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세월호 침몰에 대해 김삼환 목사가 설교 중에 한 발언이 끝없는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발언의 파문이 가라앉기도 전에 김 목사가 시무하는 명성교회에서 '한국교회위원회'라는 낯선 이름의 단체가 주관하여 '세월호 참사 위로와 회복을 위한 한국교회 연합 기도회'가 열렸다. 이 위원회의 위원장은 김삼환 목사다. 이 기도회에 박근혜 대통령이 참석했는데, 이것을 두고도 말이 많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망언의 당사자가 주최하는 기도회에 대통령이 참석한 것이 적절치 않다는 이유 때문이다.

나는 문제되는 두 설교(2014년 5월 11일과 18일)의 녹취록을 주의 깊게 읽어 보았다. 매 주일 설교 사역을 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의 설교를 비평하는 것은 참으로 주저되는 일이다. 하지만 김 목사의 영향력을 생각할 때 그리고 세월호 관련 발언이 일으킨 파장을 생각할 때 그냥 지나갈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의 페이스북에 짧은 글을 올렸고, 기자의 부탁으로 더 긴 글을 쓰게 되었다.

두 편의 설교에 대해 설교 비평을 하자면 할 말이 많다.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정용섭 목사가 쓴 '예수 성공, 불신 실패의 저력과 한계'(<설교의 절망과 희망>, 59~81쪽)라는 글을 추천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이 비평이 나온 지 벌써 몇 년이 흘렀는데, 정용섭 목사의 지적은 여전히 유효하다.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다. 이 글에서 나는 문제가 된 부분에 대해서만 말하려 한다.

설교의 흐름을 살펴볼 때, 문제의 발언은 거의 실언에 가까워 보인다. 5월 11일 설교의 서두 부분에서 세월호 사건에 대해 언급했는데, 그 내용은 회중의 공감을 살 만한 것이었다.

"이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애들이 죽은 게 아닙니다. 우리나라가 이 애들을 죽인 것입니다. 번연히 보고, 그 침몰해 가는 것을 보면서 그 많고 많은 시간, 이 많은 국력을 가지고 애들 죽어 가는 것을 잘 죽으라고 그냥 다 버려둔 것입니다."

물론, 이 대목에도 아슬아슬한 표현들이 보인다. "우리나라가 이 애들을 죽인 것입니다"라는 표현도 그렇고, "애들 죽어 가는 것을 잘 죽으라고"라는 표현도 그렇다. 우리의 책임을 강조하기 위한 반어법이긴 하지만, 반어법을 피해야 할 때가 있다. 피해를 입은 당사자 앞에서는 특히 그런 표현을 피해야 한다. 피해를 입은 당사자를 생각한다면 김 목사의 표현이 너무 거칠다.

그것으로 그쳤더라면 좋았을 것을, 김 목사는 조금 뒤에 이렇게 덧붙인다. 설교를 녹취한 원고를 그대로 옮겨 적으면 이렇다.

"저는 하나님이 공연히 이렇게 침몰시킨 게 아닙니다. 나라를 침몰하려고 하니 하나님께서 대한민국 그래도 안 되니 이 어린 학생들, 이 꽃다운 애들을 침몰시키면서 국민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무슨 누구 책임, 지금 이런 식으로 수습하지 말고 온 나라가 다시 한 번 반성하고, 애통해하고, 눈물 흘리고, 우리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모두 새로운 전기를 만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앞에서 지적했듯, 이 대목은 즉흥적으로 떠오른 생각을 말한 것처럼 보인다. 조금만 생각했더라면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안타까움 때문인지, 간절함 때문인지, 흥분한 상태에서 말하다 보니 도를 넘어선 것이다. 구어체이긴 하지만, 문장의 구조가 깨어져 있는 것이 그 증거다. 이런 경우, 설교 후에 문제될 부분을 편집하여 인터넷에 올리도록 조치를 취했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을 보면, 실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거나,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사실, 실언은 마음에 없는 말이 아니다. 실언에 그 사람의 진심이 담겨 있는 경우도 많이 있다. 그러니 위에서 인용한 발언이 실언이었다고 해도 김 목사가 문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생각이 마음에 있지 않고서야 그런 말이 입에서 미끄러져 나올 리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그런 생각이 잘못이라는 의식이 없거나 부족했다는 데 있다. 우리의 마음 안에는 여러 가지의 생각이 뒤섞여 있을 수 있다. 그 생각들을 정리하고 검열하여 부정할 것은 부정하고 수용할 것은 수용하는 것이 사상이요 신학이며 의식이다.

