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사건으로 전 국민의 슬픔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선주 유병언이 시신으로 발견되었다고 하고 또 그의 아들 유대균이 호위무사 박수경과 함께 검거되었다는 뉴스가 온통 인터넷을 수놓고 있습니다. 이단인 구원파 사람들이라는 것도 세인들의 관심거리이지만 박수경이 태권도 선수 출신으로 국제 심판 자격증까지 가지고 있는데다 인천지검으로 압송되면서 기자들의 질문에 냉정한 표정으로 앙다문 입이 호기심을 더 자아내게 하는 것 같습니다. 거기에다 그녀는 미모로도 한몫하고 있어 인터넷 검색 상위 순위에 랭크되어 있더군요.

저는 순간 좀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작은 농촌 교회인 저희 '덕천성결교회'를 치면 교회 위치 등 정보가 뜰까? 하는 생각을 갑자기 하게 된 것입니다. 실행에 옮겨 보았어요. '다음'도 아니고 '네이버'도 아니고 제겐 좀 생소한 'ZUM' 화면 검색창에 '덕천성결교회'를 쳤습니다. 그런데 저희 교회 정보가 상세하게 뜨더군요. 농촌 마을 포도밭 한가운데 있는 교회이기 때문에 건물 도로 등 표식 없는 휑한 공간을 배경으로 청색 표지판이 뚜렷하게 저희 교회를 알려 주고 있었습니다.

신 주소가 아닌 옛 주소가 부기되어 있었고, 전화번호까지 친절하게 안내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무척 기뻤습니다. 마치 저희 교회의 존재 가치를 세상으로부터 인정받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외형적 크기와 성도 수로 교회를 평가하지 않으실 줄 알지만 세상은 어디 그렇습니까? 모든 것을 크기로 판단하고 가치 부여를 하는 세상이잖아요. 특히 지난 세기 말엽부터 사회의 큰 흐름으로 자리 잡은 신자유주의가 교회에까지 침투해서 맹위를 떨치고 있는 상황입니다. 저는 이 신자유주의라는 게 예수님의 뜻과는 반대쪽을 지향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좀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부익부 빈익빈(富益富 貧益貧), 약육강식(弱肉强食), 우승열패(優勝劣敗), 승자독식(勝者獨食)의 논리에 근거하고 있잖아요. 약자에 대한 배려 없이 강자 중심의 사회를 지향한다는 것은 분명 주님의 뜻이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덕천성결교회'를 좀 더 검색해 나가다 보니 이런 제목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덕천성결교회 이덕천 목사님이 쓰신 것을 퍼왔습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몇 해 전 이웃 교회에서 한 크리스천을 초청해서 간증 집회를 열었습니다. 일그러진 얼굴을 가진 구세군 김희아 부교의 간증 집회였습니다. 세상에서 버린 김 부교를 하나님께서는 소중하게 여기시고 채워 쓰시는 간증에 많은 은혜 받았습니다. 저희 교회 성도들과 함께 그 간증 집회에 다녀와서 저희 교회 카페에 '약한 자를 들어 쓰시는 하나님-김희아 부교 간증을 듣고'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었는데, 한 기독교 카페에서 그 글을 퍼 간 것입니다.

작은 농촌 교회에서 운영하는 카페에서 조회 수 1천 회를 넘는 글은 그만큼 인기가 있다는 얘기가 될 것입니다. 김희아 부교 간증의 글은 1336회의 조회 수로 1위인 '손양원 목사 생각 방문기'에 이어 1121회(2014. 7. 26. 10:30 현재)를 기록 2위에 랭크되어 있는 기사입니다. 이 기사는 제가 기고하지도 않았는데, 한 교계 인터넷 신문에도 제 기명 기사로 올려져 있었습니다. 글의 내용이 다른 사람들에게 다소라도 유익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 같아 마음이 유쾌했습니다.

그런데 말이에요. 제 글을 퍼 간 카페에서 제 이름을 왜 '이덕천' 목사라고 했을까? 저는 이름으로 인해 작은 상처를 받은 일이 적지 않습니다.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도 '이명재'가 아닌 '이명제'로 곧잘 표기합니다. '재(ㅈ+ㅏ+ㅣ)'가 아닌 '제(ㅈ+ㅓ+ㅣ)로 잘못 표기한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재명'이라고 글자 순서를 바꾸어 제 이름을 표기하기도 합니다. 몇 해 전, 알고 지내는 한 도의원은 자녀 결혼 청첩장을 보내면서 '최명재'라고 이름을 적어 보내오기도 했더군요. 그래도 부족한 사람을 기억해 주는 성의를 생각해서 사람들 통해 축의금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덕천 목사님'이라는 것은 처음입니다. 단순 실수는 아닌 것 같습니다. 아니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교회 이름을 목사인 제 이름에까지 연동(連動)해 잘못 쓸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지 않을 경우에 더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목회자의 실명을 감춰주고 싶은 의도로 일부러 제 이름의 성(姓)에 교회 명을 갖다 붙인 게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런 게 있잖아요. 선의로 소개한 글을 좋지 않은 방향으로 이용하는 사람들이 간간이 있는 경우 말입니다. 그것을 예방하는 차원에서 제 이름을 '이덕천'으로 표기해 준 것 같습니다.

이름은 너무 흔해도 안 좋고 그렇다고 희소해서 부르고 쓰기 어려워도 안 좋습니다. 그런 점에서 제 이름은 적당한 수준의 것입니다. 이 이름으로 50 성상을 살아왔습니다. 감사할 일이지요. 그런데 오늘 '이덕천 목사님'이란 제 글 소개 기사를 보고 이 이름도 그렇게 나쁠 것 같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습니다. 새로운 것에 대한 동경이라고나 할까요. 실수든 고의든 제 글을 퍼 가서 소개한 분으로 인해 이름에 대해 곰곰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지게 된 것도 작은 기쁨입니다. 이번 기회에 개명(改名)을 해 버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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