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가톨릭교회의 수장 프란치스코 교종(敎宗)의 방한이 임박했다. 그의 일정에 관한 윤곽도 알려졌다. 다양한 일정이 있지만 무엇보다 일반인의 관심이 집중될 핵심은 8월 16일 광화문에서 교황 주례로 진행될 '순교자 124위 시복식'이 될 것이다. 한국 가톨릭 신자 600만 명이 다 참가할 수 없어 내부적으로 제한하여 약 17만 명의 가톨릭 신자가 참가한다고 한다. 일반 참가자들까지 합치면 100만 이상이 운집할 것이라는 예상도 나온다. 84년 교황 요한바오로 2세의 방한 때 여의도에 모인 60만 명을 짐작해도 뙤약볕 아래 모일 한여름의 인파는 상상 이상이다.

참가 인원의 규모만이 중요한 건 아니다. 과연 거기 모이는 인총들이 순교자 124위의 시복식이 갖는 의미, 순교의 맥락, 역사 현실의 어떤 현실에서 집행된 살인극이었는지 되짚어 보는 것도 중요하리라. 신자이기 이전에 거기 모이는 이 땅의 국민된 입장이 그러하다. 멀리 로마로부터 오시는 교종님께서 더 잘 아시리라 기대하는 건 세계 최고의 국빈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이다. 더욱이 우리도 모르는 것을 우리보다 더 잘 이해하시고 우리보다 더 잘 아셔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베풀어 주시기를 바라는 것은 도리가 아니리라.

1784년 이승훈이 북경 북천주당에서 필담으로 교리를 배우고 자생적 가톨릭교도가 된 이래 천주교는 정권에서 소외된 근기지방 남인 지식인들로부터 구세의 복음으로 퍼져나갔다. 그들 대부분은 실학의 선구자라 일컫는 성호 이익의 학인들이었고 정약용과 그의 가문이 이 영광과 비극의 역사의 중심에 있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호남에서 윤지충, 권상연의 옥사가 있었는데 악인 홍낙안 등이 이 사건을 핑계 삼아 착한 사람들(善類)을 모두 제거해 버릴 것을 꾀하려고 하여 채제공 대신에게 글을 올렸다. "총명한 재주와 지혜로 보란 듯이 행세하는 관료와 선비들의 10명 중 7,8명은 서교(西敎)에 빠져 있어 앞으로 난리가 있을 것입니다." (정약용,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 1822)

천주교를 믿는 것은 정치적 반역으로 간주되었다. 국가 즉, 왕조에 대한 반역, 왕조 이데올로기에 대한 반역, 정확히 말하면 노론 기득권 독재에 대한 반역이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세계 선교 사상 특이하게도 당대 최고 지식인들에 의한 자발적 구도행으로 시작되었다는 점, 그 중심인물들은 당대 사회를 변혁시킬 실사구시의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현실 정치에 그것을 펼칠 수 없었다는 점, 그리고 그들로부터 천주교 신앙은 민중 속으로 전파되었던 것이다. 집권 노론당이 이것을 두고 '차제에 난리가 있을 것'이라 표현한 것은 여러모로 예언적이다.

1791년(정조 15) 죽은 어머니의 신주를 불사르고 제사를 지내지 않은 연고로 다산의 외사촌형 윤지충과 그의 외사촌 권상연이 참형을 당한다. 굴복하지 않고 차라리 죽음을 택한 첫 순교자들의 믿음은 오로지 성리학을 명분으로 독재를 일삼아 온 박해자들에겐 살의와 두려움을 각인시켰을 것이다. 이 신해박해를 시작으로 그나마 남인들에게 우호적이었던 정조가 흉서한 다음부터 집권 세력들은 때마다 서학(西學) 박해를 정적 제거와 정국 돌파의 기회로 삼게 된다. 1801년(순조 1)의 신유박해, 1839년(헌종 5)의 기해박해, 1866년(고종 3) 병인박해로 이어지는 60여 년의 세월 동안 수만 명의 천주교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국가에 의한 대량 학살이라 불려야 마땅할 살육이었다.