그러니 이 발언은 단순한 실언이 아니었다. 김삼환 목사 아들의 해명대로 진의가 왜곡된 것도 아니다. 발언 자체는 즉흥적으로 미끄러져 나온 것일지 몰라도, 그렇게 말하게 만든 잘못된 신학이 그 뿌리에 있다. 뿐만 아니라, 그런 말을 하고도 그것을 실언으로 의식하지 못했다는 사실 혹은 그 실언의 심각성을 의식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더욱 문제를 심각하게 만든다.

2.
김 목사의 발언을 접했을 때, 몇 년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60대 초반의 한 교우가 갑작스러운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외출했던 남편이 집에 와 보니 아내가 풀장에 빠져 죽어 있었다. 그 광경을 목격하고 사고 수습을 해야 했던 남편은 큰 충격에 빠졌다. 경황없는 중에 눈물을 쏟아 가면서 "착하기 이를 데 없던 아내에게 하나님이 왜 이러셨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거듭 하소연을 했다. 나는 "하나님이 하신 일이 아닙니다. 이 사고에 대해 하나님도 안타까워하고 계실 것입니다"라고 위로했다.

그 교우를 위한 장례 예배에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이 사건을 두고 하나님이 하셨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하신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고입니다. 일어나서는 안 될 사고입니다. 하나님도 이 사고에 대해 마음 아파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그분을 의지하고 사랑으로 보듬어 안고 지내다 보면, 하나님께서 이 비통한 사고를 통해 선한 일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예배가 끝나고 조객들과 인사를 하는데, 어느 백인 청년이 점잖게 그러나 아주 단호하게 "그렇게 말하면 하나님의 주권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나는 당신의 설교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고 지나갔다. 그 교우의 아들이 당시에 워싱턴 DC에 있는 근본주의적인 신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그 신학교의 학생들이 장례 예배에 참석했던 것이다. 그 신학교 학생들이 여럿 와 있는 것을 알았기에 그런 저항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도발적으로 표현할 줄은 몰랐다. 나는 조객들과 인사하느라 그 청년에게 응답하지 못했다. 인사가 끝나고 나서 그 청년을 찾아보았으나 이미 자리를 뜨고 없었다.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문제다. 삼위의 하나님은 이 세상 모든 만물을 다스리신다. 하나님의 주권 혹은 통치권이 미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다. 하지만 하나님은 또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당신의 주권을 행사하신다. 인간 사회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이 두 가지의 축 사이에서 일어난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는 서로 밀고 밀치는 '긴장'과 서로 당기고 끌리는 '연합'의 관계 안에서 역사를 만들어 나간다. 이 관계는 '살아 있다'. 언제나 같은 방식으로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어떤 공식으로 설명할 수가 없다. 때로는 하나님의 주권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한계선까지 밀고 나가 '전권적으로' 역사하는 경우도 있고, 때로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하나님의 주권을 한계선까지 밀어붙일 때도 있다. 인간사의 모든 일들은 이 관계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며, 우리는 각각의 사건 앞에서 신중하게 분별해야 한다. 그 분별에 따라서 우리의 언어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사고 앞에서 비통해하는 유가족에게 나는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그 말로써 나는 하나님의 주권을 부정한 것이 아니다. 미끄러운 풀장에서 실족하여 쓰러지는 사람을 보이지 않는 손으로 낚아채는 것이 하나님의 통치 방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사고가 일어나도록 내버려 두었다는 점에서는 하나님을 탓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이 하셨다"고 말할 수는 없다. 진실이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주권 사이에서 후자에 지나치게 기울어지면 이런 오류에 빠질 수 있다. 그것이 근본주의 혹은 보수주의 신학이 빠질 수 있는 함정이다. 보수주의 혹은 근본주의 신학이 그렇다는 뜻은 아니다. 그 신학 전통에서 가르치는 하나님의 주권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그렇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하나님의 주권을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전통 안에서 지내다 보면 그런 오류에 빠진다. '믿음이 좋다'는 평가를 듣는 사람들의 어법에 그 오류가 배어 있다. 모든 문장의 주어에 하나님이 들어간다.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하셨다고 표현한다. 그러다 보면 길을 걸어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것도 하나님이 하신 것이라고 말하게 된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순간에도 나는 하나님의 주권과 다스림 아래에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 나를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게 한 것은 아니다.

