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은 세상의 비극들을 모두 끌어안고도 남을 수 있을 만큼 크고 넓고 깊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믿음은 지탱하지 못하고 소멸되고 말 것이다. 그러기에 세상을 사는 사람에게 믿음은 계속 성장을 거듭해야 그가 세상을 제대로 살아 낼 수 있게 된다.

세상의 비극을 당하고 목격한 사람들에게 그만큼 영혼의 상처는 깊어진다. 작년에 번역 출간된 심리학 서적 중에 <따귀 맞은 영혼>이나 <마음에 상처를 받지 않는 법>이란 책들이 있는데 이것들은 모두 인간관계와 사회 속에서 받은 상처를 잘 관리하고 극복하는 법을 처방하고 있다. 유익한 책들이다. 그러나 인간관계에서 받은 상처가 아니라 세월호 참사나 팔레스타인 전쟁 참사나 우크라이나 상공에서 격추된 말레이시아 항공기 참사와 같은 무서운 역사와 구조 갈등으로부터 받은 상처는 심리학 처방으로서는 다 감당할 수 없다. 여기에 성서가 절실하게 필요해진다. 믿음의 차원에서만 비로소 치유받을 수 있는 상처들이 있기 때문이다. '네 믿음이 너를 구하였다'라는 예수님의 선언이 이를 반증한다. 믿음과 상처의 관계를 더 깊이 묵상해야만 하는 시대 요청이 오늘을 사는 성도들에게 물밀듯 밀려들고 있다.

믿음은 상처를 당할수록 상처를 입힌 현실을 재해석하고 다시 일어서는 힘을 준다. 믿음은 상처에 머물러 있지 않고 상처를 치유하며 그 상처를 딛고 일어서는 힘을 준다. 이 힘은 계속 성장하는 믿음에서 생긴다. 이와는 달리 불신앙은 상처로 인하여 폭력을 행사하게 되고 폭력으로 인하여 더 깊은 상처를 받는 악순환을 거듭한다(창 4:23). 이러한 악순환이 구원받지 못한 세속의 문명사를 이끌고 있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것은 십자가에 나타난 사랑밖에 없다. 십자가의 사랑을 믿는 믿음을 통하여 비로소 세상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구원이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십자가의 하나님을 만나는 믿음으로 성장할 때 그 사람은 세상이 주는 모든 비극과 참사를 딛고 일어설 수 있다. 상처를 부여안고 계속 구원의 역사를 지어 갈 수 있는 새 힘을 받을 수 있다.

믿음은 어떤 고정화된 제도나 형식에 갇히지 않는다. 국가나 종단의 제도가 주는 안전한 삶에 믿음은 머물지 않는다. 그러므로 오랫동안 제도화되어 딱딱하게 굳어져 있는 제도 교회의 틀을 벗어나야 성령의 역사에 동참할 수 있다. 바울 사도가 유대교라는 틀을 깨고 세계로 나아갔을 때 성령의 역사를 지어 낼 수 있었다. 성령님은 창조계 안에서 믿는 자들을 계속 창조하시며 그들을 통하여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 성령님 자신이 스스로 하나님의 창조계 안에서 살아 활동하신다. 그러므로 믿음은, 오늘의 제도화된 교회를 벗어나도록 성도들을 촉구하고 있으며 교회 바깥에서 살아가는 '익명의 크리스천'을 불러일으켜 세우시는 것이다.

