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제강점기 한국교회의 친일 인사들은 구약성서를 일본 제국주의적인 시각에서 읽게 하려는 일본 정부의 지시를 충실히 시행해서, 구약성서를 통해 친일 사상을 전파하려고 했다. 강백남은 구약 출애굽기에 나오는 십계명을 강론하면서 신사참배는 결코 우상숭배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북미합중국의 워싱턴 동상이 있는데 합중국 국민으로는 그 동상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고, 합중국 국기에 합중국 국민으로 누구나 다 경의를 표합니다. 합중국은 기독교국이니만치 기독교인이 대다수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다 우상숭배자로 간주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대일본 황국신민만이 국조숭모(國祖崇慕)하는 의식에 기독교인이 어찌 참례할 수 없으며 황국(皇國)을 대표한 일본 국기에 경의를 표함이 어찌 기독교인에게 죄가 되겠습니까. 전화위복(轉禍爲福)하는 자 있으나 기독교인은 그러한 의미에서 참배함은 절대로 아니요 국가 의식에 국민의 의무로서 참례(參禮)함이 당연한 줄로 각오(覺悟)하고 시인(是認)한즉 양심이 평안하고 충군애국지심(忠君愛國之心)이 날이 감을 따라 두터워집니다. 사신우상(邪神偶像)은 금수 곤충 어별(魚瞥)의 형상으로 된 것인데 어찌 우리의 조상이 그 우상과 동류(同類)가 될 수 있으랴? 그런즉 신사참배하는 일을 우상숭배라고 한다면 이(此)는 불경죄(不敬罪)에 가깝다고 말하여 둡니다(<청년> 9, 10호, 1939년 2~3월호. 김승태, <한국 기독교의 역사적 반성>, 410쪽).

이들은 구약성서뿐만 아니라 신약성서도 인용하면서 일제의 한국 침략을 합리화하기 위해 애썼다. 한국인들이 앞장서서 식민주의적으로 성경을 해석한 것이다.

2.
한국인으로서 구약에 관한 논문을 최초로 쓴 영광을 누린 양주삼(梁柱三, 감리교 협성신학교 교수)은 '신동아 건설과 반도인 기독교도의 책임'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기독교의 설립자라고 칭할 만한 사도바울은 자기가 로마제국의 공민(公民)이 된 것을 영광스럽게 여기고 자랑하였습니다. 그와 같이 반도인들은 대일본 제국의 신민이 된 것을 영광스럽게 여기고 자랑할 것입니다. 그것이 반도인의 유일한 활로입니다. 반도인들은 이 기회에 죽은 과거를 청산하고 산 장래를 위하여 활동하여야 되겠습니다. 선각자가 된 기독교도들은 민중에게 이 활로를 지시할 책임이 있습니다(김승태, <한국 기독교의 역사적 반성>, 432쪽).

양주삼을 비롯해서 일본 제국주의에 협조한 친일적인 조선 기독교 지도자들은 사도바울이 유태인이면서도 협소한 민족주의를 버리고 로마제국의 시민임을 자랑스럽게 여겼고, 또 이름도 로마식으로 창씨개명한 것처럼 조선 기독교도들도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당시 로마를 중심으로 전 세계 교통이 통하는 것처럼 지금은 누구나 대일본 제국의 길을 밟고 다닌다고 말했다. 그리고 바울이 헬라어를 사용하고 신약성경도 헬라어로 기록했던 것처럼 우리도 국어인 일본어를 반드시 사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3.
그리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일본의 한국 지배를 신의 뜻으로 본 사람도 있었다. 최태용은 '조선 기독교회의 재출발'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는 그 제자들이 이스라엘의 회복을 희망하며 따르는 것에 대해서 "나의 나라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니다"(요 18:36) 하면서 이를 물리치고, 영적 사명에 적합하도록 그들을 정결히 하여, 그들을 종교적 사명을 달성하는 세계의 사도로 하였던 것이다. 즉, 그리스도는 그 제자들이 로마의 주권에 복종하면서 그 종교적 사명을 달성하도록 인도했던 것이다. 조선을 일본에 넘긴 것은 신(神)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을 섬기듯이 일본 국가를 섬겨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있어서 국가는 일본 국가가 있을 뿐이다. 우리가 다해야 할 국가적 의무와 지성(至誠)은 이를 일본 국가에 바쳐야 마땅할 것이다. 우리는 가장 사랑하는 것을 일본국에 바치도록 신에게서 명령받고 있는 것이다(김승태, <한국 기독교의 역사적 반성>, 436쪽).

