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신학대학 교수가 쓴 논문을 막 읽었다. 읽어 내려가기가 쉽지 않았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비비 꼰 표현이 이해를 더 어렵게 만들었다. 또 지나친 피동문이 글을 소화해 내는 데 걸림돌로 작용했다. 그렇게 자신이 없으면 글을 쓰지 않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목회자들의 피동 사용은 유명하다. 설교 한 편을 듣는데 사용되는 피동사를 손가락으로 꼽아 보면 이루 말할 수 없이 많다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업혔다, 덮였다, 팔렸다, 묻혔다' 등이 그 예이다. 하지만 이런 것들보다 더 자주 쓰는 경우가 동사의 어간에 '-어지다'가 붙어 되는 피동사이다. 설교는 말할 것도 없고 목회자들이 쓰는 글도 예외가 아니다. 논문과 같은 사실문에까지 피동사 범벅으로 만드는 데는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보여지다, 쓰여지다, 하여지다, 되어지다' 등의 남용은 목회자의 언어 사용 양식까지 의심하게 만든다. 앞의 것은 '보인다, 쓰인다, 한다, 된다'로 해도 충분하다. 꼭 써야 할 곳이 아니면 능동사를 사용하는 것이 옳다.

목회자들이 능동이 아닌 피동을 즐겨 사용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곰곰 생각해 보니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시고 인간은 한낱 피조물에 불과하기 때문에 겸손의 뜻으로 피동사를 사용하지 않나 싶다. 인간은 단지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행동하는 객체라고 생각해서 그런 것 같다. 하지만 이것은 착각이다. 물론 하나님의 뜻 안에서 피조물 인간이 움직이는 것은 맞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주신 독특한 것이 바로 '자유의지'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지 말고 인간의 의지를 맘껏 펼치며 살아가라고 주신 것이 '자유의지'이다. 그럼에도 매사 과도하게 피동사를 사용해서 행동과 생각을 제어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도 맞지 않는 일이다. 오히려 잘못을 면피하려는 욕구의 반영 같아 하나님께 면구스럽다. 당연한 것은 생략하고 지나치는 것이 언어 습관이다. 대화를 할 때 주어 '나'를 자주 생략하는 것은 말의 주체가 '나'라는 것이 너무 당연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만물의 주인이시고 우리 인간은 피조물 중 으뜸 존재이라는 사실은 너무 당연한 것 아닌가.

이런 당연 관계를 전제한다면 굳이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그분(하나님)이 시켜서 한다는 의미의 표현을 쓰지 않아도 된다. 따라서 피동태가 아니라 능동태의 문장과 화법을 사용하는 것이 옳은 언어 습관이 된다. 목회자가 피동을 자주 쓰니 성도들도 따라간다. 대화를 할 때 지나칠 정도로 '-어진다' 표현을 태연하게 사용하는 성도들을 보면 안쓰럽기조차 하다. 이것은 책임감의 방기 내지 자신감의 결핍을 드러내는 것같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좋은 교회가 되도록 하겠다"면 족할 것을 "좋은 교회가 되어지도록 하겠다?", "신앙 성장하는 모습이 보인다"로 족할 것을 "신앙 성장하는 모습이 보여진다?", "새 옷이 찢겼다" 하면 될 것은 "새 옷이 찢겨졌다" 등으로 표현하는 것은 뱀에 다리를 붙이는 사족(蛇足)과도 같은 표현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만드실 때 자신 있고 당당하게 살아가기를 원하셨다. 부족한 인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케 하셨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는 권한까지 주시지 않았는가. 사람이 피동이 아닌 능동의 존재로 살아가라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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