구원 대신 폭력을 택한 종교

며칠 전 CBS방송국의 낸시 랭이란 여성이 이끄는 좌담회를 시청했다. 좌담회의 제목은 "다른 종교를 믿어도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였다. 좌담에 참여한 학자들이 기독교의 정체성과 타 종교의 문제를 여러 각도에서 살피고 조명하였다. 나는 이 주제를 근본에서 생각해 보았다. '종교를 믿어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종교는 신앙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종교는 역사의 산물이다. 종교는 인간이 지어 가는 문화의 다양한 현상에 불과하다. 종교라는 형식은 믿음이라는 내용을 다 담기에 턱없이 부족한 그릇이다. 시대마다 비극과 참사의 규모와 내용이 달라지기 때문에 종교도 시대가 요구하는 만큼 깊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과거 유산에 매여 있는 종교인들이 자신의 종교를 올가미로 챙챙 감아서 딱딱한 화석으로 만들고 있다. 예수님께서 산상설교에서 장로들의 유산을 향해 통렬하게 꾸짖으신 것도 그 때문이었다. 마태복음에 기록된 산상설교의 여섯 반제(Antithese, 성내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이혼하지 말라, 맹세하지 말라, 보복하지 말라, 원수를 사랑하라 - 편집자 주)를 읽어 보라. 정말이지 어떤 종교든지 간에 종교를 믿어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진실을 깨닫게 된다. 여기에 모든 종교가 성경으로 돌아와야 하는 까닭이 있다. 성경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모든 문화와 종교들을 다 포괄하고 있다. 종교로 굳어진 교회에 말씀이 없기 때문에 성령의 촛대는 교회 바깥으로 옮겨졌다. 성령은 이제 교회라는 종교 바깥에서 참된 교회를 다시 세우며 일구고 계신다.

교회 바깥에도 구원이 있다고 주장했다가 교수직에서 해직되고 마음의 고통으로 일찍 돌아간 교수님이 있었다. 교회의 권력을 진 종교가들이 교회 안에 신앙과 학문의 자유를 박탈하고 학자를 죽였다. 학자들을 신학교 강단에서 쫓아내는 일들이 한국교회 안에 비일비재하게 발생하였다. '오직 예수'란 슬로건을 걸고 예수 아닌 상징과 기호들을 모조리 배척하고 박해하는 종교 폭력배들이 교회의 상층부를 장악하고 있다. 정말이지 폭력에 의존하여 문제를 해결하려는 종교인들이 교회에 의외로 많다. 이들에게서 믿음은 탄력을 잃고 만다. 그들의 교회는 마치 장로의 전통으로 굳어져 버린 유대교처럼 무서운 폭력 단체로 둔갑해 버리는 것이다. 종교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것이다.

온 생명 위한, 보편 세계 향한, '삼위일체를 깨달음'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나님을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모든 생명을 살리시는 생명의 주인이시다. '살아 계신 하나님'이란 표현은 어불성설이다. 하나님은 죽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인간이 주제넘게 하나님이 살아 계시냐 죽었느냐를 따질 수 없다. 히브리어 '하엘로힘 하이'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라고 번역하면 곤란하다. 그것은 '생명의 하나님'이라고 옮겨야 정확하다. 모든 생명을 창조하시고 살리시는 분이 곧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생명의 주님은 모든 죽이는 사슬에 매인 생명을 살리시는 분이기에 본질에서 구원주이시다. 모든 죽어 가는 것들을 구원하시려고 외아들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내셨다. 예수란 이름 자체가 '구원자'란 뜻이다. 교회는 예수를 구원자 메시아 곧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예수란 이름을 통하여 유대교라는 좁은 울타리를 걷어 버리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보편의 세계로 나아가신 분이 바울 사도였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으며 구원하신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오늘도 살아서 구원의 사역을 계속 하시는 성령님을 믿는 삼위일체의 믿음이 교회에서 정립되었다. 삼위일체의 가르침은 믿음이 어떠한 종교의 틀 속에도 갇히지 않도록 믿음의 성장을 재촉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특정한 어느 종교의 전유물이나 기호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삼위일체의 깨달음이다. 예수는 삼위일체 중 성자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곧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삼위일체의 신앙은 예수를 한 종교의 전유물로 삼는 악행을 방지하고 예수를 일정한 종교나 민족 문화의 울타리를 넘어서 모든 피조물의 구원주로 고백한다.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만물을 구원하시려고 믿는 백성을 창설하였다.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으시고 장구한 세월 속에서 이스라엘 국가의 멸망을 통해서 하나님의 참뜻을 알리고 교육하셨으며 마침내 예수를 구세주로 보내셨다. 따라서 예수는 한 종교의 울타리 안에 갇히지 않는 하나님이시다.