이런 터무니없는 주장들을 일본 사람들이나 일본 교회가 아닌 한국인 종교 지도자들이 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들은 성서를 일본 제국주의의 한국 식민 통치를 정당화하려는 수단으로 삼은 식민주의적 성서 해석의 전범(典範)들이다.

4.
그리고 일본 제국주의의 한국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한국에 진출한 일본 조합교회도 당연히 구약에 대해서 부정적이었다.

조선 전도부의 어용적 성격은 1919년 3․1독립운동에 대한 반응에서도 유감없이 나타났다. 3․1독립운동을 목격한 와타세는 즉각적으로 '조선 소요 사건과 그 선후책'을 <新人> 4월 호에 기고해, 3․1운동에 참가한 조선 기독교인들은 구약의 정신이 농후하고 기독교의 사랑의 정신이 없는 유대교도에 불과하다고 비난했다. 즉, 만일 기독교인들이 산상수훈의 정신을 안다면 그들은 그런 식으로 반행해서는 안 될 것이며, '하나님을 아버지로 하는 형제로서 더 포용적으로 내선일체를 대성하는 정신'에 근거하여 행동했어야만 했다고 비판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건전한 신앙을 근거로 해 건전한 사상'을 배양함으로써 유다주의를 극복하고 '양 민족의 새로운 영적 일치'를 달성하기 위한 조합교회의 조선 전도의 의의를 더욱 강조하였다(양현혜, '일본 기독교의 조선 전도', <한국 기독교와 역사> 제5호(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6), 195~196쪽).

일본 조합교회가 일본 정부의 입장에 발맞추어 구약을 비판하고 신약 복음서를 앞세우는 것을 알 수 있다.

5.
그리고 일본 기독교도들 가운데는 구약성서를 식민주의적으로 이해하면서, 일본이 한국을 병합한 것을 '출애굽 사건'으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한국은 드디어 제국의 판도(版圖)에 병합되었도다. 일장기가 계림의 아침을 비추어 참으로 빛나리라고 나는 마음속으로 엄숙히 하나님께 기도하는 바이다. "모세가 여호수아를 불러 온 이스라엘 목전에서 그에게 이르되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여호와께서 그들의 열조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들로 그 땅을 얻게 하라 여호와 그가 네 앞서 행하시며 너와 함께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니 너는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신 31:7~8). 우리나라와 한국과의 관계는 유래가 깊고 유구한 역사를 지녔다. 실로 하나님이 이 국민의 '열조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이라고 느껴야 한다. 이런 의식은 오랫동안 역사적으로 일본 국민들에게 이어져 왔다. …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조상들에게' 한국이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가질 권리가 있다('大日本の朝鮮', <福音新報> 제792호, 1910. 9. 1. 서정민, <일본 기독교의 한국 인식>, 147쪽에서 재인용).

이 얼마나 구약적인 발언인가. 이들은 출애굽 사건과 가나안 정복 사건을 일본 제국주의의 한국 침략과 동일시한다. 이런 그릇된 생각은 타국을 식민지화하는 제국주의적인 사고의 전형(典型)이라고 할 수 있다.

이종록 / 한일장신대 구약학 교수

*이 글은 이종록 교수의 페이스북에 실린 글입니다. 허락을 받아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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