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에게 월요일은 조금은 만만한 날이다. 주일예배에 집중하느라 수고했으니까 쉬어도 되는 날이 월요일이다. 이런 우스개 퀴즈가 있다. '남 쉬는 일요일 날 가장 바쁜 사람은?' 답은 목회자라고 한다. 그러니까 목회자에겐 일주일 중 쉬는 날이 월요일이 되는 셈이다. 이것은 적어도 중대형 교회 목회자들에게 해당되는 말이지 작은 농촌 교회 목회자들에게는 적용되지 않을 때가 많다. 시간 따지지 않고 일이 있으면 나가야 하고, 그렇지 않을 때는 움직이지 않아도 되는 것이 농촌 목회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겐 그렇다.

그런데 요상한 것이, 일이 있는 날도 월요일엔 꾀를 피우고 싶을 때가 있다. 월요일은 주의 종들이 휴식을 취하는 날이니까 덩달아 게으름을 피우고 싶을 때가 있다. 어제(8월 18일)가 그런 날이었다. 아침부터 비가 내리는 것도 거기에 한몫을 했다. 나는 책을 하나 들고 독서 삼매경에 빠지기로 했다. 어찌 보면 목회자에게 독서는 필수적인 목회 도구가 아닌가 싶기도 해서 자기 위안을 삼았다. 설교의 기본 공구로 성경을 든다면 보조 공구로 다양한 책들을 포진시킬 수 있다.

며칠 전, 그러니까 광복절 날 나는 서울에 다녀왔다. 몇몇 지인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수유리교회에서 목회하다가 지금은 은퇴하신 방인근 목사님도 그날 만난 사람들 중 한 분이다. 그때 방 목사님으로부터 세 권의 책을 선물로 받았다. 방 목사님은 목회뿐 아니라 문명(文名)도 널리 알려진 분이어서 그가 직접 쓴 책을 선물 받은 나의 기쁨이 컸다. 칼럼집 <나는 말하고 싶다>(도서출판 성결광장), 희곡집 <그때 거기 그리고 지금 여기>(도서출판 예샘), 시집 <싱글벙글 하나님>(도서출판 이포)이 내가 받은 선물이다.

책은 필요에 따라 읽게 되는 것이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좀 말랑말랑한 책을 손에 잡게 된다. 왜 전도도 그렇지 않은가. 순한 사람에게 다가가고 싶은…. 나는 세 권 중 쪽수도 가장 적고 읽기에도 쉬운 시집 <싱글벙글 하나님>을 골라잡았다. 시(詩)라는 것은 음미하며 읽으면 많은 시간을 요(要)하는 것이지만 그냥 눈으로 읽고 넘어가면 한 시간 안에도 후딱 해 치울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방 목사님의 글은 쉬우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내용들로 채워져 있었다. 글쓴이의 의도는 하나일 텐데 읽는 사람에게는 아주 다양하게 수용될 수 있는 글, 방 목사님은 그런 글을 쓰고 있었다. 마치 존 웨슬리의 신학을 여러 갈래에서 각각 자기 식대로 해석하듯이.

   
▲ 방인근 저 <싱글벙글 하나님> 표지(도서출판 이포, 2007년)

제목부터가 그렇다. <싱글벙글 하나님>이라. 하나님께서 싱글벙글하시면 우리도 그렇게 된다. 이 사회 전체가 싱글벙글하면 얼마나 좋을까. 세상이 하 수상해 불의가 판을 치고 그것에 비례해 실의에 빠지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세태 속에서 <싱글벙글 하나님>을 읽는다는 게 좀 아이러니했다. 글쓴이의 바람이 담긴 책 제목이리라. 하나님께서 웃음이 헤프셔서 책 제목 앞에 "하나님, 웃음 좀 아끼세요!"라는 주문의 글까지 붙이고 있다. 하나님께서 싱글벙글 웃으시는 세상은 천국에서뿐 아니라 이승에서 더 필요한 것인지 모른다. 요즘 시국을 볼 때 그렇다.