모든 생명을 살리는 생명의 주인이 곧 예수님이시다. 교회의 권력에 얹혀사는 종교인들이 아무리 예수를 내세워 자신의 존재 이유를 정당화하려 하여도 그가 한 종교의 아집에 사로잡혀 있는 한 예수님의 참뜻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종교를 믿어서는 아무런 구원도 받을 수 없다.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만이 구원으로 인도한다. 성서는 예수를 증언하는 책이다. 예수를 통해서 창조주 삼위일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어둠에 갇힌 자가 창조계의 만유를 포괄하는 공변된 영성에로 부르심을 받아야 구원받은 백성이 될 수 있다. 이 때문에 삼위일체라는 표호가 한 종교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삼위일체는 믿음이 계속 성장하도록 재촉하는 무한히 열려 있는 신앙고백이다.

삼위일체는 도그마가 아니다. 진리를 깨우치게 하는 하나의 교편이다. 삼위일체를 깨달아 갈 때 신앙은 계속 성장할 수 있다. 교리는 성경을 요약한 개요에 불과다. 삼위일체 교리를 통하여 성경에로 직접 나아가야 한다. 말씀을 직접 대면하고 읽고 깨우쳐야 믿음의 성장이 정체되지 않는다. 믿음이 성장해야만 세상에서 당하는 모든 부조리와 참극과 어두운 사망 권세를 견디고 이겨 낼 수가 있다.

교회, 물신숭배하는 국가에 회개를 외쳐라 

구원이란 무엇인가? 세상을 버리는 것이 먼저 이루어져야 구원을 받는다. 세상을 벗어나서 하나님의 통치 세계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 구원이다. 세상이란 무엇인가? 세상은 인간이 삶의 방편으로 지어 놓은 도시와 그 도시들의 연맹체로서의 국가이다. 가인이 에녹성을 쌓은 이래 문명이 발호하였으며(창 4장), 강자의 폭력으로 땅이 망가졌다(창 6장). 함의 후손에서 영웅들이 출현하여 다시 도시들이 축성되었으며 이 도시들의 연맹체가 곧 국가가 되었다(마믈레케트, 창 10:10). 국가의 본질은 창세기 11장의 바벨성 사건으로 잘 규명되어 있다. 문명을 주도하는 도시와 국가는 폭력을 기반으로 발달하였으며(창 14장) 근본에서 죄악의 덩어리이다. 이것이 곧 세상(코스모스)이다. 도시와 국가라는 세상으로부터의 벗어나서 새 삶을 살아가는 것이 곧 구원인 것이다. 구원받은 새 삶에는 믿음이 계속 자라나며 세상이 주는 모든 상처를 아물게 하고 승리하게 하는 성령의 도우심이 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이며 교회의 진정한 삶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항상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대안의 사회 체제를 꿈꾸며 산다. 세월호 참사를 일으킨 주범은 국가라는 세상을 주도하는 죄인들이라는 사실을 교회는 직시하고 모든 대한민국 백성에게 회개할 것을 선포해야 한다. 회개는 가던 길을 되돌아서서 진리를 향해 걸어가는 행동을 가리킨다. 교회 자신이 회개하고 삼위일체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서야 한다. 더 나아가, 대한민국이란 국가가 자본주의라는 물신숭배의 마수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본주의의 무서운 질곡에서 벗어나 돌이켜야 대한민국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이윽고 삼천리 금수강산에서 참다운 인간의 삶을 보장하는 새로운 대안 체제를 이루는 쪽으로 교회가 나아가야 한다. 교회는 대한민국이란 '세상'을 향해서 회개할 것을 외쳐 대야 한다.

참사를 당하여 통곡하는 유가족과 함께 우리 모두의 가슴도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상채기로 구멍이 쑹쑹 난 영혼을 부여안고서 날마다 허황한 발걸음만 내디디며 살아간다. 이 상채기를 메우고 다시 일어설 믿음이 절실하다. 새록새록 성장하는 믿음은 국가주의와 물신숭배에 젖어 있는 세속 도시를 벗어나 구원의 참다운 대안 사회를 바라보게 만든다. 교회여! 대한민국이여! 성경 말씀으로 돌아가자. 성경은 참되며 모든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지 않는가! 말씀에 의지하는 참된 하나님의 교회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계속 바라보며 '열국 광야'를 거쳐 '새 사회'를 찾아 행진하여 나아갈 것이다.

이영재 / Ph.D., 전주화평교회, 전주성경학당, CBS성서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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