정확한 비유는 아니지만, 하나님의 통치권을 대통령의 통치권에 빗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대한민국은 대통령의 통치권 아래에 있다. 법적으로 말하자면 모든 국민에게 대통령의 통치권이 미친다. 하지만 대통령이 모든 일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일은 직접 일어나게 하지만, 어떤 일은 간접적으로 일어나게 한다. 어떤 일은 대통령과 전혀 상관없이 일어나지만 여전히 대통령의 통치권은 유효하다. 세월호 사건에 대해 대통령에게 책임이 있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통령이 세월호를 침몰시킨 것도 아니고, 수습 과정에서 대통령이 직접 개입하여 문제를 일으킨 것도 아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이 대통령의 통치권 아래에 있기 때문에 책임을 묻는 것이다. "대통령이 아이들을 죽게 했다"고 성토하는 것은 지나친 면이 있다. 하지만 대통령에게 그만한 책임이 있다는 뜻으로 본다면 그렇게 말하는 것도 과언은 아니다. 대통령의 책임이 그만큼 크다는 뜻이다.

세월호 사건 후에 "하나님이 아이들을 죽였다"고 하는 말도 읽었고, "하나님은 선장과 함께 배에서 제일 먼저 빠져 나왔다"고 하는 말도 읽었다. 그 말이 진실은 아니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심정은 공감할 수 있었다. 감당할 수 없는 혹은 이해할 수 없는 거대 비극 앞에서 우리는 그 비극의 크기에 걸 맞는 비난 대상을 찾으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에게 책임을 돌리고 원망한다. 이것은 거대 비극을 받아들이고 소화하는 과정에서 유익한 기능을 감당하기도 한다. 시편에서 그 예를 많이 찾을 수 있다.

