라면 14편의 설교들 사이에 충분한 연속성이 있지만, 그럼에도 설교와 설교 사이의 간극이, 온도차가 느껴진다는 것이다.(사실 이는 모든 설교집이 가지는 특징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손희영이라는 설교자의 다양한 측면을 감상하며, 또한 설교 이면에 있었던 세상사의 사건들과, 또한 성도들의 일반적인 반응들을 상상해 나면서 읽으면 이 또한 쏠쏠하다.

마지막으로 그가 이 혼잡한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관의 실종으로 말미암아 비인간화되어 가고 있는 이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해 주고 싶었던 말처럼 느껴지는, 그래서 마지막 설교문에서 인용한 에밀리 디킨슨의 시를 인용하면서 본 서평을 마치고자 한다. 어쩌면 본 시가 우리게 주는 인상은, 그의 설교문 14편을 숙독하며 그가 강변하는 성경적 인간관을 충분히 느껴 낸 이후에는 전혀 다르게 다가올지도 모르겠다.

만일 내가 한 사람의 가슴앓이를 멈추게 할 수 있다면
나 헛되이 사는 것 아니라.
만일 내가 누군가의 아픔을 쓰다듬어 줄 수 있다면
혹은 고통 하나를 가라앉힐 수 있다면
혹은 기진맥진 지친 한 마리 울새를 둥지로 돌아가게 할 수 있다면
나 헛되이 사는 것 아니라.(347쪽)

홍동우 / 부산장신대학교 신학과 학부생. 학생과 전도사의 경계, 부산과 대구의 경계, 보수적 기독교와 진보적 기독교의 경계, 인문학과 신학의 경계 사이에서 양자와 서로 대화하며, 갈팡질팡 방황하는 한 평범한 청년 전도사이자 경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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