이 순교의 의미는 무엇일까? 한국사 속에서 그것은 어떻게 자리매김 되었을까? 한국사의 하위 분야로서 천주 교회사와 가톨릭교회 안에서 특수하게 존숭되고 기념되는 순교의 기록일 뿐일까? 희생이 그 희생을 통하여 남은 전체에게 갱생의 길을 열어 주는 부활의 밑거름이 된다고 할 때, 전일 그들의 희생은 오늘 어떤 죽지 않은 정신의 열매로 살아 있는 것일까?

나에겐 두 가지 관점에서 광화문의 시복식이나 봉헌이 그다지 미덥지 않게 여겨진다. 첫째, 그들은 당대 국가라는 절대 권력에 의해서 무죄하게 희생되었다는 사실이다. 곧 그들은 순교자로서 영웅들이 아니라 보편적인 희생자들일 뿐이라는 것이다. 시복식의 초점으로서 이 부분이 명쾌할 것 같지가 않다. 다음도 결국 같은 이유다. 그들을 기념하여 하느님의 예언적 종으로 추존하는 시복식이 오늘의 동일한 폭력을 기억나게 해 줄까 하는 점이다. 이 또한 역사의 맥락을 관통하여 오늘의 과녁에 꽂히는 공공 감각이 얼마나 적중할지 미지수라는 점이다. 그들은 새 시대를 열고자 하는 예언자이기도 했고 보편적 희생자이기도 했다. 두 가지가 실종되면 그들의 예언자 됨도 실종되어 버린다. 마태복음(23:29~32)에는 다음의 구절이 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이르되 /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명함이로다 / 너희가 너희 조상의 분량을 채우라"

시대의 폭력에 희생된 의인들의 무덤을 만들고 비석을 꾸미고 기념하며 존숭하는 일의 참됨과 기만성은 현재적 상황의 동일성에 대한 인식 여부에 있다. 현재에도 과거와 같은 박해와 희생을 낳는 폭력이 자행되고 있음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과거의 그들이 오늘의 누구일는지를 적시하지 못한다면, 희생자들을 숭배하고 기념하는 의전이 장려하면 장려할수록 그것은 당대 현실의 폭력을 감추는 기만이 된다. 진실은 그렇게 해서 영구히 왜곡되고 은폐된다. 순교자에 대한 참된 역사적 기념과 기억의 가능성마저 수탈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천주교에는 이를 극명히 증거해 줄 만한 역사적 사료가 있다.

김훈의 <흑산>은 정약용과 그의 가문이 멸문지화를 간신히 면하고 살아남게 된 신유박해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흑산'은 다산의 형 정약전이 유배 간 흑산도를 가리킨다. 그는 이 흑산(黑山)이라는 이름이 무서워 같은 뜻의 자산(玆山)이라 불렀다. 비록 살아남았을망정 세상을 산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이었을지,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는 시 구절처럼 글자 하나의 뉘앙스에도 진저리쳤을 정약전의 고백은 전율마저 느껴진다. 헤아려보면, 그의 바로 밑 아우이자 다산의 셋째 형 정약종은 당시 조선 천주교의 지도자로 두 사람과 달리 끝까지 신앙을 지키고 참수되었다. 다산의 형제들은 죽음의 위협 앞에서 형과 아우에 대한 천륜마저도 부인해야 했고, 일가의 도륙됨에도 슬퍼할 수 없었다. 정약종의 가계는 절멸되었다. 거듭거듭 배교와 부정으로써 간신히 목숨을 돌려받은 두 형제는 강진과 흑산도로 유배되었다.

소설 <흑산>의 지옥 같은 어둠 속에서 저녁놀처럼 아름다운 절정을 이룬 장면은 황사영(黃嗣永)의 죽음이다. 그는 정다산의 큰형 정약현의 사위로 아내의 이름은 정명련이다. 바로 이 정명련과 결혼함으로써 황사영의 운명은 결정된다. 1791년(정조 15) 17세의 어린 나이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시험관을 놀라게 했고 임금이 친히 손을 쓰다듬어 주며 각별한 애정과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그였다. 그러나 그는 임금의 약속과 기대에 부응하지 않고 전혀 다른 인생의 길을 가게 된다. 혼인 후 처가와 장인의 유명한 동생들로부터 그는 천주교 신앙을 배웠고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자 아예 그의 비서격이 되었다. 신유박해의 와중에서 살아남아 충청도 제천의 깊은 산골 배론(舟論)으로 도망을 쳤고 토기 가마 곁 토굴에 숨어서 '죄인 토마스 등은 눈물을 흘리며 본주교 대야(湯士選 구베아) 각하께 호소합니다'라고 시작되는 <백서(帛書)>라 불리는 글을 썼다.

