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남순 교수. (사진 출처 강남순 교수 페이스북)

한 사회 안에는 언제나 다양한 집단들이 있다. 정치·교육·경제·문화계, 그리고 종교적 집단은 그 집단의 지도자가 누구인가에 따라서 그 집단이 지닌 공적 세계에서의 존재 의미, 그리고 그 기여와 적절성이 판가름된다. 우리는 누구나가 결정권을 지닌 매우 민주적인 사회에 살고 있다고 하지만, 정작 그 사회를 구성하는 개별인들은 자신들이 속한 다양한 집단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며, 그 구성원들은 그 집단의 대표인 사람들이 지닌 세계를 보는 방식과 철학에 따라 자신들의 일상적 삶의 방향이나 결정들을 만들어 간다는 사실에서, 소위 민주주의적 삶의 어두운 허구성이 잠재해 있다.

특히 개별인들이 속한 한 특정한 집단이 종교의 이름으로 구성된 것이라면, 그 집단의 지도자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그 지도자의 세계를 보는 방식은 단지 한 개인적인 방식이 아니라, 그 정당성의 근원을 신 또는 종교적 텍스트에 의존하면서, 자신의 관점을 신적인 권위와 연계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향력 있는 종교 집단의 '종교 지도자'가 현재 가장 예민하고 절실한 사회적 문제를 어떻게 보고 어떻게 평가하는가는 그 한 사람을 넘어서서 강력한 종교적이고 사회적인 여파를 가져온다. 현재, 교단의 수도 셀 수 없을 만큼 난립하고 있는 개신교회들의 어느 한 지도자가 아니라, 전 세계적인 통일된 교회 구조를 유지하고 있는 가톨릭교회, 그것도 한국 가톨릭교회에서 가장 핵심적인 결정 기구 속에 들어가는 서울대교구의 추기경의 위치에 있는 한 종교 지도자의 발언은 그 사회적 파급효과가 참으로 지대하다. 지난번 교황 방한 시 경험한 바대로, 거대한 한 종교 집단의 핵심에 있는 지도자의 발언은 이미 가톨릭이라는 한 종교 집단의 울타리를 훌쩍 넘어서는 것이다.

그 서울대교구의 지도자로서의 직책을 담당하고 있는 염수정 추기경은 8월 26일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발언을 통해서 그가 보는 '세월호 문제'에 대한 시각을 드러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이용하면 안 된다"
"정의를 이루는 건 하나님이 하시는 일"
"예수님도 난처한 질문을 많이 받았지만 정치적 얘기는 안 하시고"
"가족들이 생각하는 대로 이루어지면 좋겠지만 어느 선에서는 양보해야 서로 뜻이 합쳐진다"
"수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어 갈 때 하느님은 어디 있었느냐고 하자 작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은 가스실에서 사람들이 죽어갈 때 제일 먼저 죽어서 연기와 함께 올라가셨다고요. 그러면 사람들은 과연 어디 있었을까요? 세월호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로 인간의 문제입니다. 누구 하나 책임자로, 동네북으로 몰아서 희생시켜서 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진심으로 복음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안의 좋은 것, 하느님이 만든 본연의 모습을 찾는 게 가장 중요하다"
(관련 기사 바로 보기 : 염수정 추기경 "세월호 아픔 이용해선 안 돼" <연합뉴스>)

이 인터뷰에서 염 추기경은, '반쪽 진리(half-truth)'를 가지고 '전체 진리(whole-truth)화'하는 심각한 오류를 드러냈다. 염 추기경의 발언이 100% 틀렸다면 오히려 그 오류가 쉽게 지적될 수 있기 때문에 커다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발언이 지닌 오류의 분명성이 자명하게 드러나므로 그 '지도자'의 말을 듣는 종교 집단의 구성원들이나, 일반 사람들에게 미치는 부정적 영향력에 대하여 굳이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100%의 틀린 말이 아닌, 50%의 진리, 즉 '반쪽 진리'로 포장된 오류를 만들어 내고 있다는 점이며, 이러한 '왜곡된 진리'는 보통 사람들이 쉽게 반박할 수 없는 요소로 무장된 채, 사람들에게 '왜곡된 허위의식(false consciousness)'을 심어 준다는 데에 그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첫째, '연민의 신'에 대한 지극히 제한된 해석의 문제이다.

추기경은 홀로코스트 사건을 인용하면서 그 사건 속에서 제시되는 고통당하는 이들과 함께하는 신의 모습을 제시한다. 고통당하는 인간들과 함께, 그 고통의 현장 한가운데에 있는 '연대와 연민의 신' 개념은 홀로코스트 이후에 다양한 신학자들도 제시한 것이다. 즉 전통적으로 표상된 마술적 힘을 지닌 '전지전능한 신'을 넘어서서, 새로운 '연민과 연대의 신'의 모습을 드러낸 것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신 개념의 전환이다. 50%를 차지하는 여기까지는 맞는 말이며 매우 중요한 신학적 언급이다.