내용과 제목에 어울리게 표지 그림은 '파안대소하시는 예수님'을 넣었다. 엄숙하고 진지한 예수님 그림을 보다가 격식을 초월해서 크게 웃으시는 예수님 그림을 접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연약한 인간의 징표이리라. 지난 8월 14일부터 18일까지 가톨릭의 수장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한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따뜻한 마음과 웃음을 선물하고 돌아갔다. 그중 세월호 유가족, 다문화 가정, 쌍용차 해고 노동자, 위안부 할머니들 등 사회적 약자들을 만나 손을 잡아 줌으로써 정신적 지도자가 해야 될 일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갔다. 나는 그의 늘 웃는 얼굴을 보면서 파안대소(破顔大笑)하시는 예수님을 떠올렸다. 왜인지 모르겠다.

방인근 목사님의 <싱글벙글 하나님>을 시집이라고 했지만 그의 글들을 볼 때 '시'라는 카테고리 안에 묶어 두기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의 특징은 언어의 조탁, 의미의 농축, 해석의 융통성 등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데, 그것에 온전히 충족시키는 것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해석의 융통성 문제는 설명이 필요하다. 이 책에 수록된 글들은 운문이다. 읽으면 가락이 생성된다. 그런데 꼭 운문이라고 주장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문장의 구성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주어와 술어를 기본으로 하고 수식어와 목적어 등이 갖추어진 문장, 즉 산문이라고도 할 수 있는 글들이다. 따라서 해석의 여지가 운문보다는 폭이 좁다는 얘기가 된다. 이것은 지은이의 인생관과 신앙관이 확고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 책은 전체 3부로 이루어져 있다. 목회 일기, 수도 일기, 예촌 일기가 그것이다. 목회 일기는 글쓴이가 오랜 시간 목회하면서 느낀 따뜻한 이야기를, 수도(修道) 일기는 기도하며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 위한 노력의 모습을, 예촌(藝村) 일기는 목회자의 문학적 향기를 하나로 묶어 놓은 글들이다. 하지만 글의 내용을 볼 때, 목회 일기가 바로 수도 일기이고 또 수도 일기가 예촌 일기가 되기도 한다. 그는 신앙과 생활이 하나요 순수한 문학까지 삶에 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책 첫 장을 열면 '아내 송두옥이가 전하는 德談(덕담)'이라는 제목의 글이 등장한다. 학교 다닐 때 위문편지밖에 써 본 일이 없는 사모님에게 책 서문을 부탁했다는 것이다. 방 목사님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출판할 때 그 방면의 저명인사에게 추천사를 부탁해서 칭찬 일색인 글을 덧붙이는 경우를 종종 본다.

이런 의례적이고 형식적인 글보다 30년 반려 아내의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덧붙이는 것이 훨씬 의미가 있겠다. 목사님의 목회와 삶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고 더불어 성장하게 되었다는 고백은 책의 가치와 글쓴이의 인격을 한껏 높여 주는 것이 된다. 목회 일념은 자칫 세상과 일정 거리를 두기 쉽다. 신앙을 그만큼 좁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방인근 목사님의 책을 읽으면서 그의 트인 시야를 엿보고 상쾌함을 느꼈다. 포스트모던으로 요약되는 21세기에서 열린 마음과 트인 눈은 다양한 사람을 영적 정신적으로 지도해야 할 목회자가 가져야 할 자세이다. 그럼에도 일부 목회자들의 폐쇄적인 언행이 오늘날 사회의 지탄을 받고 있어 안타깝다.

방 목사님의 따스한 눈이 더 따뜻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세상을 차별 없이 보려는 그의 마음 때문이다. 그에게는 하나님이 중요하고 사람이 소중하지 이 사회의 제도로부터는 자유롭고 싶어한다. 교파를 따지고 종교를 나누는 것, 이런 것에서 한 자리 차지하는 것 등에는 도통 관심이 없다. 그의 트인 눈은 심지어 교계 다수를 점하고 있는 보수주의 신앙인들이 종북 좌파라고 손가락질하는 '운동권' 사람들에게까지 미친다. 집회장을 지나다가 최루탄 파편을 주워 오고 민주 열사들의 추모식에 참석해서 문익환 목사님이 외치는 '박종철 열사, 이한열 열사~'란 처절한 외침에 공감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찾아 실천하려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외 지역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순수한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가페에서 출발하지만 문학에서 도움 받는 측면도 지나칠 수 없다. 그는 수필가고 시인이기도 하고 교계 신문 논설위원을 지낸 문필가이기도 하다. 이 책 <싱글벙글 하나님>에서만 보더라도 많은 문학인이 등장한다. 그것은 국내에만 국한하지 않고 외국까지 넘나든다. 당장 생각에 남아 있는 문학인만 해도 <난쏘공>의 조세희, <토지>의 박경리, 천상 시인 천상병, <상록수>의 심훈, 장애인 수필가 장영희에 이어 독일의 괴테, 미국의 티즈데일, 리차드 바크 등 종횡무진(縱橫無盡)이다. 그의 문학에 대한 박람(博覽)을 엿볼 수 있다. 문학을 좋아하는 그는 소설 하나 꼭 써 놓고 저 세상으로 가겠다고 다짐한다. '어느 수도자의 지구별에서의 29,200일'이라는 제목까지 정해 놓고 말이다.