김 목사가 이런 뜻으로 "하나님이 애들을 죽였다"고 말했다면, 많은 이들을 공감하게 하고 신뢰를 얻었을 것이다. 희생당한 사람들의 부모들의 마음을 목사가 대신 표현해 주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김 목사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평신도 수준의 이해를 가지고 그렇게 말했다는 데 있다. 그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주권이 가지는 다이내믹한 관계와 양극단 사이의 넓은 스펙트럼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눈 질끈 감고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라는 믿음으로 세상을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하나님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못하실 일이 없는, 피도 눈물도 없는 집행자가 되어 버렸다. 또한, 하나님의 주권을 절대화하는 사람들이 자주 그렇듯이, 김 목사는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배후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의도를 정확히 아는 사람처럼 말한다. 그렇지 않고야 이렇게 단언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설명할 수는 없다. 그의 발언이 하나님의 주권을 최대한 높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가 하나님 머리 위에 서 있는 셈이 되어 버렸다. 하나님의 의도를 단정적으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은 하나님의 주권을 심각하게 침해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김 목사의 화법이 구약성경에서 배운 것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그렇게 보이는 면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이 화법이 주로 등장하는 맥락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구약성서에서 이 화법은, 첫째, 주로 고백적인 표현으로 사용된다. 다른 사람에게 일어난 비극을 설명하는 말이 아니라,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하는 고백이다. 우리가 일본의 패망과 조국의 해방을 "하나님이 하셨다"고 고백하는 것처럼, 이스라엘 사람들도 하나님의 구원 행동을 찬양하고 감사할 때 그렇게 고백했다. 김 목사는 고백에 사용되는 화법을 선언으로 오용한 것이다. 둘째, 이 화법은 주로 신탁 안에서 사용되었다. 예언자들이 이 화법을 사용할 때는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셨다는 믿음이 배후에 있었다. 따라서 어떤 사건에 대해 "하나님이 하셨다"고 말하려면 충분한 기도와 분별이 선행되어야 한다. 김 목사의 경우, 그런 분별의 과정도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런 과정을 거쳤다면 결코 그런 발언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3.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김 목사의 발언은 신학과 사상의 문제일 뿐 아니라 목회자 혹은 설교자로서의 기본 양식의 문제이기도 하다. 나 같은 사람이 설교의 대가요 가장 성공한 목회자 중 한 사람인 김 목사의 설교자로서의 기본 양식을 문제 삼는다는 것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가소로운 일처럼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보는 그의 문제는 바로 그 점에 있다. 설교자로서 혹은 목회자로서의 거대 성공에서 그의 문제가 비롯되었다. 너무 커지고 너무 높아져서 회중석에 앉아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눈물이 보이지 않게 된 것이다. 세상만사를 자신의 시각으로 해석하고 재단하고 단정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김 목사는 자신의 설교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듣고 있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설마,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이 자신의 설교를 듣게 될 것이라고 상상하지 못했을까? 상상하지 못했다면 더 큰 문제요, 그것을 알면서도 이렇게 말했다면 설교자가 가져야 할 목회적 마음이 무뎌졌다는 증거다. 사랑하는 자식을 잃은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하나님, 도대체 내 자식이 몸부림치며 죽어갈 때 무엇 하셨습니까?"라고 절규하고 있음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런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렸다면 이렇게 말할 수 없다. 설사, 하나님이 하셨다고 믿었다 해도, 슬픔을 당한 사람 앞에서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김 목사의 발언을 생각하면서 설교자의 준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설교자는 말씀을 전하기 전에 충분한 묵상과 준비를 해야 한다. 인간의 언어는 때로 무력하고 한계적이어서 차라리 침묵하는 것이 더 나을 때도 있지만, 또 때로는 강력한 힘을 가진다. 말 한마디로 평생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만들어 내기도 하고, 상처의 결박으로부터 해방시키기도 한다. 말 한마디로 하나님을 영영 떠나게 만들 수도 있지만, 한마디의 말로 진리의 빛이 환하게 켜지도록 만들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는 언어를 갈고 닦는 대장장이와 같아야 한다. 물론, 설교는 성령이 역사하는 도구다. 언어가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변화시킨다. 하지만 성령께서는 선포하는 순간에만 역사하지 않으신다. 설교자가 기도하며 언어를 갈고 닦을 때도 성령은 역사하신다. 그렇게 정선되고 다듬어진 언어가 아니면 하나님의 진리가 옳게 선포될 수 없다.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진리의 격에 맞는 품격 있는 설교를 찾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자의 부탁을 받고 마음에 있는 생각을 다 쏟아 놓고 나니, 덜컥 겁이 난다. 이 글을 보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앞에서도 말했지만, 나도 매 주일 설교 사역을 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다른 사람의 설교에 대해 말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이다. 내가 누군데…라는 생각, 너는 얼마나 잘하는데…라는 생각이 나를 흔든다. 많이 주저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기자에게 글을 보낸다. 동지들에게 "이렇게 해 봅시다"라는 뜻으로 읽혀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김영봉 / 와싱톤한인교회 담임목사·목회멘토링사역원 원장, <가장 위험한 기도, 주기도>·<사귐의 기도> 등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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