그런데 이러한 '연민과 연대의 신' 강조는, 그 고통의 현장에서 보다 적극적인 '인간의 책임성과 연대에의 요청성'으로 연계해야 하며, 그것이 나머지 50%의 내용이 되어야 한다. 그 연대와 책임성의 행위에서 종교의 존재 의미가 드러나는 것이지, 타자의 절절한 고통을 보며 수동적으로 또는 무책임하게 그저 '신이 함께한다'는 위로만을 하라는 것이 초점이 아닌 것이다. 추기경은 처음 50%의 맞는 이야기를 제시하면서, 나머지 50%의 이야기를 생략·탈락시킴으로써, 결국에는 '연대와 연민의 신'과 함께 논의되어야 할 '연대와 책임성의 인간'이라는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본의 아니게' 왜곡시켜 버린다.

둘째, 예수를 비정치화, 탈정치화하는 오류이다.

무엇이 '정치적'인가에 대하여 염 추기경은 매우 제한적인 이해를 하고 있다. '정치적'이라는 것은 정당정치와 관련된 사안만이 아니라, 다양한 구조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권력(power)'과 연계된 모든 사안들이 포괄적인 의미의 '정치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1960년대 이후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모토가 사회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러한 '정치적'이란 말의 의미에 대한 포괄적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예수가 다양한 이야기들을 통해서 언급한 부자와 가난한 자의 문제, 강도당한 사람과 나그네 된 사람들에 대한 환대의 문제, 감옥에 갇힌 자들의 문제, 높아지고자 하는 인간의 권력에의 욕망, 높아지고 싶어하는 인간이 지닌 타자 지배에의 욕구, 종교의 이름으로 자신을 의인화하고 정당화하는 '바리새인'들, 업적에 따라서가 아니라 '필요'에 따라서 품삯을 주는 포도원의 비유… 등등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예수는 우리의 크고 작은 일상사 속에서 존재하는 '권력의 불균형'이 빚어내는 무수한 문제들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종교적으로 신화화하는 표현을 비켜 가며 보자면, 예수의 죽음-그것은 포괄적 의미의 '정치적 죽음'인 것이다. 예수를 자신의 언행을 통해서 정치·사회·종교 등 다양한 기존 권력 구조를 '현상 유지'하고자 했던 이로 해석한다면, 그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단지 '기독교'라는 울타리에서 종교적으로 '신화화'된 의미로만 미화하는 데 멈추게 된다. 그 종교적 울타리를 넘어서는, 예수의 언행이 이 세계에서 지니는 포괄적 의미는 결국 왜곡되고 만다.

셋째, 타자의 고통, 그리고 그 고통의 사회적 연대와 책임성 왜곡 문제이다.

추기경이 매우 치밀한 계산 후에 이러한 왜곡된 관점을 드러냈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추기경의 이러한 '순진한 발언'은 '연대와 책임의 정치학'을 '복수(復讐)의 정치학'으로 전환한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를 양산한다. 추기경은 다른 사람의 아픔을 '이용'하면 안 된다고 강조한다. 참으로 맞는 말이다. 아마 이 말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발언이 지속적인 정당성을 확보하려면, 1)타자의 아픔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2)'어떠한 방식'으로 이용하고 있는지 3)그리고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어떠한 이득'을 확보하기 위하여 이용하려는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정황과 근거들을 제시해야 한다.

추기경은 세월호 참사를 통해서 자신의 사랑하는 가족들을 잃은 이들이, 그 죽음을 '이용'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죽음이 피할 수 있었을 죽음이었기에, 그 죽음이 누군가의 부당하고 무책임한 결정들이나 방관에 의하여 '참사'로서 벌어졌기에, 그 아픔이 '개인적인 고통'의 문제만이 아니라 '사회적 문제'로 표면화되기 시작한 것이라는 중요한 사실을 간과한다. 언제나 일어나고 있는 교통사고와 같이 누구도 통제하거나 예측할 수 없는 사고들에 의한 죽음과, 세월호에서의 죽음이 바로 이 점에서 완연히 다른 것이다.

'피할 수도 있었을 죽음'-그 죽음의 부당성과 책임성을 묻는 시민들의 요청과 연대의 행동들에서 분명히 작동되고 있는 원리들은, 추기경의 발언에서처럼 한두 사람을 '희생양'으로 몰거나 '동네북'으로 몰려는 '복수의 정치학'이 아니라, 그러한 죽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다시 반복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하는 '연대와 책임의 정치학'인 것이다.