"참으로 가엾습니다. 어찌 이러한 지경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이번 교난이 있은 후에 아직 특별한 은총이 없어, 예수 그리스도의 성스러운 이름이 장차 이 나라에서 아주 끊어져 버리려 합니다. 말과 생각이 이에 미치니 간장이 갈기갈기 찢어집니다. 중국과 서양의 교우 선배들이 이 위태롭고 괴로운 사정을 들으면, 어찌 불쌍히 여기고 마음 아파하지 않겠습니까? 감히 바라건대, 교황께 자세히 아뢰시어 각국에 널리 알리시고, 진실로 저희들을 구원할 수 있는 일은 모두 강구하시어, 우리 주님의 넓은 사랑의 은총을 본받아, 성교에서 가르치는 바대로 모든 이를 두루 사랑하시는 뜻을 드러내어, 저희의 이 간절히 바라는 정성에 보답케 하여 주십시오. 저희들은 마음을 가다듬고 눈물을 흘리면서 어려운 사정을 호소하고, 목을 늘이고 발돋움하여 오직 기쁜 소식이 있기만 기다립니다. 우리 주교 각하께서는 부디 글로써 다 아뢰지 못하는 저희들을 가련히 여겨 주십시오." (황사영, <백서> 부분)

길이 62cm, 너비 38cm되는 흰 명주 비단에 한 줄에 110자씩 121행, 도합 1만 3천여 자를 먹으로 쓴 깨알 같은 긴 편지였다. 그는 이 서한을 천주교인 황심과 옥천희로 하여금 10월에 떠나는 동지사 일행에 끼어서 북경의 구베아(Gouvea, A. de) 주교에게 전달하려 하였다. 그러나 황사영 백서의 최종 수신인은 교황이다. 그는 백서에서 신유박해의 전말과 순교자들의 약전을 기록하고 조선교회를 구해 줄 4가지 사항을 건의했다.

①조선교회에 대한 서양제국의 동정과 조선정부에 대한 압력을 행사해 줄 것.
②신앙 자유에 대한 청황제(淸皇帝)의 동의와 서양인 신부를 보내 줄 것.
③조선을 청에 부속시키고 친왕(親王)으로 조선국을 감독케 할 것. 
④약소국 조선에 배 수백 척과 군대 5, 6만을 보내 선교의 자유가 보장되게 해 줄 것.

훗날 <백서>를 번역한 불란서인 뮈텔 주교는 이에 대해 '음모의 대부분이 공상적이며 위험천만한 것으로 조선왕조(정부)가 필자에게 엄벌을 가했다는 점도 이해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뮈텔이 서문에서 내리고 있는 이 판단은 현재까지 황사영과 그의 백서에 대한 일반적인 판단이기도 하다. 그러나 임금의 약속과 기대를 저버리고 유학자의 길로부터 신앙의 길로 나아간 청년 황사영이 겪어 나갔던 현실을 생각해 본다면, 그리고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토마스가 드디어 신원 복권되는 정황을 헤아려 본다면, 이제 황사영의 공상도 공상만은 아닌 것이며 위험천만한 음모만도 아닐 것이다. 고립무원 상태에서 끝까지 신앙의 순결을 지켜 나갔던 황사영의 편지가 교황에게 전달되지 못했던 것이고, 그가 신앙의 순수함만큼이나 믿고 기대했던 교황 쪽에서 응답하지 않았을 뿐이다.