방인근 목사님은 사유의 자유함을 만끽하며 살아온 분이다. 그렇다고 그의 신앙이 자유주의 신학에 근거하고 있다는 말이 아니다. 그는 말씀을 지키는 데 있어서는 철저하게 보수적이되 세상을 보는 눈은 열려 있어 누구든 만나 대화하고 사랑하며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다. 전천후 목회자라고나 할까. 그는 신앙에 있어서는 청교도적 태도를 견지하면서도 삶은 "오와 열 맞춰서 질서정연하게 행진하는 의장대의 행렬보다 한 잔 걸친 놈마냥 자유를 만끽하는 걸음새가 좋다(92쪽)"고 생각하는, 사유(思惟)가 지극히 넉넉한 사람이다. 자유로움으로 묘비명까지 준비해 두고 있다. "한 마리의 작은 새 /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로 / 날아오르다" 느헤미야 9:6에서 따왔을 법한 이 시구가 얼마나 좋았으면 이 책에 다섯 번이나 등장시키고 있다. 이런 그의 뚝심이 한 교회(수유리교회)에서 30년 넘게 성공적인 목회를 하게 했으며, 은퇴를 얼마 남겨 놓지 않은 때에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전철역 접경 지역 좁은 땅에 15층 빌딩을 예배당으로 건축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아무리 재미로 읽는 책이라고 해도 지식 습득의 의미를 상실한다면 책으로서의 가치가 줄어든다. 나는 <싱글벙글 하나님>을 읽으면서 몇 가지 색다른 지식을 공유할 수 있었다. 몸과 마음을 합해 '뫔'이란 글자를 만든 것(64쪽), '그미'가 'She'의 대용어라는 것(34쪽), 상록수(常綠樹)라는 말이 보통명사로 사용되기 이전 심훈이 소설 <상록수>를 발표함으로써 대중어가 되었다는 것(51쪽), '휘갑을 치다'는 말의 뜻이 "다시는 더 말 못 하도록 말 막음하다는 뜻이 있다(98쪽)"는 것도 내가 몰랐던 것들이다. 책을 읽으면 몇 개의 오탈자가 나오기 마련이다. 사람이 하는 일이어서 출판계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치부한다. 그러나 <싱글벙글 하나님>에는 딱 하나, 이것도 그냥 보아 넘겨도 될 오자가 하나 있었다. 밝고 맑다는 뜻의 한자말 '明淨'에 눈에 보일 듯 말 듯한 아주 작은 글자로 '명청'이란 토를 달아 놓은 것이 그것이다.

방인근 목사님의 <싱글벙글 하나님>을 읽으면서 떠나지 않은 생각은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것이었다. 세상 사람들의 지식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확장되고 있는 때이다. IT 산업의 발전이 그것에 기여하는 측면이 없지 않을 것이다. 목회자는 먼저 성경에 통달하고 그것에 근거해 다양한 분야의 독서를 충실히 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사유의 결정이 글이고 그 글이 많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을 끼치기 위해서는 다양한 지식을 확보하고 있어야 한다. 은퇴 후에 더 바쁜 사람들이 있다. 그가 쓰고 싶은 소설 제목에 들어갈 숫자 '29,200일'은 80년에 해당한다. 80세까지 이 땅에서 살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100수를 운위하는 시대가 되었다. 건강하게 글도 쓰고 주님 사랑을 전하면서 아름다운 여생을 보내기를 바란다. 출판된 지는 좀 되었지만(2007년) 구해 읽으면 신앙과 생활 양면에 의외의 유익을 얻을 수 있을 책이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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