넷째, '중립적' 발언은 불가능하며, 모든 발언은 이미 '정치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간과한 문제이다.

한 집단의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의식하든 하지 않든, 또는 자신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이미 '정치적' 세계에 들어선 것이다. '사적 존재'로서만이 아니라, 이제 '공적 존재'로서의 자리에 이미 들어섰다는 것은 그의 언설이나 행위 하나하나가 '정치적 함의'를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 세월호 사건과 같이 어떠한 갈등 상황이 야기되었을 때에, 특히 그 갈등 상황 속에 놓인 두 집단 사이에 '권력의 불균형'이 이미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을 때에, '중립적 입장'이란 다른 말로 하면 권력을 보다 지닌 집단의 입장을 지지한다는 분명한 '정치적 선언'이다.

진정한 의미의 '중립'이 가능한 경우는 단 하나, 갈등하는 두 집단 또는 여러 집단 사이에 그들이 지닌 '권력의 균형'이 정확히, 완벽히 존재할 때이다. 물론 우리의 현실 구조에서 이러한 완벽한 '권력의 균형'은 거의 불가능하지만, 원리적으로 볼 때 갈등 상황에서의 '중립의 가능성'은 오직 이러한 경우라는 것이다. 추기경은 예수의 예를 들면서 자신이 '정치적' 발언은 하지 않겠다고 하지만, 이미 그의 발언이 현재의 갈등 상황에서 모든 결정권을 지니고 있는, 권력이 더 많은 쪽에 '지지의 힘'을 실어 주는 심각한 '정치적 발언'이며 더 이상 '중립적'인 것이 아님을 간과하고 있다.

다섯째, '복음의 삶'과 '하나님이 만든 본연의 모습'에 대한 왜곡된 해석 문제이다.

예수의 '복음'이란 무엇이며, 그 복음적 삶을 따라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또한 신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본연의 모습'을 회복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는 참으로 중요한 신학적·종교적 주제이다. 이 제한된 공간에서 이러한 복합적인 신학적 문제들을 세세히 다룰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신의 형상으로서의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는 삶을 예수의 '복음'을 따르는 삶과 연계시켜 보자면, 그것은 한 사회에서 개별인들의 삶이 그들의 사회적 지위 등과 상관없이 정의와 평등을 이루는 삶이 가능한 세계를 만들기 위한 '변혁에의 열정'을 지니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신이 만든 본연의 모습 속에서 '모든 인간'이 지닌 고귀함이 인정되는 사회가 되도록 개인적으로, 집단적으로 헌신해야 하며, 그 고귀함이 부정되는 다양한 억압과 차별들에 저항해야 하며, 그 억압이나 차별·배제를 당하고 있는 이들과 연대하고 그들의 고통에 함께하며, 그 고통의 원인들을 찾아내어 변화시키기 위한 책임성을 나누는 것-이것이 바로 신이 만든 본연의 모습을 지니며 예수의 복음의 삶을 따라가는 것이다.

'반쪽 진리'를 '전체 진리'로 포장하는 것이 심각한 '폭력'이 되는 것은, 1)바로 그 '반쪽 진리'의 주장과 함께 제기된 '왜곡된 진리'를 진정한 '전체 진리'로 포장하기 때문이며 2)더 나아가서 한 집단의 지도자가 만들어 내는 그 '왜곡된 진리' 선언에 의해서, 무수한 '구성원'들은 바로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사회에서 상실의 고통 속에 있는 이들의 절절한 호소를 외면하고, 그들과 함께하는 이들마저 '다른 사람의 아픔을 이용'하는 '불순한 이들'로 몰아가기 때문이다.

한 종교 지도자의 이러한 발언들은 사랑하는 이들의 부당한 죽음 앞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이들의 아픔과 동시에 그들과 연대하는 이들의 책임적 행위를 종교적 언설들로 왜곡시킴으로써, '신학적 폭력', '언어적 폭력', 그리고 '상징적 폭력'의 효과들과 함의를 고스란히 확산시킨다는 점에서 그 위험성이 크다. '반쪽 진리의 폭력'-그 폭력의 왜곡성을 감지해 내는 것은 고통당하는 이들과 연대하며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해 작은 책임이라도 지고자 하는 이들이 수행해야 할 지속적인 과제일 것이다.

강남순 / 텍사스크리스천대학교 브라이트신학대(Texas Christian University, Brite Divinity School) 교수. 현재 'WOCATI: 세계신학교육기관협의회'의 회장이며, 최근 저서로는 <Cosmopolitan Theology>(2013)와 <Diasporic Feminist Theology>(2014, Forthcoming) 등이 있다.

*이 글은 강남순 교수의 페이스북에 실린 것으로 허락을 받아 게재합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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