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서른에 우린 어디에 있을까
어느 곳에 어떤 얼굴로 서 있을까
나이 서른에 우린 무엇을 사랑하게 될까
젊은 날의 높은 꿈이 부끄럽진 않을까
우리들의 만남과 우리들의 약속이
나이 서른엔 어떤 뜻을 지닐까
빈 가슴마다 울려나던 참된 그리움의 북소리를
나이 서른에 우린 들을 수 있을까 (노래마을 사람들, 1986)

▲ <사무엘상> / 김구원 지음 / 홍성사 펴냄 / 652쪽 / 2만 원

대학을 졸업하고 십수 년도 넘어서 교인들과 함께 어느 촛불 집회에 갔더랬다. 집회가 마쳐갈 무렵 이젠 옛날의 투쟁력이 나오지 않는다고 한탄하며 조금 일찍 현장을 떴다. 근처 햄버거 집에 앉아 수만의 군중이 얽힌 현장을 피곤한 눈으로 훑어보고 있었다. 그런데 잠시 후 대학 시절 같이 책을 읽고 토론하며 머리를 맞대었던 친구와 후배가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이게 말이 돼? 수만 명의 군중들, 조금 이른 자체 해산, 졸업 후 지나 버린 긴 시간. 그놈들을 여기서 우연히 다시 만날 줄이야.

햄버거를 씹으며, 언뜻 언뜻 보이는 흰머리를 욕하며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고마워할 수 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같은 뜻을 나눌 수 있음에 마음이 기뻤다. 집에 돌아오는 길, '나이 서른에 우린'이라는 노래를 불러 보았다. 세상을 바꾸지는 못했다. 모두가 더 행복한 시절을 살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하지만 같이 답답해하고, 같이 고민하는 작은 북소리가 우리들의 가슴에 여전히 울리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음에 마음 든든했다. 그 순간만큼은 우리는 서로의 평범한 영웅일 수 있었다.

성경은 영웅들의 이야기다. 영웅들을 읽으면 가슴이 뛴다. 그들처럼 되고 싶다. 그래서인지 어떤 분은 "영적 스타플레이어가 되라!"고까지 설교를 하더라. 직접 듣는 순간 귀를 의심했지만 워낙에 유명하신 분이라 내가 틀린 줄 알았었다. 젊음을 드려 캠퍼스 리더, 교회 청년회 임원 등을 두루 거치며 교회 오빠, 교회 누나로 전성기를 보낸 우리의 삶에 더 이상 무엇이 남아 있는 걸까? 그들은 지금 무엇이 되어 있을까? 영적 스타플레이어? 다윗? 루터? 윌리엄 캐리? 아마 몇몇은 그렇게 되었을 게다.

그러면 우리는? 평범한 우리들은 뭐란 말인가? 한때의 열정을 밑천 삼아 그냥그냥 살아가는 하루살이? 추억팔이? 우리는 왜 영웅이 되지 못하는 걸까? 왜 이다지도 평범한 것일까? 죄책감에 눌리고, 부족해서 쪽이 팔리면서도 때때로 시원하게 갈겨 묻고 싶었다. "그래서 어쩌라고? 나더러 뭘 더 어떡하라고?"

혹시라도 이러한 죄책감에 마음이 무겁다 못해 반항심마저 치밀어 본 독자들이 있다면 그리스도인을 위한 통독 주석 <사무엘상>을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김구원 교수의 주석서 <사무엘상>은 우리의 삶이 평범해도 괜찮다고 다독여 준다. 그는 사무엘, 다윗을 영웅으로만 미화하지 않는다. 궁극적인 실패를 인정하면서도 사울을 악당으로만 매도하지도 않는다. 농구 만화 '슬램덩크'의 최대 재미가 농구 초보 강백호의 성장을 보는 것이었다면, 이 주석서는 주인공의 성숙과 실패를 매우 사실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재미를 제공한다. 이 주석은 주인공을 키우는 맛이 있다. 그래서 이 주석서에 감히 꼬리표를 달자면 다음과 같은 태그를 달고 싶다. '주석계의 슬램덩크'

저자와 함께 사무엘상을 읽어 나가다 보면 세 주인공 공히 처음부터 비전에 사로잡혔던 것은 아니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은 어떻게 사명자가 되었는가? 아이 없던 여자의 신들린 헤드뱅잉 기도를 통해 잉태된 작은 아기 사무엘, 잃어버린 암나귀 찾으러 나섰다가 덜렁 왕이 되어 버린 사울, 형들에게 도시락 셔틀이나 하러 갔다가 골리앗 목을 따 버린 다윗. 그들은 애초에 영웅이 되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냥 일상의 작은 삶에 충실했을 뿐이었다. 답답하면 답답하다고 소리쳤을 뿐이었다. 겁이 나면 겁이 난다고 말했을 뿐이었다.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은 찾아가셔서 깎고 닦아 자신의 뜻에 맞는 사람들로 변화시켜 가셨다. 그리곤 사사 시대를 넘어 왕정 시대로 전환하는 역사의 새로운 페이지를 휘갈기셨다. 사무엘의 피에 다윗을 찍어 한 자, 한 자, 당신의 역사를 채워 넣으셨다.