<백서>는 북경으로 가지 못하고 압수되었다. 황사영은 1801년 음력 9월 29일 배론에서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그는 10월 9일부터 11월 2일까지 여섯 차례에 걸쳐 국문을 받고 11월 5일 '대역 부도죄'의 판결을 받고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형으로 순교하였다. 나이 26세였다. 가산을 몰수당하고 어머니는 거제도, 아내 정명련은 제주도, 5살짜리 아들은 추자도에 각각 유배되어 그의 집안 역시 절멸됐다.

때마침 인쇄되어 선물로 받은 <한국천주교문학사>(구중서 저, 소명출판)를 읽는다.

"한국 천주교 문학사는 한 종교 범위 안에 내용이 아니다. 한국의 민족 문화가 세계 문화와 만나서 서로를 풍요하게 하는 과정과 의미 안에 있는 문학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이 문학사의 내용에 대해 조명을 하려면 색다르게 보일 수도 있는 거점들에 대해 해설을 하게 된다. 이 해설은 문학 형태에 대한 설명의 나열이 아니고 일정한 의미 체계의 구성이며 정돈이다. 한국 천주교 문학사는 한국 천주교가 그러하듯이 민족 문화가 자발적으로 보편성과 만나는 경로에 있다." (<한국천주교문학사> 결어)

황사영의 <백서>는 신유박해 후 근 백 년 동안 의금부 창고 속에 보관돼 있었다. 1894년 갑오경장 후 조선교구의 뮈텔 주교의 손을 거쳐 1925년 로마에서 조선 순교복자 79명의 시복식이 거행될 때 교황에게 전달되었다. 1801년으로부터 124년이 흐른 뒤에나 전달된 셈이다. 과문인지 모르겠으나 교황청 서고에 보관되어 있다는 황사영의 <백서>에 대해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알고 계실지 궁금하다.

천주교는 본래 가톨릭이다. 가톨릭은 보편적이라는 의미의 라틴어 'Catholicus'에서 온 말이다. 이탈리아 태생의 예수회 신부 마테오리치가 중국에 와서 가톨릭 기도문을 한문으로 번역할 때 그리스도교의 절대자를 '천주(天主)'라 썼다. 1603년 간행된 교리 해설서도 <천주실의>였다. 그 연고로 보편과 유일함을 나타내는 가톨릭은 우리에게로 와서 천주교가 되었다. '민족 문화가 자발적으로 보편성과 만나는 경로'에 '한국 천주교 문학사'도 '한국 천주 교회사'도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지금도 끊임없이 마찬가지다.

교종이 200여 년 전 이 땅에서 가톨릭을 믿는다는 이유로 학살당한 순교자들의 시복식을 거행하게 될 광화문 광장에는 벌써 25일이 넘게 단식 투쟁을 이어 온 세월호 희생자들의 유족들이 있다. 한편으로는 벌써부터 교황 방한을 반대하거나 가톨릭을 반대하는 그 정체가 모호한 일부 개신교의 이름 아래 급조된 단체들이 불협화음을 양산하고 있다. 이 불일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과연 교종을 맞이하려 온갖 공을 들였다는 정부는 어떻게 할까? 교종의 방한에 순결하고 순수하게 기뻐하고 감격해하는 한국 가톨릭교회는 어떻게 할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어떻게 하실까? 어리석은 물음이지만, 굳이 묻자면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실까? 나에겐 이런 현실들이 자꾸 중첩된다.

140년 전 스물여섯의 젊은 가장 황사영에게 목숨을 걸고 <백서>를 쓰게 했던 현실과 세월호에서 희생된 이들의 죽음을 가슴에 안고 기대할 것 없는 기대를 위하여 곡기를 끊고 앉아 있는 2014년 대한민국 어버이들의 현실이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할 수만 있다면 프란치스코 교종님께 그 시공을 관통한 아픔의 보편성을 알려 드리고 싶다.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그 평화의 사도 프란치스코, 「복음의 기쁨」을 쓰신 복음님이 오심에 감사했으면 바랄 것이 없겠다. 남북 평화와 화해의 메시지도 중요하지만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온갖 박해를 받으며 지금도 이 땅에서 쓰이고 있는 황사영의 백서들을 읽으시고 관심을 가지시고 살펴봐 주시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오직 기쁨이 충만한 소식이 있기를 기다린다.'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