역사의 주인공이 되겠다고 전면에 나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한 사람, 한 사람을 먼저 부르셨다. 어디 '비전 수련회' 가서 마지막 날 손들고 튀어 나간 게 아니란 말이다. 잠자다가, 나귀 찾다가, 도시락 배달 갔다가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은 일상생활 속에서 최선을 다해서 살고 있을 때 그 삶 속에서 기회를 발견하게 하신다. 저자는 그 섬세한 하나님의 개입을 포착하여 우리의 평범한 일상을 황금의 시간들로 해석하게 해 준다.

또한 주인공들은 '좋은 놈! 나쁜 놈!'이 아니라 '어중간한 놈'으로 그려진다. 사울은 성경의 대표적인 악당이자 정신병자다. 실제로도 그랬다. 하지만 저자는 사울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이지는 않는다. 저자는 사울에게도 변명의 기회를 공정하게 준다. 자신이 왕이 되는 것을 대놓고 조롱한 불량배들에게 맞대응하지 않고 겸허히 자신의 약점을 인정했던 점(삼상 10:17~19), 아말렉과의 싸움에서 아각과 전리품을 남겼지만 이것이 고의가 아니라 사울이 정말로 자신의 과오를 몰랐을 가능성(삼상 15:13~16)을 부각 시킨 대목은 눈여겨볼 만하다.

반면 다윗은 좋은 놈이다. 과연? 다윗은 골리앗과의 전쟁에 나가기 전에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해서라는 영적인 대의명분을 내세우면서도 사울이 내걸었던 포상에 대해 재차 확인한다. 저자는 이를 다윗의 세속적이면서도 영적인 특징을 잘 대변하는 것이라고 보았다(삼상 17:26~27).

그뿐만 아니라 다윗은 사울의 진영을 확인하기 위해 정탐을 하면서 일부러 급진적인 성향의 아비새를 선택한다. 저자는 이 장면에서 자신의 손에 직접 피를 묻히지 않고 아비새의 손을 빌려 사울을 제거하려 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삼상 26:5~6). 하지만 막상 아비새가 사울을 제거하려고 하자 다윗은 '여호와의 기름 부은 받은 자'를 손댈 수 없다면서 이를 제지한다. 애초에 아비새를 동행시킨 의도와 다르지 않은가? 저자는 다윗 자신이 기름 부음 받은 자였기 때문에 부하들 역시 자신에게 칼을 돌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친 고도의 정치적 발언이었다고 덧붙인다(삼상 26:9~11). 이처럼 다윗은 지극히 영적이면서도 인간적이고 정치적인, 복잡한 인물이다. 그를 좋은 놈 프레임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프레임으로 분석하는 것도 이 주석서를 읽는 색다른 맛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본서의 균형감을 칭찬하고 싶다. 이 책은 사무엘상의 숲과 나무를 동시에 보여준다. 저자는 '평신도를 위한 통독 주석'이라는 복합적인 과제를 잘 수행했다. 사실 통독과 주석은 어울리지 않는다. 주석은 꼼꼼한 석의적 연구와 신학적 논쟁을 풍부히 소개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만, 통독은 빨리 읽기를 통해서 전체의 그림을 그리는 것을 목표로 한다. 공존하기 어려워 보이는 과제지만 본 주석은 사무엘서 전체의 신학적 주제를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각각의 구절들이 갖는 원어적인 의미와 난제들도 충분히 해설한다.

특히, 고대근동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를 꾸준히 진행해 온 저자의 학문적 깊이가 유감없이 발휘된다. 그의 고대근동에 대한 배경 지식은 사무엘상을 읽는 재미를 한층 더해 주는데, 이것은 저자의 주 연구 분야와 사무엘상이 만났을 때에만 주어질 수 있는 선물이다. 오직 이 책만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기쁨인 것이다.

다만 일반 기독 대중을 위한 주석서치고는 그 분량이 너무 두껍지 않나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620쪽은 부담 없이 읽기에는 벅찬 분량이다. 콤팩트하게 내용을 추렸더라면 좀 더 많은 사람들의 손이 닿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큐티 진도에 맞추어 천천히 완독하면 될 일이니 독자들의 도전을 권하고 싶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삼상 16:7)."

평범해도 영웅이다. 하나님이 보시는 영웅은 중심이 갈고 닦인 사람이다.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간에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신다. 용모와 키가 아니다. 우리의 업적이 아니다. 우리의 핵심 가치, 중심이다. 당신은 영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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